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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75화 (275/1,064)

275화

죽을 곳을 찾고 있느냐고?

그는 답하기 전에 가만히 생각했다. 그리고 곧 이 군주임이 틀림없는 괴인에게 답했다.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죽고자 합니다."

[무슨 뜻이지?]

"소관은 죄인입니다. 죄를 씻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제국을 위해 싸우고자 합니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는 것인가?]

그 울림은 고저 없이 머릿속으로 들어왔지만, 어쩐지 묘하게 웃음기가 있는 것 같았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이를 악물었다.

"그 이상입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 빈약한 군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비루한 죽음이 될 뿐이다.]

"그리 되지 않기 위해……"

[또 다시 실패할 것이다. 또 다시 죄를 짓게 되겠지. 마지막 순간에, 너는 차라리 이곳에 오지 않고 죽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선언이었다.

그 순간, 아그니스 체스퍼는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자그마한 위안 한 점 건질 수 없는 비참한 전장에서 오욕의 구렁텅이에서 절규하는 사내는 분명 그 자신이었다.

'아니…아니다! 이럴 수는……!'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안배된 운명이라는 것을. 결코 벗어날 수 없고, 항거할 수도 없는.

깊은 절망에 빠져 무너져 내리는 그에게, 나직한 목소리가 다가와 귀를 간질였다.

[거부하고 싶은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 싶은가?]

[운명을 찌를 수 있는 칼을 원하느냐?]

아그니스 체스퍼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 절로 고개가 들렸다. 뭔지 모를 힘에 이끌려 컴컴한 땅에서 눈을 떼었다.

무언가가 무수하게 떨어져 내렸다. 빗물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은은하게, 또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석 같기도 하고 별 같기도 한 그것들은 어디선가 떨어져 내려와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누구라도 입을 벌리고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나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 아름다움을 의식할 수 없었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찬란함의 너머였다.

그를 부른 자는 밤하늘을 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주변의 캄캄한 어둠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또 다른 어두움이 바로 그의 몸이었다. 옷자락이 펄럭이듯 어둠이 일렁이고, 알알이 박힌 것 같은 빛무리들이 흔들렸다.

얼마나 광활한지 알 수 없을 정도인 몸을 지나서 어딘가 있을 그의 얼굴을 찾아 홀린 듯 올려다보았을 때, 아그니스 체스퍼는 곧바로 두려움에 눈을 감았다.

불길하게 불타오르는 암흑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단 한 순간, 눈을 피하기 전에 한 순간 본 것만으로 그것이 '가면'임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그저 '군주'라고만 확신했던 이 자가 누구인지를.

"쿠엘단 전하! 어찌하여 소관을 시험하십니까!"

목청껏 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그의 온 힘을 다한 외침은 갓난아이의 옹알이보다도 미비할 뿐이었다.

[내가 너를 절망에서 건져주지. 그 대신, 너는 내 바람을 이루어줘야겠다.]

"제게 바라는 일이 있으시다면 그저 명령하셨어도 될 일입니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네가 원해야만 비로소 완전해진다.]

어둠이 내려왔다. 찬란한 빛들과, 심령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동시에 그를 비췄다.

[네게 힘을 주겠다. 그 힘으로 네 운명을 가르고, 바라는 바를 이루어라.]

아그니스 체스퍼는 깨달았다.

이것이 제안이든 명령이든, 결코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

이제는 말 한 마디 꺼낼 수 없었다. 눈조차 뜰 수 없어 힘겹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마음속으로 답을 하고, 몸짓으로 그것을 표현한 순간. 그를 괴롭게 하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억눌린 숨을 토하고, 손으로 흙바닥을 긁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괴인, 군주 쿠엘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더기 같은 로브를 눌러쓴 채로.

[달이 두 번 차고 비기 전까지 야만인들의 수도로 가라. 그곳의 가장 깊은 곳. 짐승의 형틀에 이 육신의 잔재를 뿌려라.]

그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두터운 로브를 뚫고나온 빛은 곧 사그라졌고,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군주의 몸은 무너져 내렸다.

"……."

아그니스 체스퍼는 힘겹게 움직여 앞으로 갔지만, 널브러진 로브 안에 있는 것은 모래처럼 보이는 수북한 가루뿐이었다.

누더기 같은 로브와 그 안에 찬 가루. 그 둘만이, 조금 전까지 이곳에 두려운 존재가 자리했었음을 증명했다.

*

강행군이라는 말도 이 혹독함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무려 두 번의 회전(會戰)을 치렀지만 한 번의 제대로 된(성벽 안쪽에서의) 휴식도 없이 또 다시 길을 나섰다. 전투 직후 잠깐 휴식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병사들의 몰골은 하나같이 비렁뱅이와 다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군을 이끄는 프롱기우스 백작은 융통성 있게 군을 운용했다. 그는 군을 세 개로 나누어 움직였는데, 좌우와 선두를 살피는 두 개의 부대 덕분에 늦춰가는 한 부대는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당분간은 규모가 큰 적과 맞닥뜨릴 일이 없을 거라는 예상에서 행한 운용이었다.

그들은 닷새 동안 여섯 개의 마을을 휩쓸었다. 젊은 사내들은 다 빠져나가고 움직이기 힘든 자들만이 남은 곳들이었다.

