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거슬린다. 그렇게 밖에는 이 불쾌함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질적이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저 어딘가에 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를 분노케 하는 무언가, 누군가가.
[누구냐.]
하늘이, 흘러가는 구름이, 비치는 햇살이 모두 그의 눈이다. 그가 무수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볼 때, 거슬리는 존재 역시 그를 바라보았다.
*
"느껴지시오? 타칸의 대족장이."
베이고르의 왕, 주앙 칼 고르는 어렴풋이 보이는 타칸 연합군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두 다리를 땅에 딛고 섰으나 말을 타고 있는 그보다도 월등히 큰 요정의 왕이 팔짱을 풀었다.
[거대한 존재다.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라면, 괴물이라도 되오?"
[뭔지 모를 신의 껍질에 부서진 신의 혼을 들였다. 불완전하지만, 지금의 그는 반쯤은 신이라 할 수 있다.]
"그대의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군."
[하늘도, 땅도 그의 숨소리에 몸을 숙였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지만 주앙 칼 고르는 요정왕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가 이제껏 보여준 활약이 너무나 대단했다.
그와 그의 요정 병사들은 수는 적지만, 수만의 병사도 할 수 없는 활약을 몇 번씩이나 해보였다. 그 결과 맞닥뜨리는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국왕으로서의 위신을 높이 세울 수 있었다.
큰 힘이 될 것을 기대하고서 부른 우군이기는 했지만, 이제껏 그들이 보여준 실력은 그런 기대를 월등히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요정왕을 신뢰했다. 적어도 그의 능력만큼은 의심치 않았다.
"어찌 하면 좋겠소? 그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리다."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
요정왕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한 무릎을 땅에 대고서도 그의 머리는 주앙 칼 고르의 눈높이와 비슷한 선에 있었다. 등에 맨 거대하고 둔탁한 석검(石劍)의 칼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
요정왕은 한 손을 땅에 댔다. 암석 같이 색이 바래고, 거칠거칠한 그의 손이 땅을 누르자 마치 물에 손을 넣은 것처럼 손목까지 부드럽게 파고들어갔다.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 적은 당장 눈앞에 있소. 그가 우리를 기다려줄 것 같지는 않은데."
[형제들이 겁에 질려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나 걸리겠소?"
[반나절 정도.]
주앙 칼 고르는 마른 숨을 토했다.
"노력해보리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적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비슷한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였는가 하고 떠올려보니 수 년 전, 생전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뎠던 때가 기억이 났다. 그때의 그는 지금보다 더 젊고, 어리석으며, 약했다.
그럼에도 능력에 비해 자신감만은 넘쳐흘렀고, 기세 좋게 군대를 몰아 제국과 싸웠었다. 그리고, 대적과 맞닥뜨렸었다.
지금 되돌아봐도 치욕적인 기억이다. 힘을 얻기 전인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두려움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그가, 처음으로 주저앉을 뻔했던 순간이었으니.
[지금이라면 다르다.]
그때의 대적은 여기에 없다. 하지만 그가 바로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타르가이 베르겐은 노기를 드러냈다. 주변의 잡스러운 것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감감이 당연하게 와 닿았다.
[보여주겠다.]
말도 아니고, 늑대도 아니며, 여타 다른 짐승과도 닮지 않은 붉은 눈의 거대한 짐승이 주인의 뜻에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흉포한 숨결이 흐를 때마다 생기 넘치는 풀들이 시들고, 따스한 공기가 서늘하게 식었다.
크르르…….
그가 움직이니 바르바피들이 몰려들었다. 그 수가 족히 수백, 아니 천. 아니, 그 이상.
일반적인 바르바피들과 달리, 그의 주변으로 모여든 것들은 모두 덩치가 컸다. 또한 두 발이 아닌 네 발로 걸으니, 생김새나 행동이나 모두 확연히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
[가자.]
짐승들이 앞서 나가고, 군대가 그 뒤를 따랐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기다란 칼 한 자루를 들었다.
이 한 자루 도는 그를 처음 족장의 자리에 앉게 만들어준 거대한 사냥감의 척추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부족의 무자(巫子)가 축복을 해주어 어지간한 쇠붙이보다 더 단단하고 탄성이 강했다. 그는 어린 나리에 족장이 되었을 때부터 이 도를 몸에서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그의 분신과도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오랜 시간을 사용하면서 그 애착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그에게 애착이니 뭐니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약했던 시절, 보잘 것 없었던 시절의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가 이 칼을 든 이유는 그저 손에 익었기 때문이다.
혼은 강대해졌을지언정 육신의 기반은 그대로였기에, 손에 익은 무기를 쥐는 것이 아무래도 더 편했기에. 단지 그뿐이다.
그는 타르가이 베르겐이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새롭게 태어났고, 과거의 초라한 자신은 부정하고 싶고 지우고 싶은 허물일 뿐이다.
크허어엉!
검은 물결이 일렁거렸다.
*
프롱기우스 백작이 이끄는 베이고르군은 타칸 연합의 수도, 한도라를 목전에 두었다.
