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칸디시아렌 공작은 며칠 전에 합류한 리에론 공작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일군을 이끌고 패전을 겪은 지휘관답지 않게 그는 당당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이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든 채 왕과 마주했고 이전의 전투에 대해 보고했다.
후에 자리가 파한 후에 그와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는 넌지시 묻는 말에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길 수 없는 전투였소. 처음 맞붙자마자 그것을 알았지. 그래서 나는 미련하게 싸워 크게 패하는 것보다 작게 패하고 전력을 온존하는 쪽을 택했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했으니,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지."
"그렇소이까. 뭐, 그 자리에 없던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 생각하오. 아, 그런데 리에론 공작께서는 일전에 그와 싸워본 경험이 있지 않으시오? 예전, 제국에 몸을 담고 계셨을 때 말이오."
"그렇소. 일전에 베나시드에서 싸워본 적이 있지. 뭐, 그렇기는 해도 내가 한 일이라고는 선친을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 밖에는 없지만."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한 나라를 등진 과거를 들추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닌 과거를 이야기함에도 리에론 공작은 왕을 마주하고 고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움이나 거리낌 따위는 일절 내보이지 않았다. 속이야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적들에 대해 듣고 싶소."
"조금 전에 전하께 고하는 자리에 함께 계시지 않았소."
"어려운 자리에서는 하기 힘든 말이 있지 않았겠소. 공작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소. 어차피 오늘 남은 시간에는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개인적인 호기심이시오?"
"이제 곧 싸워야 할 적이 아니오. 많이 알수록 나쁠 것은 없지 않겠소."
물론 그의 말마따나, 그가 왕에게 고할 때 그 자리에서 적이 얼마나 강대했는지에 대해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칸디시아렌 공작은 그런 형식적인 것 말고, 직접 맞부딪친 자의 주관적인 감상을 듣고 싶었다. 이미 한 차례 타르가이 베르겐에 대적해 본 적이 있는 그의 감상을.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 같은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칸디시아렌 공작은 영지에서부터 챙겨왔던 애주까지 내놓았다.
귀한 미주의 효과는 탁월했다. 맛 좋은 술이 들어가서인지 다소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날이 서있던 리에론 공작의 목소리도 누그러진 듯했다.
"…말했던 대로요. 처음 부딪쳤을 때, 대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지."
"무인으로서의 감이오?"
리에론 가문은 전통의 무가다. 비록 당대의 리에론 공작은 그의 선친이나 이름난 선조들에 비해 여러모로 떨어진다는 평이 암암리에 돌기는 하지만, 그래도 혈통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어찌 되었든, 그는 이미 베나시드(구 살마드)에서 타르가이 베르겐과 대적한 경험이 있는 사내였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은 허투루 들을 수 없다.
"바르바피들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되어 있었소. 적들의 접근을 사전에 접했기에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채 적들이 당도하기를 기다렸지."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전혀 소용 없는 일이더군."
"송용 없다 함은?"
"적의 전술은 단순했소. 타르가이 베르겐이 바르바피들을 이끌고 정면으로 쳐들어왔지. 그런데……그것으로 끝이었소. 그 단순한 돌진을 막을 수가 없었지."
스스로 굉장히 없어 보이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리에론 공작은 허탈하게 웃었다.
"순식간에 선봉이 무너졌고, 중군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지. 그 순간에 난 선택을 해야 했소. 물러나느냐, 아니면 난입한 적부터 에워싸고 끝장을 보느냐."
"지금도 그때 내린 판단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소?"
"전혀."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겪어보면 알게 될 거외다. 활활 타오르는 게 빤히 보이는 불에 굳이 손을 집어넣을 어리석음 따 따위, 내게는 없소."
거기까지였다.
그날, 칸디시아렌 공작은 호기심을 달래려다가 더 큰 호기심을 떠안고 말았다.
'불이라.'
무부(武夫)답지 않은 표현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수십 배는 되는 아군을 향해 질주해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고 있으니 그 표현이 정말로 적절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우프람 자작이 움직입니다!"
오백 기의 철갑 기마대를 필두로 한 기병대를 자랑거리로 삼는 우프람 자작은 국왕이 있는 중군에 포진해 있었다. 그가 움직였다 함은 왕의 허락을 얻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즉 왕이 상대를 재단해보고자 함이니.
'수는 이쪽이 우위.'
시험해보고자 한다 해도 마냥 전력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신호가 올라왔고, 전군이 보조를 맞춰 움직였다. 우프람 자작이 적을 멈춰 세운다면, 그 다음은 파상공세다.
크허엉!
짐승들의 무리에서 점 하나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한데 뭉쳐 돌진하는 기병들과 정면에서 부딪쳤다.
그 순간, 돌덩이처럼 단단해 보였던 우프람 자작의 부대가 갈려나가기 시작했다. 점 하나가 부딪쳤던 곳에서부터, 칼날에 베여나가는 잎사귀처럼, 단단히 뭉쳐 있던 병력이 양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나뉜 병력들에게 사나운 짐승들이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위험하군.'
화살비마저 용맹하게 뚫고 나간다는 철갑기병대가, 정면 대결에서는 패한 적은 물론이고 멈춰선 적도 없다는 우프람 자작의 기병들이 허망할 만큼 처참하게 무너져갔다.
