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불구덩이 속에서 빠져나온 적들이 있었다. 수백 정도.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모두 바르바피였다.
당연히 멀쩡한 몰골은 아니었다. 삐죽하게 솟아야 할 털들은 모두 타 없어졌고, 갑옷처럼 튼튼한 갑각은 녹아서 흉하게 눌러 붙었다.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셨는지, 아니면 불길 속에서 목구멍이 녹아내렸는지, 그들은 예의 흉포한 포효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화염을 뚫고 나온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수한 화살과, 날카롭게 뻗은 창칼이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나간 바르바피들은 승리를 확정하는 증표와도 같았다.
그렇게 전투는 끝났다.
베이고르군은 당장의 전후 수습은 포기했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피로는 둘째 치고, 화염의 잔향이 숨 쉬기도 힘들 만큼 매캐하게 코와 목구멍을 쓸었기 때문이다. 트이지 않는 숨을 쉬기 위해 억지로 기침을 하는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으…아아……."
내뻗는 손을 잡아주었다. 흐릿한 눈이 빛을 쫓았을 때, 맞잡은 손은 힘을 잃었다.
군터는 또 다른 손으로 병사의 눈을 감겨주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은 눈에 익은 그의 수하였다.
네리스 남작이 다가왔다. 전투가 끝나고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는 여전히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억지로 거동하고 있다는 것이 걸음걸이에서부터 보였다.
"어려운 전장을 여럿 겪었다 들었네."
"……."
"자네는 익숙한가? 부하들을 떠나보내는 것 말이네."
"모르겠군요. 익숙해졌다기보다는…지쳤다, 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지쳤다?"
그래. 지쳤다. 전장의 열기는 늘 영육을 고조시키지만, 끝난 후에 맴도는 씁쓸함은 잔열마저도 다 빼앗아가 버린다. 그 상실감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다. 그렇기에 늘 괴롭고, 쌓이고 쌓인 괴로움은 괴로워할 기력마저 갉아먹는다.
"섬뜩한 말이군."
'섬뜩하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군.'
네리스 남작에게 말했듯, 그저 지쳤을 뿐이다. 다시 전쟁이, 전투가 벌어진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향하겠지. 대체 뭘 위해서?
처음에 바랐던 건, 찾으며 얻고자 했던 것은 출세였다. 그런데 지금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뭘 위해서 이 험한 곳에 머무르며 아등바등하고 있는 걸까.
혹시나 다른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떠올려 보려 해도,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잡히지 않는 허공에 헛손질을 반복하듯 하다가, 문득 위글로우에 있을 아내와 아들, 딸이 생각났다.
정말 우습게도, 뜬금없이 가족들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터는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몸이 어지간히 피로에 찌든 모양이었다.
*
막사 안에는 단 둘만이 있었다. 2군단장 칸디시아렌 공작과 4군단장 프롱기우스 백작. 그들은 이미 승전의 기쁨에서 빠져나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을 무겁게 유지했다.
"수도로 진격하시지요."
"……."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던 일이다. 본국에서 출정하기 전부터, 이 전쟁의 대전략은 명확했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그 처음의 계획을 그대로 이행하기를 권했으나, 아무래도 칸디시아렌 공작은 그와는 생각이 다른 듯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상황은 늘 변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마음에 걸리십니까? 각하께서는, 국왕 전하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내 어깨에는 얹힌 것이 많아. 게다가 전하께서는 야심이 큰 분이니까 말이네."
타칸 연합의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이 3군단을 패퇴시키고 국경을 넘어 들어갔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설마 그런 식으로 움직일 줄은 몰랐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만 놓고 앞으로의 일들을 추측해보면 어느 정도는 예상가는 것들이 있었다.
"왕도로 향하겠지. 실상 우리가 세운 대전략은 적들이 쓰기에 더 용이한 것이야."
기동력 하나만큼은 세상에 따를 군대가 없을 것이다. 가로막던 3군단까지 박살을 냈으니 거리낄 것이 무에 있겠는가. 이전의 전쟁에서도 그랬듯, 약탈로 보급을 충당하며 길을 달린다면 순식간에 왕도를 목전에 둘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큰일이지만, 그래도 마음을 넉넉하게 잡는다면 거기까지는 괜찮다. 제아무리 대족장이 이끄는 대군이라 해도 왕도의 성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진짜 문제는, 그들이 왕도까지 지나는 경로에 있다.
'얄궂은 일이 아닌가.'
타칸 연합의 군대가 지나게 될 길 주변으로는 당연하지만 영지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영지들의 대다수는 그를 따르는 '귀족파' 영주들의 것이었다.
타칸 연합의 대족장이 얌전히 앞만 보고 말을 달려 베나시드로 직행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순진한 기대다.
또한, 대승을 거둔 국왕이 본국을 휩쓸고 있는 적군을 상대하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회군해주기를 바라는 것도…역시 너무 순진한 기대일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솔직히 그렇습니다. 적을 앞에 두고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득실을 따지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뢰라는 것은 이로움에 기반 한 것이 아닌가. 눈앞의 적을 꺾는 것보다 더 큰 이로움이 있다면 그 쪽을 취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애당초 군신의 관계라는 것이 무엇인가.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하고, 군주는 충성하는 신하에게 보답을 한다. 이는 결국 주고받는 관계라는 것이고, 이득으로 얽힌 관계라는 뜻이다.
망국의 왕족을 보필하여 새로이 나라를 일군 공신이라 해도 결국은 다르지 않다.
그런 건조한 관계이니만큼, 서로 내어줄 것은 내어주고 취할 것은 취하며 어우러지면 좋으련만…안타깝게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권력이라는 놈 때문이다.