"대단하군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요 며칠 동안, 그들은 앞서 간 자들의 흔적만을 보아왔다. 철저한 죽음과 파괴의 잔재들을 보면서 그들의 힘을 실감했지만, 이번에는 혹시나 했다. 왜냐하면, 이번의 경우는 이전번들과는 확실히 달랐으니까.
아무리 성벽을 쌓는 일도, 이용하는 일도 없는 타칸 연합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일국의 수도였으니까. 주 전력이 다 빠져나갔다고는 해도 한 나라의 수도를 상대로 고작해야 수천 밖에 되지 않는 병력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틀렸다. 그들은 기어이 해내고 말았다.
뻥 뚫린 성문과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들, 성벽 아래에 쌓인 시체들은 얼마 전에 있었던 격전을 현장으로서 증명한다.
"적들이 우리를 발견했습니다."
"어찌 나올 것 같은가?"
"…성문을 막고 틀어박히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이다. 성벽 위를 서성이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길이에 비해서는 턱 없이 모자란 수였으니, 도시 안에 있는 병력도 그에 비례하여 적을 것으로 예상 됐다.
공성전을 치르면서 소모된 병력이 얼마나 될까? 저 멀리 성벽 아래 쌓인 시신들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다. 천 명은 넘게 남았을까? 그렇다 해도 이쪽은 1만을 훌쩍 넘어 1만 5천에 가깝다. 제 정신이라면 지금이라도 무너진 성문을 무엇으로든 틀어막고 수성을 준비하겠지.
"군단장께서는…저들이 어찌 나오리라 보십니까?"
"모르겠네. 이번만은 정말 모르겠군. 그래서 궁금해."
가라앉은 두 눈이 크지만 초라한 도시를 담았다.
"저 미친놈들이 어찌 나올지, 정말로 궁금해."
그는 군사를 움직였다. 저 안에 얼마가 있든, 이쪽에 압도적인 수의 우위가 있는 것은 확실했기에 길게 병사들은 포진시켜 포위망을 갖춘 채 한도라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렇게 흐릿하게 형체만 보이던 도시의 외관이 뚜렷하게 잡힐 때까지 다가갔을 때에도 도시 안에서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
"……."
아그니스 체스퍼는 갈라진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는 자그마한 감옥, 아니 우리가 있었다. 우리라고 해봐야 굵은 나무 기둥 몇 개를 조잡하게 얽어 만든 것이었고, 틈새도 널찍해서 성인 남성이 여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저것을 두고 감옥이든, 우리든 부르는 것은 우스운 일이이라.
그는 이 도시를 점령하자마자 수하들에게 도시 안에 있는 주민 모두를 주살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홀로 이곳에 와 저 우리에 가루를 뿌렸다. 그러자 환한 빛이 터졌다. 그 순간 그는 군주 쿠엘단에게 받은 명령(그는 거래이며 제안이라고 했지만)을 완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서 아주 잠시 동안 쪽잠을 잤다. 어두운 도시는 더 이상 그의 꿈에 찾아오지 않았다.
'다 끝났군.'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영문 모를 분노가 조금은 희미해진 느낌이었다. 더 이상 이성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것은 없었다.
때문에 알았다. 철저하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하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이용한 대신 힘을 주었고, 그 힘으로 그는 적들을 섬멸하고 끝내는 그들의 수도까지 무너뜨릴 수 있었다.
복수한 것이다. 잃어버린 명예도 되찾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허탈함은 무엇일까?
"장군."
"……."
"적이 나타났습니다. 베이고르의 깃발입니다. 그 수는…1만이 넘어 보입니다."
"어디에서 나타났지?"
"북쪽입니다."
북쪽이라. 자신들 역시 북쪽에서 왔다. 설마하니 단 이틀 차이로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 단지 지독한 불운 때문일 것 같지는 않았다.
'뒤를 밟히다니. 아니, 아니지. 그러고 보면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았잖은가.'
"지독하게도 눈이 멀어 있었군."
실소가 절로 나왔다.
"어찌 하오리까?"
"…시체들로 성문을 막아라."
"수성을 생각하시는지."
알고 있다. 이미 반파되다시피 한 성벽으로는, 그리고 무엇보다 성벽 전체를 지킬 수도 없이 적은 병력으로는 수성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적은 수로 넓은 전장에 나가봐야 먹이가 될 뿐이다. 차라리 안으로 들여서 싸우는 것이 나아."
"그렇다면……."
"성벽 위에 병사들을 올리되, 적이 오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다. 적이 쳐들어온다면 조금 호응해주다가 안으로 물러서라. 시가전이 될 것이다."
"옛!"
수하가 물러갔다.
홀로 남은 그는 앉은 채로 다시 웃었다.
'재미있군. 얄궂다고 해야 하나.'
대족장의 목을 베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나, 어쨌든 야만인 놈들은 원 없이 죽였다. 대족장의 목 대신, 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놈들의 수도를 함락시키기도 했다.
그랬더니 이제는 야만인 놈들 대신에 반군 놈들이 알아서 나타나주었다.
허탈하던 마음에 다시 의욕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상처 입고 지쳐 늘어져 있던 몸에 활력이 감돈다.
콱!
칼집을 잃어버린 검으로 땅을 찍고, 그는 다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