279화
"말도 안 되는……."
주앙 칼 고르는 말을 잃었다. 그의 주변에 모여 있는 영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우프람 자작의 선봉은 벌써 궤멸 직전이다. 처음 교전에서부터 완전히 대열이 짓뭉개진 그들은 퇴각조차 하지 못하고 적들에게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원군을 보내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적들의 기세가 너무 매섭습니다."
"전하! 이대로라면 적이 이곳까지 들이닥칠지도 모릅니다. 일단은 뒤로 물러나심이 어떨지."
주앙 칼 고르는 특별히 군재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신하들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번 전쟁에서 친정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반대의 목소리가 꽤 있었다.
하지만 군재가 떨어진다고 해서, 그가 겁쟁이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뛰어나지 않다 뿐이지, 평범한 수준의 사고와 판단은 가능했다.
"우리가 물러난다 해서 적들이 순순히 놓아주겠는가. 추격을 받으면 대열이 무너져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이겠지."
"하오나……."
"염려하는 바는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애초에 나서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전장에 발을 디딘 이상 한심한 꼴은 보이지 않겠다."
그는 등을 돌리고 물러서는 것보다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왕의 의지를 읽은 영주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허면, 사제들을 준비시키시지요."
"그리하라."
베이고르 왕가로부터 정식으로 인정을 받은, 이 땅에 제국의 치세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사교라 불리며 박해 받았던 교단들 역시 이번 전쟁에 참여했다. 비록 수는 적으나, 그들의 힘은 베이고르 국력의 일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전의 전쟁들에서도 그랬고, 이번의 전쟁 역시 마찬가지.
"전하."
사제단이 모여들었다. 각 교단 별로 많으면 십 수 명에 이르기까지 종군하고 있었기에 그 수를 다 합치니 백이 넘었다.
"보다시피 적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그대들의 힘으로 저들의 기세를 꺾을 수 있겠는가."
"저희의 힘이 아닙니다. 저희를 굽어 살피시는 신의 힘이지요."
왕을 앞에 두고서도, 사나운 적을 앞에 두고서도 꼬장꼬장하다. 평소에는 그런 점이 오히려 더 믿음직스러웠으나, 지금만큼은 그런 반응이 썩 달갑지 않았다.
"할 수 있겠는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중보병들이 대열을 갖췄다. 방패를 세우고, 창을 올리고, 시위에 살을 걸었다. 적들은 여전히 사나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고, 본진으로의 지원을 요청하는 북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오오오오오-!
몸을 떨리게 만드는 함성이 모든 것을 묻어버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창칼을 든 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 안 되는 적이다. 잠깐 뒤를 돌아보면,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눈에 들어오는 아군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런 자그마한 적에게 그들은 압도되었다. 누군가 가슴 속에 손을 집어넣어 심장을 움켜쥐기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이.
"온다아아아!"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 거리가 예상 이상으로 빠르게 좁혀졌다. 다급히 깃발이 올라가고,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앞으로 나가있던 사제들이 일제히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쿵!
완만하게 경사가 져 있던 땅이 갑작스레 움푹 파여 들어갔다. 딱딱하지는 않아도 물렁하지는 않던 땅이 며칠 간 비라도 듬뿍 맞은 것처럼 흐물흐물하게 변했고, 거침없이 달려오던 타르가이 베르겐과 바르바피들은 그런 땅에 발을 디뎠다.
크아아아아아-!
마치 늪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앞만 보고 달리던 바르바피들은 갑작스레 변한 땅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균형을 잃었다. 발버둥을 쳐보지만 그럴수록 더 깊숙이 빠져 들어갈 뿐이었다.
[잔재주를 부리느냐!]
크허엉!
타르가이 베르겐을 태운 거대한 짐승은 옆에 빠진 바르바피를 짓밟고 올라섰다. 그렇다고 해도 함께 빠져있는 터라 위로 올라가는 것도 한 순간뿐이었지만, 그 한 순간 만에 짐승은 뛰어올랐다.
마치 비상하는 새처럼 높이 떠오른 짐승은 늪이 된 땅을 지나 단단한 흙바닥 위에 착지했다.
크아아아아-!
주인이 하는 것을 보았는지, 뒤에 있던 바르바피들도 저마다 동료들을 짓밟으면서 올라섰다. 동료의 발에 밟히며 가라앉는 바르바피들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한 번 밟히며 밀려난 자들이 다시 떠오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쓸 데 없는 짓을.]
타르가이 베르겐은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으며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그의 앞으로는 하늘이 까맸다.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깔린 것은 아니었다.
자그마한 점들이 무수히 하늘을 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빠르게 덩치를 키우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괜찮겠습니까?"
우려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말을 꺼낸 영주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그와 비슷하게 우려 , 혹은 약간의 불만 섞인 시선이 느껴졌지만 역시 다 무시했다.
"군단장 각하. 어째서 움직이시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내가 한 번 그대로 돌려 묻겠네. 움직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예? 그야…적을 앞에 두고 있지 않습니까. 적들은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군의 규모에서 비교가 불가할 정도입니다. 치면 승리를 거둘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호오."
마땅히 반박하지 않는다고, 아니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꺼낸 영주는 목소리에 더 힘을 실었다.