전쟁에서 으레 있을 법한, 유쾌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바닥에 거의 붙어가던 군대의 사기는 올라갔다. 그리 쉬지 못했음에도 얼굴에 혈색들이 돌았다.

언제 적들과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머물다가, 거칠게 짓밟는 포식자가 된 기분을 느끼니 마음이 놓인 것일까. 참으로 얄팍하고 보잘 것 없는 마음이다.

하지만, 본래 전쟁과 사람이라는 것이 다 이런 것 아니겠는가.

막사 밖에 나와 바람이나 쐬며 걷고 있는데, 막시밀리언이 친위병들과 함께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영주님."

"아. 군터. 나와 있었군.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소관을 말씀이십니까?"

"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지. 아무튼 마침 잘 됐어. 함께 가세."

군터는 막시밀리언과 함께 그의 막사로 향했다. 그로부터 잠시 후에 미트라스가 천막을 걷으며 들어섰고, 그제야 막시밀리언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군단장의 부름을 받아 다녀온 참이네. 앞질러 가던 병사들이 포로를 몇 잡아서, 그들로부터 정보를 캐낸 모양이야."

"그렇습니까. 무슨 특별한 소식이라도 들은 모양이지요?"

미트라스의 물음에 막시밀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특별한 소식이지. 타라냐드의 제국군이 쳐들어왔다고 하네."

"옛? 설마……."

미트라스의 언성이 슬쩍 높아졌다. 제국군이 이 전쟁에 참전한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것은 또 없다. 머리를 잃고 혼란에 빠졌다지만, 그래도 제국은 제국이다. 한때 제국군이었던 미트라스는 제국이 얼마나 거대하며 강대한지를 잘 알았다.

"자네가 걱정하는 것 같은 일은 아니네."

"그렇다면……."

"아그니스 체스퍼."

그 이름을 들었을 때, 군터의 눈매가 작게 꿈틀거렸다. 막시밀리언은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얇은 천에 가린 머리 위를 올려 보았다. 입 꼬리에 걸린 작은 웃음과 함께였다.

"그가 수천 병사를 이끌고 타칸의 서부를 휩쓸고 있는 모양이야. 벌써 그 자의 군대가 밀어버린 도시만 두 개에, 촌락은 수십이 넘는다더군. 벌써부터 별명까지 얻었다는 모양이야. '검은 재앙'이라던가."

검은 재앙이라. 제법 화려한 별명이다.

'어째서 지금이지.'

언제고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었다. 그와 함께 했던 때, 부하들을 잃어가며 그가 토했던 분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돌아온다고 해도, 어째서 지금인가. 제국을 등에 업은 것도 아니고, 고작 수천 병사라면 이전의 전쟁에서 그가 끌고 갔던 패잔병들과 비슷한 규모에 불과하다. 그 작은 군세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미트라스가 말했다. 국경을 넘은 제국의 군세가 수천뿐이라는 이야기에 그는 다시 평정을 찾은 상태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군단장은 그를 최대한 이용하고 싶은 모양이던데."

"이용한다면……?"

"그는 현재 타칸 연합과 싸우고 있네. 지금처럼 우리가 할 싸움을 그가 대신 해준다면, 우리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안 그런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마음처럼 되겠습니까?"

"그건 군단장이 고민할 문제야. 아무튼 재미있게 됐어.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들었지 뭔가. 아그니스 체스퍼라니.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쩐지 그리운 느낌마저 드는군."

그의 말에 군터는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정말이다.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예전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힘겨운 전장에서, 사나운 적에 맞서 함께 싸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

*

타르가이 베르겐은 큼직한 나무 한 그루에 기대어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 팔은 세운 무릎 위에 두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을 기울인 채.

그의 고요는 쉬이 지지 않았다. 그의 의식은 깊이 가라앉아 스스로 잠들었다.

스스로 취한 잠깐의 평온이었다. 누구도 감히 그 평온을 흔들지 못했다. 잠시 후 그가 스스로 눈을 뜨고서야 비로소 콰이렌이 다가왔다.

[날이 좋구나.]

"예?"

그는 말로 하는 답 대신,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아름답다는 말 밖에 어울리지 않는 맑은 하늘과 그 아래에 점점이 흘러가는 구름 무리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초원 말이다. 초원. 고향이 달리 있느냐. 바람의 여인들이 가득한 우리의 땅. 그곳이 우리의 고향이지 않더냐.]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방향대로 풀들은 눕는다. 그들의 믿음으로 바람은 사내이며, 따라서 그런 바람을 맞이하는 초원의 들풀들은 바람의 여인인 것이다.

알고 있지만, 콰이렌은 왜 갑자기 그가 고향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그의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지는 꽤 오래 되었다.

[이렇구나. 나오니 돌아가고 싶어졌는데, 나는 어째서 떠나왔을까.]

"대족장……."

콰이렌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르가이 베르겐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잔뜩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더 활발해진 바람을 만끽하는 듯했다.

그러던 한 순간.

[음?]

평온하기 그지없던 그의 얼굴에 서늘함이 떠올랐다.

[웬 놈이냐.]

평온이 깨어지고, 잠들었던 사나움이 이를 드러냈다.

자줏빛 눈이 그들이 지나온 서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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