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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76화 (276/1,064)

276화

프롱기우스 백작은 탐마를 수백 기나 운용했다. 이 정도면 동원할 수 있는 최대를 동원했다고 봐도 좋았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초대받지 않은 전장에 난입한 제국의 흑포장군, 아그니스 체스퍼의 동태를 살피는 것.

많은 수를 투입한 보람이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속속들이 정보가 들어왔다. 그 정보에 따르면 아그니스 체스퍼가 이끄는 제국군은 착실히 남진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몇 번씩이나 타칸 연합의 병력과 부딪친 모양이었다.

"기세가 대단합니다.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시신과 파괴의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족히 천에 가까운 시신을 보았습니다. 마을은 다 타버린 잔해만이 남았습니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정찰병들이 전하는 보고를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옅지만, 흡족한 낯빛이었다.

"정말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는군."

누가 보면 제국군과 동맹이라도 되는 줄 알 것 같은 말을 하면서, 그는 탁자 위의 지도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인상적이야."

"파악한 바에 따르면 그들의 병력은 대략 4천. 그리 많은 수는 아닙니다."

"허나 그 아그니스 체스퍼가 이끄는 군대. 아마도 그 4천은 이전의 전쟁에서 살아 도망친 패잔병들이겠지요. 실력만큼은 확실할 것입니다."

"내가 인상적이라 한 것은 그들의 실력이 아니야. 행군속도지. 어떻게 이렇게 거침없이 움직일 수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해. 이들은 마치 자국의 땅에서 내달리는 것처럼 남하하고 있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조금 전 들은 보고로 파악한 제국군의 위치를 보았다. 그의 검지가 지도 위에 닿고, 처음 보고를 들었던 위치에서부터 현 위치까지를 그었다. 그 이후부터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당연히 지금도 제국군은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경로를 보면……."

타라냐드에서 출발했을 거다. 그 후 서부 일대를 시끄럽게 휩쓸고 다녔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잘한 전투 대신에 제대로 한 방 먹여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대로 가면 한도라(타칸 연합의 수도)다."

"설마……."

"너무 무모합니다. 최대로 잡아도 5천 정도에 불과한데, 그 정도 병력으로 수도를 친다는 것은…아무리 아그니스 체스퍼가 대단해도 그것은 무리입니다."

즉각 부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당연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5천도 안 되는 병력으로 적의 수도를 치는 건 불가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다.

"글쎄.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나오는 건 한도라 뿐이다."

사람의 입은 거짓을 말해도, 지나온 행적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제국의 흑포장군이라는 자가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면…자신이 있는 것이거나.'

뒷말은 속에 삼키고 앞말은 뱉었으나, 정작 프롱기우스 백작 본인은 전자일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끝내 패장이 되어 도망치기는 했으나, 아그니스 체스퍼라는 자는 들은 것만을 놓고 봐도 녹록한 자는 아니었다.

그런 자가 뜬금없이 갑자기 왜 다시 병력을 이끌고 돌아왔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돌아왔을 때는 헛되이 목을 날리려고 돌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아그니스 체스퍼와 제국군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면서, 프롱기우스 백작이 이끄는 베이고르군은 느슨하게 그 뒤를 따랐다. 앞서 간 자들이 실컷 싸워줘서인지 그들을 막아서는 적은 없었다.

이따금씩 눈에 보이는 살벌한 흔적들만 제외하면, 적국의 영토를 거닐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만큼 놀랍도록 쾌적한 행군이었다.

'이제 슬슬 알아차릴 때도 되었는데, 영 반응이 없군.'

당장에 적과 전투가 없으니 장졸들은 좋아하는 듯했지만, 편한 날들이 이어질수록 프롱기우스 백작의 미간에는 점점 더 굵은 주름이 잡혔다.

아무리 멀찍이 거리를 두고 최대한 조용하게 따라가는 중이라 하나, 아그니스 체스퍼도 바보가 아닌데 당연히 뒤를 살필 것이다. 그러면 이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탐마들에 대해서도 감지를 하게 될 터인데, 아직까지도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사실, 프롱기우스 백작은 이쯤에서 아그니스 체스퍼가 어떤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했었다. 뒤를 잡힌 채로 계속 싸움을 이어갈 리는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반응을 보면 그는 이쪽의 존재에 대해 아직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건가.'

혹시 몰라 매복을 주의하면서 행군 속도를 더 늦췄지만 걸리는 것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은 것이지만, 그럴수록 프롱기우스 백작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변해갔다.

"보고입니다! 사흘거리 협곡에 대전(大戰)의 흔적이……."

'사흘거리라.'

프롱기우스 백작은 이제껏 쉬게 했던 만큼 고삐를 조이겠다는 듯 급속행군을 지시했다. 하루의 절반을 이동하는 강행군 끝에 사흘거리라 말했던 거리를 이틀 만에 주파했고, 정찰병이 전했던 소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이건……."

2군단에서 합류한 한 영주가 입을 막았다. 유약한 인상에 걸맞은 반응이었으나, 그만 그런 것이 아니기에 우습게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이 협곡에 펼쳐진 광경을 본다면, 어지간히 담이 센 자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게 될 테니까. 실제로도 지금 주변에는 입을 가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영 표정이 좋지 못한 자들이 꽤 있었다.

"넉넉잡아 만…정도 되겠군."

프롱기우스 백작이 중얼거렸다.