'불이라.'
리에론 공작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저들은 불일지도 모른다. 우프람 자작과 그의 병사들이 바싹 마른 초목이라면 말이다.
'바깥쪽에서 벌려오는가.'
중앙에서 충격적인 양상이 나오고 있었지만 칸디시아렌 공작은 더 이상 그곳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뒤편에서부터 넓게 벌려서 들어오는 또 다른 적들을 살폈다.
'병력 수는 이쪽이 압도적이다. 그런데도 뭉치지 않고 펼쳐서 오다니.'
현재 포진한 군대 전체를 하나의 생물로 본다면 중군은 심장이다. 제 아무리 거대한 생물이라 해도 심장이 찔리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중군이 밀리게 되면 군세 전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식의 군 운용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단적으로 말하면, 위험하다.
당장 이쪽의 병력은 5만을 상회하는데 반해 적의 병력은 2만도 되지 않는다. 배 이상의 차이다. 다수의 적을 상대로 적은 병력을 넓게 펼쳐봐야 두께만 얕아질 뿐이니, 중앙을 밀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고서는 무모한 패착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중앙에서의 힘 싸움에서 압도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겠지.'
단순한 전략이다.
중앙에서 치고 들어가는 소수의 적이 작은 불꽃이라면 펼쳐서 덮쳐오는 나머지는 바람이다. 바람은 불꽃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고, 바람을 맞아 큰 불은 상대를 불태운다.
'불은 내 소관이 아니지. 나는 바람을 막겠다.'
칸디시아렌 공작은 방패병을 전열에 세우고 보병들을 진군시켰다. 그들로 하여금 적의 견제를 버티게 하고, 한편으로는 기병들은 후열에 대기시키며 적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되, 그렇다고 적에게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다.
'바람이 없다면 작은 불씨가 어찌 홀로 타오를 수 있겠는가.'
전장의 논리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한 칼은 두 칼을 당해낼 수 없다. 제 아무리 용맹한 최정예라 한들 적에게 둘러싸여 고립된다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양 날개가 버텨준다면, 결국 혼자서 깊숙이 들어간 불씨는 알아서 꺼질 것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둥! 둥! 둥!
"무슨?!"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일정한 북소리에 칸디시아렌 공작은 대경하여 고삐를 당겼다. 천천히 나아가던 말이 기겁을 하며 투레질을 쳤다.
일정한 속도로 울리고 있는 북이 전하는 신호. 그것이 전하는 의미는 '본진 위급'이었다.
*
촤악!
인간의 피륙도, 그 위에 걸친 쇠붙이도 그의 칼날 앞에서는 구분이 없었다. 긋는 대로 베어졌고, 휘두르는 대로 나가 떨어졌다.
크르르르.
수백의 바르바피…아니, 바르바피를 넘어선 '노예'들이 사방에서 포효했다. 오직 수십 마리만이 마땅한 적을 찾지 못하고 그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렸다.
[쉬지 마라. 계속 날뛰어라.]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머무는 것들이 적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자처해 남아있는 것임을.
기특한 마음이 들었으나, 동시에 우습기도 했다.
지키다니, 누굴 누구로부터 지킨다는 말인가. 그런 걱정 자체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키잉!
그르르르…….
주인의 서늘한 눈총을 받은 노예들이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비로소 홀로 남은 타르가이 베르겐은 핏물을 잔뜩 묻힌 그의 칼을 들어올렸다. 옛 기억 속에서 좀처럼 날이 상하는 법이 없었던 그의 도는 그런 기억이 무색하게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었다. 너무 험하게 쓴 탓일까. 하긴, 이전이라면 피해서 베었을 단단한 곳들도 우악스럽게 베어 넘기긴 했다만.
마땅찮다. 이 도는 예전의 자신에게는 어울리는 것이었을지언정, 지금의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너무 허약하다.
그그그그극!
손톱 하나로 칼날을 긁어내렸다. 칼이 내는 까칠한 비명과 함께 불똥이 튀며 무뎌졌던 날이 바로 섰다.
[왜 보이지 않지?]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은 왕의 목도 아니고, 귀찮을 정도로 많은 버러지들도 아니다. 있어서는 안 될,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정체 모를 불쾌한…….
[숨은 건가.]
알 것 같았다. 지금도 떨고 있는 다른 것들처럼, 거슬리는 '그것' 역시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음이라.
하긴,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여기 이 땅의 주인이 있으니, 이 땅 위에 발 디딘 자들이라면 응당 바짝 엎드려 두려움에 떨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나와라! 주인의 앞에 와 부복하라!]
거세게 일갈하고, 타르가이 베르겐은 다시금 그의 탈것을 달리게 했다. 고삐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런 것은 종복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덜떨어진 것들이나 필요한 것.
타르가이 베르겐은 전후좌우로 뛰어다니는 맹수 위에서 맹렬히 긴 칼을 휘둘렀다. 막아서는 모든 것이 부서지고, 베여 쓰러졌다. 그가 가는 곳에는 없던 길이 열렸고, 그가 다가갔을 때 모든 적은 두려움에 젖었다.
오오오오오오-!
불은 바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작은 불씨는 그 모습 그대로, 커다란 돌덩이처럼 보였던 것을 태우고 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