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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72화 (272/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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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적들의 주의를 끄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못해도 수백은 되어 보이는 적병들이 일제히 반전하고, 그 배는 되어 보이는 수가 곧바로 뒤따랐다.

네리스 남작은 제법 훌륭하게 길을 잡았다.

그는 영리하게 거리를 조절했다. 적들의 눈길을 최대한 붙들면서도 최대한 충돌을 피하게끔 병력을 이끄는 솜씨는 옆을 지키는 군터조차 감탄이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용병술이 대단하다기보다는, 뭐랄까. 침착함이 돋보인다고 해야 할까. 쏟아지는 화살을 막고 쳐내면서도 냉정하게 적의 움직임을 살피고, 적의 반응이 느슨해진다 싶으면 과감하게 거리를 좁혀 다시 적의 주의를 끈다. 그 과정에서 어깨에 화살 한 대를 맞기까지 했건만, 그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다시 간다!”

적을 돌파하기만을 세 번. 외치는 목소리가 쉬어갈 즈음, 드디어 적들이 본군의 움직임을 눈치 채고 동요를 보였다.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눈에 띌 만큼 동요하는 적의 모습이 그 증거다. 소기의 임무는 성공이라고 봐도 좋을 듯했다.

“빠져나가지!”

“이대로 빠집니까? 기세를 탔습니다만.”

네리스 남작의 지시에 군터가 의문을 제기했다. 본군이 지근거리까지 좁혀오고 있고, 그에 따라 적군은 당황하고 있다. 좋은 흐름인데 여기서 빠진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흐름은 좋으나 우리 역시 지쳤네. 일단 빠져서 재정비해야 해!”

“각하의 뜻대로.”

네리스 남작이 이끄는 기병대는 전장을 이탈했다. 본군이 코앞까지 다가와서인지 추격군도 별로 따라붙지 않았다.

“이제 어찌 합니까?”

“지금까지와 별 다를 것은 없네. 준비를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거지.”

2군단이 실시할 화공에 대한 준비를 말하는 것이리라. 지금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 터. 그렇다는 건 모든 준비가 끝날 때까지 적의 발을 묶어야 한다는 뜻.

“보이는가? 적들이 아군을 에워싸려 하고 있어.”

네리스 남작이 전장의 한복판을 가리켰다. 그는 새가 날개를 펴는 것처럼, 조금씩 옆으로 퍼지고 있는 적의 움직임을 지적했다.

“에워싸려 하고 있습니다.”

양쪽에서 협공을 받고 있음에도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 것은 적의 전 병력이 기병이기 때문이다. 기동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데다가, 기사에 능한 만큼 직접적으로 맞붙어 싸울 필요가 없기에.

“그래서는 곤란하지.”

나서서 훼방을 놓겠다는 것이다.

“가능하겠습니까.”

가뜩이나 작은 기병대의 전력은 이제껏 적의 시선을 붙드느라 일부 소모 되었다. 대군인 적의 움직임을 막기에는 부족하다.

“작은 칼이라도 급소를 노린다면 충분히 적을 누를 수 있지.”

“급소는 어디입니까?”

“저곳. 움직임이 이뤄지는 중심축이지.”

가리키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네리스 남작의 말대로,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오직 그곳만이 정적임을 알 수 있었다. 흔들림이 없다는 건 무겁다는 뜻이고, 바쁘게 움직이는 전장에 그런 무게감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상당하군.’

무인으로서는 모르겠지만, 지휘관으로서는 정말로 훌륭한 사내다. 군터는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꺾었다. 조금 굳었던 몸이 우득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풀렸다.

네리스 남작이 씩 웃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세.”

*

막시밀리언은 자신이 프롱기우스 백작에게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얼마 남지 않은 군대에서 천 명이나 되는 병력을 떠맡지는 않았겠지.

솔직히 말하면, 그는 군단장의 이런 신뢰나 기대 같은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보통 때였다면 전공을 세울 기회가 더 커진 것이니 기꺼워했겠지만, 지금은 영 껄끄러운 상관의 밑에 있는 상황이니 만큼 조금은 몸을 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이리 되어버린 것을.

