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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73화 (273/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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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불길은 한곳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오나 싶더니 다른 쪽에서도, 또 다른 쪽에서도 연달아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대체…….’

마치 이 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을 다 불태워버리겠다는 듯, 동시다발적으로 불길이 피어올랐다.

‘어디로 가야 하지?’

길이 보이질 않았다. 길인가 싶은 곳에는 어김없이 적들이 밀집해 있어 돌파하기가 어려워 보였고, 그렇다고 순식간에 덩치를 키워가는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순식간에 붉은 색으로 젖어가는 시야에 순간적으로 암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하! 어찌 하오리까!”

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까지는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대로 착실하게 싸웠다. 이제부터는 ‘윗분’들이 짜놓은 그림이 부디 틀리지 않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기대를 건 네리스 남작조차 이런 상황을 예견치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일단…본군에 합류하세!”

군단장쯤 되면 적어도 불에 타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급박한 상황이니 만큼 뭉쳐서 움직이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일까.

무엇이었든 간에, 당장 할 일은 정해졌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본군에 합류하려고 해도 본군이 위치한 곳까지 가는 길이 녹록치 않아 보였다. 까마득한 곳에서 펄럭이는 깃발로 알 수 있는 거리도 거리거니와, 그 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적병들도 문제였다.

“…어렵겠습니다.”

군터는 답답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네리스 남작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침음만 흘렸다.

하늘을 나는 재주라도 있지 않은 이상 득시글거리는 적을 뚫고 본군에 합류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아니, 설령 정말 날개라도 달려 있어서 하늘을 날 수 있다 해도 땅에서 올라오는 화살 세례에 무사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따로 길을 찾아야겠군.”

중얼거리는 말이 탄식처럼 들리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네리스 남작은 무력하게 처지지 않았다.

“불은 사방에서 일어났어. 이대로라면 본군은 물론, 2군단 역시 무사하지 못해. 필시 어떤 움직임이 있을 것이니, 우선은 적에게서 멀어져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지.”

옳은 말이다. 다 같이 타죽자는 생각이 아닌 이상에야 무언가 불길을 피할 방도를 쥐고 있을 것이다.

*

앞뒤로 베이고르의 2군단과 4군단이 협공을 가하고, 타칸연합군은 그 가운데에 낀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전장이 된 평야 외곽에서부터 불길이 치솟았고, 그 불길은 매듭을 당기는 밧줄처럼 전장을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이대로는 다 타죽는다! 이 미친놈들이!”

타칸 연합군이 움직임을 보였다. 전투의 흥분에 매몰되어있던 그들도 노을이 지는 것처럼 붉어지는 시계(視界)를 무시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타칸 연합의 지휘관은 당혹했다. 그래도 그는 부족을 이끄는 부족장으로서, 그리고 대군을 이끄는 사령관으로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앞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어떻게 하지? 지금 군을 물리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그런 자문에는 비관적인 답이 떠올랐다.

너무 늦었다. 이미 불길은 뚫고 지나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조차 들지 않을 만큼 크고 거세게 번졌다. 저길 뚫고 가려면 병력의 태반은 죽어나가지 않을까 싶었다.

‘설마하니 다 같이 타죽자고 불을 질렀겠는가.’

그는 사나운 눈을 하고서 베이고르군의 동태를 살폈다. 개전 초기부터 이제까지 물러섬 없이 덤벼들던 놈들이 공세의 수위를 늦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렴풋이 보이는 적의 후군(後軍)은 슬그머니 뒤로 빠지는 모양새를 취했다.

‘우리를 불구덩이에 고립시키고 빠져나가겠다는 건가?’

할 수만 있다면 최고다. 피 흘려 싸울 필요 없이 적을 몰살시킬 수 있으니.

어림없는 망상이라며 비웃어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망상이 현실성과 설득력을 갖는다. 지금도 열심히, 그들의 뒤꽁무니를 파먹고 있는 또 다른 적의 존재 때문에.

‘정면의 놈들은 빠져나간다고 해도, 뒤쪽의 쥐새끼들은 그러지 못해. 설마 희생양으로 던지는 건가?’

뒤쪽의 적은 고작 수천이다. 물론 수천이 고작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작은 수는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평소와는 달리 극단적인 생각이 별 위화감 없이 들었다.

‘뒤쪽의 적으로 하여금 우리의 발을 붙들고, 본군은 빠져나간다. 그렇다면 생로는 적 본군의 배후.’

비약이 아니다. 실제로 적 본군의 뒤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가장 옅었다. 어쩌면 저 연기는 위장이 아닐까?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얕은꾀에 당할 줄 알았느냐! 전군 들어라! 적을 돌파한다!”

그는 확신했고, 그 확신대로 군을 움직였다. 양쪽의 적을 맞아 싸우던 병력을 결집시켰고, 직접 선두에서 군을 지휘하여 돌격을 시작했다.

“단숨에 뚫어버린다!”

그는 두 자루 월도를 휘두르며 막아서는 베이고르군을 베어나갔다. 뒤따르는 용맹한 전사들이 옆에서 그를 보조하니 한 번 달리기 시작한 군대는 멈출 줄을 몰랐다.

“막아라! 막아!”