"더군다나 저 안에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아그니스 체스퍼가 아닙니까? 제국의 흑포장군 말입니다. 일찍부터 아국의 대적이었던 자입니다. 그 자의 목을 취할 수 있다면 그 만한 공명이 더 있겠습니까?"
대적인 것이 아니다. 대적이었던 자다. 현재 베이고르의 주적은 제국이 아니라 타칸 연합이었으니.
하지만 상황을 만든 것은 아그니스 체스퍼 본인이다. 그 스스로 뜬금없이 군사를 이끌고 국경을 넘었고, 지금 이렇게 한도라까지 점령하지 않았는가? 비록 그 과정에서 베이고르와 부딪친 적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전장으로 먼저 뛰어든 것은 그다.
아직까지 타라냐드를 비롯해 제국의 다른 주들에서 병력이 움직였다는 보고가 없는 것으로 보아 십중팔구 아그니스 체스퍼의 참전은 그의 독단이었을 터, 여기서 그의 목을 취한다고 해도 크게 흠 잡힐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다. 만에 하나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제국이 애초부터 다시금 전쟁의 불씨를 지피길 원했다는 것이니 상대해주면 그만이고.
"좋아. 그대의 말이 맞소.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은 참으로 탐나는 보물이지. 하지만 우리 한 번 생각해봅시다."
프롱기우스 백작이 그의 막사에 모인 영주들의 면면을 쓱 눈으로 훑었다.
"처음 아그니스 체스퍼에 대해 보고 받았을 때, 그가 이끌고 있는 병력은 5천 남짓이었지. 대략 4천이 조금 넘었다고 보고 있소. 솔직히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헛웃음이 나더군. 그 작은 병력으로 대체 뭘 할 수 있겠냐 생각했었지."
그랬다. 기껏해야 국경을 넘어 약탈이나 조금 하다가 돌아갈 줄 알았다. 혼란에 빠진 타칸 연합의 상황을 이용한 자그마한 분풀이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병력은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일들을 해내기 시작했지. 솔직히 아직도 어찌 그럴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아그니스 체스퍼의 명성이야 나 같은 범부에 비할 바 없이 높고, 그만큼 대단한 자임이 분명하지만 지휘관이 대단하다고 해서 불가능한 일을 기적처럼 척척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의 휘하 병사들이 모두 일당십, 아니 일당백의 용사들이 아닌 이상에야 그가 행한 일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한 일이지. 특히 저 타칸 연합의 수도, 한도라를 함락시킨 것은 정말이지……."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영주들을 하나하나 쓸어보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들이 많았고, 아직까지도 불만에 차 있는 자들도 몇 있었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하지. 적들은 절대 약하지 않소. 고작 4천이 조금 넘는 병력으로 그보다 배 이상 되는 적군을 격파하고, 그도 모자라 도시 4곳과 타칸 연합의 심장인 한도라를 함락시키는 일이…그저 운이 좋아서라고 폄하할 수는 없는 것 아니오?"
"군단장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확실히, 대공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적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한 부분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허나 각하. 그렇다고 하면, 설마 각하께서는 저들을 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쳐야지. 다만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저들이 저 도시에 틀어박혀 얻을 것이 무에 있겠는가."
"예?"
"기다린다고 지원군이 오겠나? 온다면 소식을 들은 타칸 연합의 병력이나 오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는 일단 한 번 물러나보도록 하지."
입을 쩍 벌린 이들에게 프롱기우스 백작은 조용히 웃어보였다.
*
"장군! 적들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수하의 외침을 들은 아그니스 체스퍼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기어이 오지 않는 건가? 눈치가 빠르군.'
도시를 포위한 채 이틀을 그냥 보냈을 때 이미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적은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정말 최악을 가정한다면, 혹시 이쪽의 사정을 대강이나마 눈치 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쿠엘단의 축복, 혹은 저주가 선사한 힘은 처음에 비해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 처음 열흘 정도는 그야말로 잠을 잊고 밤낮 없이 싸우고 말을 달려도 기운이 넘쳤건만, 지금은 눈에 띄게 몸이 쇠약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힘을 얻기 전보다는 낫지만, 이 힘마저 언제 다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얻은 힘만 사라져버린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군.'
군주 쿠엘단은 임무를 내리며 기한을 정했다. 이제 그 기한이 다가오고 있다. 임무는 달성했지만, 기한이 다 되면 어찌 될까.
'피차 이용했을 뿐이지.'
내용만 보면 일방적으로 이용당한 셈이지만, 딱히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 덕분에 야만인들의 목은 원 없이 벨 수 있었으니.
"장군. 어찌 할까요."
그는 답하지 않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정말로 적들은 포위를 풀고서 물러나고 있었다. 이 도시에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이.
'함정이다.'
눈에 뻔히 보인다. 적들은 싸움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 싸울 거면 도시 밖으로 나오라고, 나와서 싸우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싸우다 죽느냐, 앉아 죽느냐…인가.'
아그니스 체스퍼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를 따라 성벽으로 올라온 수하들을 한 명씩 천천히 둘러보았다.
"못난 상관이라서 미안하구나."
"장군. 어찌 그런 말씀을."
"…나와 함께 죽어다오."
어렵게 낸 말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웃었다.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