“막아라! 밀어붙여!”

“하지만 남작! 적의 공세가 너무 매섭소이다!”

“모르겠소이까? 놈들이 우리를 둘러싸려 하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거칠게 나오는 것이외다! 여기서 물러서면 적의 뜻대로 끌려가는 것이오.”

약한 소리를 하는 동료 영주를 다그치면서, 막시밀리언은 냉정하게 전황을 살폈다.

‘어렵군. 둘러싸이는 건 당연히 안 되고, 또 그렇다고 너무 떨어져도 안 되니.’

결국 이 전투의 향방은 화공이 제대로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 만약 계획이 실패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2군단과 4군단이 뿔뿔이 패퇴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화공이 성공을 거둔다면 그때는…….

‘군단장은 냉혹한 자다. 불확실을 감수하면서까지 흩어진 병력을 보존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가 결과를 위해 잔혹한 수를 쓰는 것을 이미 두 차례씩이나 보지 않았던가. 그의 눈에 휘하 병력은 승리를 위한 ‘패’일 뿐이고, 그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손에 쥔 패를 모조리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런 지휘관의 밑에서 생존을 도모하려면 방법은 오직 하나, 패를 쥔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뿐.

“버텨라!”

때문에 막시밀리언은 적에게 응전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위태로운 형세에 변화를 주는 것보다는 상황을 유지하면서 버티는 쪽을 택한 것이다.

‘불길이 일면 전황은 자연히 바뀐다. 그 전까지는 무리 할 필요가 없지.’

지지부진한 전투가 이어지면서 양측의 병사들은 착실히 죽어나갔다. 시간 역시 착실히 흘러갔다.

그러나 그렇게 힘겹게 유지되던 균형은 한 순간에 깨어질듯 흔들렸다.

크허엉!

바르바피들의 난입이었다. 날아오는 화살들과 간간이 들어오는 기병돌진에 대응하기만 하던 베이고르군은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바르바피들에 의해 밀리기 시작했다. 밀집대형으로 좁혀 방어를 두텁게 했지만 소용없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살들과, 우악스러운 힘을 행사하는 바르바피들의 돌진은 도무지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지금이다.”

더 이상 밀렸다가는 아예 진형이 와해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 프롱기우스 백작이 그의 곁에 머물던 특별한 조력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뒤로 쭉 밀려난 베이고르군을 쫓던 바르바피 무리들 사이로 수십의 병사들이 돌격해 들어갔다. 피 냄새를 맡은 맹수들 마냥, 바르바피들이 눈을 번뜩이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쉬이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았던, 그저 맛 좋은 먹이로만 보였던 것은 사실 지독한 독이었다. 가까이 다가간 순간 잔뜩 뭉쳐있던 독은 사방으로 비산했고, 본능에 잠식당한 전사들을 무자비하게 휩쓸었다.

크아아아악-!

수백의 바르바피들이 일순간 무력화 됐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 대열을 물려라! 오십 보 후퇴!”

섬뜩한 광경이 병사들의 정신을 일깨운 탓일까, 그의 갑작스런 지휘에도 베이고르군은 기민하게 반응하여 움직였다. 방진을 굳힌 채 잠시 주춤한 적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적을 쫓으려던 타칸 연합군의 전사들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방금 전 수십 병사가 폭사(爆死)했던 곳 주변을 지나던 이들이었다. 일반 전사들보다 느리게, 바르바피들도 입에서 피를 쏟았다.

“효과가 엄청나군요.”

한 영주가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에 프롱기우스 백작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오래 가지 못해. 곧 걷힐 거다. 전열을 정비하라.”

고작 수십으로 바르바피 수십을 죽이고, 수백을 가로막았으니 큰 이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수십의 병사들을 만들기 위해 들였던 공을 생각하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는 뒤가 없으니.’

흐름을 바꾸는 건 이쪽이 아니라 2군단 쪽이다. 선택권 없이 ‘말’이 되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지만, 이 또한 할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항상 원하는 위치, 원하는 장소에서 전투를 치를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나저나…역시 꽤 걸리는군.’