좌우로 완만한 경사를 가진 협곡에는 시신들이 가득했다. 위에서부터 경사를 타고 내려오는 부분까지, 인마의 시신에 가려 본래 이곳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널브러진 시신들…대부분 타칸 연합의 것입니다."

"나도 눈이 있네."

면박이나 무안을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둘러대자면 생각에 잠겨 있었던 터라, 한 눈에 보고도 알 수 있는 것을 쓸데없이 지껄이는 상대에게 어쩔 수 없이 짜증이 일었던 것뿐이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을 한 차례 눈으로 둘러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코누디스 남작."

"예."

"어찌 보는가?"

갑작스런 부름에 막시밀리언은 잠시 할 말을 골라야 했다. 자신에게 쏠리는 주변의 시선이 떨떠름했지만 물었으니 답은 해야 한다. 하지만 대체 이 변덕스런 군단장은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타칸 연합은 제국군을 유인했을 겁니다."

"근거는?"

"시신의 절반 정도는 아래에 있지만, 나머지는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미리 고지를 점한 채 이 협곡으로 제국군을 끌어들였어. 딴에는 나름대로 머리를 쓴다고 쓴 거겠지. 좋아. 그게 전부인가?"

"저는 그렇습니다."

말인즉 당신은 더 있지 않느냐는 뜻이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피식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도리어 당했지. 협곡의 고지를 점하고 있던 놈들은 나뉘어 움직인, 아마도 별동대 정도 되는 소수 병력에게 옆구리를 찔렸고 그대로 무너졌을 거다."

고지에서 대기했을 병력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경사진 땅을 거꾸로 올라가서 상대한 게 아닌 이상, 그들을 상대한 것은 고지에서 움직인 또 다른 병력.

"너무 우습게 봤어. 철저하게 간파 당했다."

그리고 처절하게 대가를 치렀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대승도 이런 압도적인 대승이라니."

드러난 시신의 수만 봐도 따로 수습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지는 않아도 당장 눈에 보이는 시신들 중 제국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극히 적었다. 기껏해야 수백 정도? 협곡 위에 널브러져 있을 것들까지 합해도 오백은 넘지 않을 터.

'후방에 남은 병력이라 오합지졸이었던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상대가 얼마나 머저리들이었든 간에, 결과가 이렇다면 폄하할 수는 없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뜻밖의 협조자' 정도로만 여겼던 제국군에 대한 평가를 상향조정했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바쁘게 움직인 군대다. 피로가 쌓여도 한참은 쌓였을 것인데, 그런 상태에서도 배는 되는 적을 맞아 보기 좋게 대파했다. 그러고 나서 곧장 다시 이동이라. 이것이 과연 인간의 군대로서 가능한 일인가?

언젠가부터 그의 미간에 낙인처럼 잡힌 주름은 도무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아그니스 체스퍼는 멀찍한 곳에 솟은 높은 첨탑을 보았다. 언젠가 이 땅이 적의 말발굽에 밟히기 전에도 본 적이 있는 도시였지만, 그때의 기억은 어둠 저편에 깊숙이 묻혀 있었다. 지금 그가 떠올리는 기억은 바로 어제 잠들었을 때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꿈속에서 본 도시는 달빛 아래 있었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도시는 정오의 햇살 아래에 있다는 것일까.

"장군."

수하 무관이 그를 상념에서 깨웠다. 돌멩이들이 서로 갈리고 부딪치며 내는 것 같은, 굉장히 탁하고 거친 목소리다. 본래 그의 목소리는 저렇지 않았으나, 이제는 이런 목소리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는 수하를 바라보았다.

눈의 흰자위에 드리운 어둑한 그늘이 보인다. 그 또한 익숙하다. 그 자신의 눈 또한 비슷하지 않을까. 아니, 비슷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할 것이다.

'오늘로서…보름하고 나흘째인가.'

기한은 넉넉하다. 바쁘게 움직인 보람이 있다.

"곧바로 치시지요. 저 따위 종잇장 같은 성문, 단번에 돌파해 보이겠습니다."

"아니. 오늘은 병사들을 쉬게 하겠다."

"장군."

"명령이다."

흉포한 기세가 고삐를 풀고 뛰쳐나왔다.

"소, 송구합니다."

반항기를 보이던 무관이 주춤하며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그가 물러가고 나서도 아그니스 체스퍼는 좀처럼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고 수십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서야 평정 아닌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곧이다. 이제 곧.'

마음이 둘로 쪼개진 듯했다. 하나는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저 도시를 무너뜨리라며 그를 닦달했고, 또 하나는 전투를 치르기 전 병사들을 쉬게 하라며 설득했다.

'빌어먹을.'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에는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강대한 힘이 넘쳐흘렀지만 그의 정신은 피폐해지다 못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원인은 그의 마음을 태우고 있는 강한 감정에 있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은 분노였다. 대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나, 바람을 맞아도 진정이 안 되고 살의와 파괴욕구만이 끓어올랐다.

'나는…당신의 노예가 아니오.'

아그니스 체스퍼는 끊임없이 울리는 환청에 대항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에게서 힘을 받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지시에 충실히 따라왔다는 것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도시를 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일 치겠다는 것뿐.

전장에서 보낸 수십 년의 세월과 경험이 이성을 붙드는 것뿐이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의 목소리를 조금도 거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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