베이고르의 장교들이 악다구니를 써보지만, 점점 다가오는 불길과 연기 때문인지 병사들은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적과 부딪치기도 전에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타칸 연합군은 순조롭게 베이고르군을 돌파해나갈 수 있었다. 앞만 보고 내달리는 탓에 뒤쪽에서 물고 늘어지는 적에게 피해를 입었지만, 끝내 그들은 목표한 대로 적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허억…허억…….”

타칸 연합의 사령관은 피로 목욕을 한 것 같은 몰골을 하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앞장서서 길을 연 그의 몸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허나 그의 눈에는 피로감보다는 기쁨이 가득했다.

“좋아. 해냈다! 이제 이대로…….”

득의양양하게 소리 한 번 쳐보려던 순간이었다.

자그마한 연기가 피어오르던 몇몇 곳에서, 마치 폭풍이 붉은색을 머금으면 그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

그는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선조들이여. 우리의 뿌리여.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담담한 울림이 수면 위에 이는 파문처럼 퍼져나간다.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소리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이루며 뜻을 전달했다.

[우리는 우리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머문 날, 머물 날들. 그대들은 이 땅의 주인이며, 그대들은 우리를 수호합니다. 우리와 어우러집니다. 우리와 공존합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내는 그는 들리지 않는 대답을 들었다. 펴고 있던 허리가 기울고, 시선은 땅에 닿았다.

[우리는 다시금 이 땅에 나왔으니, 우리는 다시 주인으로서 거닐 것입니다. 잠시 묻어두었던 공존의 맹약 역시 왕의 이름으로 다시금 이루어지리니.]

그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양 팔을 벌려 하늘을 끌어안았다.

[선조들이여. 지금, 우리에게 대적하는 자들을 그대들의 살과 피로써 섬멸해주십시오.]

그가 종언을 고한 순간. 너른 평야의 곳곳에서 불의 기둥이, 폭풍이 솟아올랐다.

*

타칸연합군은 2군단을 돌파했다.

하지만 사실, 돌파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 달린 길은 그들이 자력으로 뚫어낸 것이 아니라 칸디시아렌 공작이 일부러 열어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좋아. 추격을 느슨하게. 거리를 벌린다.”

적은 한데 뭉쳐 빠져나갔다. 덕분에 물러서는 데 장애는 없었다. 2군단은 손쉽게 4군단과 합류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약속된 불길이 일었다.

“무시무시하군요.”

“프롱기우스 백작. 수고가 많았네.”

“각하께서 짜신 판에서 명받은 대로 움직이기만 했을 뿐입니다. 물론 아슬아슬했던 순간이 있기는 했었습니다만.”

“위험 없는 전장이 어디 있겠나. 다만 그대의 노고는 내 모르지 않아. 잊지 않을 걸세.”

톡톡한 보상을 약속하는 말에 프롱기우스 백작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먼 곳을 둘러보았다.

“신기하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평야를 전부 다 태울 것 같았던 불들이 이렇게나 순식간에.”

“나도 신기하다네. 말은 들었어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니까.”

“아무리 피를 이어받았다고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이만한 이적(異蹟)을 일으킬 수 없었을 터. 무엇을 바치셨습니까?”

칸디시아렌 공작이 픽 웃었다.

“말해야 하나?”

“아니요. 단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답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허면 답하지 않겠네.”

“예. 뜻대로.”

프롱기우스 백작은 아쉬움 한 점 없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승전을 감축 드립니다.”

“아직은 이르지 않은가.”

“저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손에서 칼을 놓고 깔끔하게 목을 내밀겠습니다.”

생로라 생각하여 달렸던 것은 이제 죽음의 문턱이 되었다. 그들은 이미 그곳에 발을 디뎠고, 빠져나올 문은 닫혔다.

불의 축제이며 죽음의 축제다. 이 평야의 모든 화기를 빨아들인 것만 같은 하나의 불은 그 안에 가둔 모든 것들을 뒤덮었다. 비명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하늘을 검게 물들인 불은 점점 더 기세를 키워갔다.

*

목숨이 칼날 끝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결연히 각오를 다졌다. 자꾸 몸을 굳히는 긴장을 계속해서 풀어내면서 어쩌면 닥쳐올 수도 있는 마지막 일전을 기다렸다.

그래서 더욱 허무하고, 믿기지 않았다. 천지사방을 채우는 것 같았던 불길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그라지는가 싶더니, 2군단을 돌파하고 빠져나간 적들이 불길에 휩싸여 허망하게 무너져갔다.

이겼다, 그리고 살았다, 하는 생각은 드는데 기쁘지가 않았다. 그만큼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입을 벌리고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불지옥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평범한 불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 당연한 생각을 특별한 것처럼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군터는 평범하지 않은 저 불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저 불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보다 뚜렷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명…허공을 타고 이동했어.’

바보 같은 소리지만, 그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그는 얕게나마 술법을 수련했기 때문에, 세상의 만물이 지닌 기운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그 만물에는 당연히 불 역시 포함이고, 커다란 불길을 이루는 강한 화기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했다.

‘한 순간에 화기가 이동했다. 한데 뭉쳐서, 강하게 일어났지.’

눈으로 볼 수 없어도 흐릿하게 느낄 수는 있었던, 실로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술법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런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 역시 강하게 들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군터는 이런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이런 식으로 승리할 수 있다면, 수만 대병이 필요한 것인가?’

허탈함과 무력감이 들었다.

모두가 안도하고 기뻐하는 와중에도, 군터는 홀로 다른 생각에 잠겨 웃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3월의 시작이네요.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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