과감하게 움직였다면 지금쯤 불길이 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길은커녕, 자그마한 연기 하나 피어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과감은커녕, 굉장히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만하지.’

유그 칸디시아렌은 신중한 사내다. 확신이 없다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자인데, 역시나 그의 처신은 정계에서나 전장에서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덕분에 이쪽은 더 고달파지겠지만, 그래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감수할 만하다.

조금씩 고개를 들려는 초조함을 내리누르면서 다가오는 적을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와아아아아!

일단의 기병이 적의 옆구리를 찔렀다. 펄럭이는 베이고르의 깃발이 유난히도 인상적이었다.

‘좋군.’

프롱기우스 백작은 순수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웃었다.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찌르기다. 지금 저 어딘가에 있을 네리스 남작이 그의 앞에 있었다면 크게 칭찬해주었으리라.

“밀집하라! 쐐기대형을 갖춰라!”

“군단장! 어째서?!”

즉각 반문이 튀어나왔다.

적이 넓게 펼쳐져 둘러싸려고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밀집하여 쐐기대형을 갖추라 함은 버티기가 아니라 적을 뚫고 들어가겠다는 뜻이며,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다는 의미다. 당초의 대전략은 불길이 일 때가지 버티는 것이었고, 지금까지 그를 토대로 전황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흐름을 뒤집어엎겠다니?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네. 뜻 밖에 기회가 생겼으니 잡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일이지.”

그를 둘러싸다시피 한 지휘관들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프롱기우스 백작은 그들에게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는 명령대로 밀집한 병력을 즉각 돌진 시켰다.

*

히히힝!

내쉬가 울음으로 경고를 보낸다. 하지만 군터는 뒤쪽에서 달려드는 적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콰직!

이빨이 드러난 주둥이 사이로 창대 끝이 틀어박혔다. 목구멍 끝을 찌른 채, 버둥거리는 적을 내동댕이쳤다. 그 사이 날아든 두 대의 화살 중 한 대를 피했고, 한 대는 팔뚝으로 받아냈다.

경황없는 와중에도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군터의 사나운 시선이 화살이 날아온 쪽을 향했다.

콱!

화살이 박힌 팔을 움직여 땅에 박힌 창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냅다 던졌다.

화살처럼 날아간 창은 활을 들고 있던 전사의 머리를 박살냈다. 그를 태우고 있던 말도 함께 균형을 잃으며 넘어졌다.

‘네리스 남작은 어디에 있지?’

교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쉼 없이 날아드는 죽음의 위협들을 피해내다 보니 어느새 그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함의 연속이었다.

“할렌!”

“예엣!”

할렌의 비명과 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는 막 맞붙어 싸우던 적 한 명을 찔러 쓰러뜨리던 차였다.

“네리스 남작님을 찾겠다! 따라라!”

“옛!”

군터는 할렌과 주변의 병사들을 모아 주변을 헤집었다. 다행히 네리스 남작은 멀지 않은 곳에, 목도 잘 붙어 있었다. 다만 눈 먼 칼에 제대로 긁혔는지 갑옷의 왼쪽 흉부가 붉어진 상태로 너덜너덜 거렸다. 안색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빠져나가야 합니다.”

네리스 남작은 수긍했다.

힘든 상황이지만, 빠져나가려고 하면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이 적진으로 내달렸을 때, 본군이 호응하여 움직이면서 적을 뒤흔들어놓았다. 덕분에 아직까지 적은 뭉치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응전해오고 있는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다. 스쳐 지나가는 적의 칼날은 점점 목에 가까워지고 있다. 더 버틴다면 지금 있는 기회마저 상실하고 먼저 누운 자들 옆에 자리하고 말리라.

군터는 허리를 펴고 혼란한 전장 속에서 활로를 탐색했다. 그러나 시선을 멀리 두자마자 눈에 들어온 광경에, 군터는 길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렸다.

“불이다아아아-!”

저 멀리,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검은 연기 아래로 시뻘건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위로 올라갈수록 잘난 인물들이 많이 나와야 정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by0069님, 재쓱군님, 광해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을 보내주신 독자분들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2월도 다 갔네요. 뭐 했다고 이렇게 시간이 금방금방 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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