이 권력이라는 놈은 나누어지면 반드시 합쳐져야 하는 성질이 있어서, 권력을 나눠가진 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조각을 긁어모으려고 혈안이 되게 되어 있다.
설혹 그렇지 않다 해도 결국은 투쟁에 끼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아닌 다른 자들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한, 똑같이 나누어 가진 자들과의 투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그 이치에 따라, 왕은 더 큰 권력을 꿈꾼다. 신하 역시 마찬가지. 신하로서 왕에게 충성한다고는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 뿐, 실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적절한 기회만 생긴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서로를 물어뜯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적절한 기회는,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국왕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해서…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빈약하기는 해도, 어쨌든 명분은 있지 않은가?"
"말씀하신대로, 빈약합니다. 추궁을 당할 것이 뻔합니다."
"힘을 가진 채 추궁을 당하는 것이 힘을 잃고 추궁당하지 않는 것보다 낫네."
"……."
명분은 세우기 나름이다. 일찍이 아샤즈 테오모렌이 잘려나갔을 때처럼 말이다.
아샤즈 테오모렌이 당한 것은 이해관계가 그리 얽혔기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는 실질적인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 개의 권력집단 중에 가장 만만한 것이 아샤즈 테오모렌의 일파였기에 숙청의 칼날을 맞은 것이다.
"좋습니다. 허면, 어찌 나누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래도 내가 가야하지 않겠는가."
프롱기우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여러모로 따져보았을 때 칸디시아렌 공작이 직접 움직이는 편이 좋다. 일의 수습을 위해서든, 그 후의 '추궁'을 무마하기 위해서든.
"제 할 일은 끝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자네가 나와 함께하는 것을 내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는지 모를 걸세."
프롱기우스 백작의 나직한 한숨에 칸디시아렌 공작은 선한 웃음으로 답했다.
"반절 떼어주겠네."
"반입니까. 무리하시는 것이 아닌지."
"자네가 크게 도움을 준 덕에 생각보다 피해가 적었어. 허니 그 정도는 괜찮네."
"그러시다면야 감사히."
"무거운 짐을 맡기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무거운 짐을 맡겼다.
칸디시아렌 공작이 최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절로 나눈 군대가 어느 정도 활약을 해줘야 한다. 그래야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친 채 자기 잇속만 챙기려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줄곧 그랬듯, 표정 없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장군. 끝났습니다."
"수고했다."
무뚝뚝한 목소리. 어쩐지 멍해 보이는 얼굴에 무관은 군례를 올리고 물러나면서도 생각했다.
장군은 기쁘지 않은 것일까? 자그마한 승리이기 때문에?
'아니. 그러고 보면 이전에도.'
오늘이야 작은 승리라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이틀 전에 맞닥뜨렸던 적은 꽤 수가 됐었다.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 끝내 몰살시켰을 때도 그는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벌써 세 번의 승리를 거뒀으나, 그가 승리의 기쁨을 비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요 며칠 간의 기억을 더듬던 무관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 주제에 어찌 장군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필시 무언가 고민이 있으신 거겠지.'
그런 무관의 기대와는 달리, 아그니스 체스퍼는 사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저 감상에 젖어있을 뿐이었다.
'아직까지는 운이 따라주는군.'
그는 시작의 선에서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전쟁은 엄밀히 따지면 제국의 전쟁이 아니다. 반군 놈들과 야만인 놈들의 전쟁이다. 그러니 그와 그의 병사들은 남의 전쟁에 난입한 불청객인 셈이다.
남의 잔치에 들어선 불청객이 무얼 할 수 있을까. 기껏해야 훼방이나 놓다가 쫓겨나는 것이 기대할 수 있는 전부. 하지만 이 잔치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판인만큼, 멀쩡히 쫓겨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무의미한 개죽음은 아니다.'
복수는 주가 아니다. 주된 목적은 어디까지나 웅크리고 있는 제국에게 내지르는 대찬 고함 한 번.
'승천하신 황제폐하께서 얼마나 한심하게 내려 보고 계시겠는가.'
닿지도 않는 정쟁의 바람에 지레 겁먹고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도 등한시 한 채 제 한 몸 보전하기 급급한 자들. 그들에게 한바탕 외치기 위함이다.
'그것이야말로 패장의 목으로 따낼 수 있는 가장 큰 판돈이 아니겠는가.'
본래대로라면 대군을 이끌고 패전을 한 즉시 패전의 문책이 날아와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은 그만큼 제국 중앙 조정이 혼란스럽다는 뜻이다. 당연한 일처리 하나 바로 하지 못할 만큼.
말하자면 유예다. 그러나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없이 치욕스러웠다. 죄인으로서 흑포를 걸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견디기 힘들 만큼 부끄러웠다.
'어느새 밤이군.'
조금 전 하늘을 봤을 때 노을이 져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금 바라보니 어느새 어둑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막사로 돌아가 앞으로의 계획을 한 번 더 검토해볼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어째서 이곳에 있지?]
섬뜩함에 몸이 굳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허리춤을 검을 뽑아들었다.
"누구냐."
[흑포. 아란딜 페레모어인가? 아니, 아니지. 녀석은 죽었다고 했다. 그래…네 녀석은 아그니스 체스퍼로구나. 너는 어째서 이곳에 있느냐? 죽을 곳을 찾아 헤매는가?]
"……."
절로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희미하게 내리는 달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가리는 추레한 로브는 떠돌이의 그것과 같았으나, 그에게서 풍겨오는 기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길했다.
"…군주이십니까."
[알아보았다면 답해라. 너는 죽을 곳을 찾고 있느냐?]
아그니스 체스퍼는 검을 놓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