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2부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고 권력자를 앞에 두고 있지만, 딱히 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였다. 처음 대면했던 이는 파비우스 리에론으로, 그 당시에는 베이고르가 아닌 제국의 귀족이며 장군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그 당시에도 바크렌의 손꼽히는 권력자였다.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라는 파비우스 리에론을 대면할 때도 마음을 졸이지는 않았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군터는 그를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건 아란딜 페레모어 쪽이었다.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최후를 맞이한 제국의 흑포장군 말이다.
“대단하군. 콰이벡 산맥을 넘을 생각을 다 하다니.”
베이고르의 공작, 유그 칸디시아렌은 프롱기우스 백작의 승전보다도 그가 콰이벡 산맥을 넘었다는 것이 더 놀라운 듯했다. 하긴, 직접 두 가지를 다 겪은 군터로서도 전투보다는 콰이벡 산맥을 넘어오는 일이 더 고되다 느낄 정도였다. 산맥의 험준함을 알고 있다면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협공이라. 오는 길에 적의 눈에 띄지는 않았나?”
“최대한 주의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담담한 대답에 칸디시아렌 공작의 시선이 군터를 향했다.
군터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흐릿한 익숙함을 느꼈다.
이 중년인의 분위기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차분하지만 가볍지 않고, 흘려 넘기기에는 마음이 쓰이는. 군터는 이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음을 기억했다.
‘아란딜 페레모어. 그 자와 비슷하군.’
물론 어디까지나 기질이다. 칸디시아렌 공작이 아란딜 페레모어와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분위기가 비슷하다 느낄 뿐.
칸디시아렌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프롱기우스 백작의 서신을 촛불에 가져다 댔다.
“모호하지 않은가. 오는 길에 적에게 들켰다면 협공은 위험하다.”
“오직 단 한 번. 공작 각하의 군영을 눈앞에 두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문제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그의 시선이 군터를 향했다. 한 순간이지만 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런가.”
“묻지 않으십니까?”
“아니. 됐네. 바쁘게 달려 와주었을 텐데 미안하게 됐군. 곧바로 다시 움직여줘야겠네. 4군단장에게 전하는 서신일세.”
칸디시아렌 공작은 즉석에서 서신 한 장을 쓰고 인장까지 찍었다. 그리고 그것을 휘하 무관에게 건넸고, 그 무관은 그것을 다시 군터에게 건넸다.
“각하. 그럼 소관은 이만.”
“수고 하게. 무운을 기원하지.”
“감사하옵니다.”
군터가 물러가고, 칸디시아렌 공작은 가죽을 덧댄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가벼운 손짓으로 휘하 무관까지 내보낸 그는 넓은 막사에 홀로 남았다.
그는 텅 빈 허공에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대들의 능력이 내 기대 이하인 것인가, 아니면 저 무관이 우수한 것인가.”
[그대의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사내, 평범한 자는 아니다.]
“인물인가. 중요한 전령을 혼자 보낸 것이 이상하다 여겼는데, 그럴만했군.”
[…….]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그러니 인물도 많을 수밖에.”[전투인가?]
“제대로만 된다면. 그대들의 왕께서는?”
[주시하시는 중이다.]
“괜찮은 건가?”[쉽지 않다. 선조들이 두려워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지. 그대들의 능력은.”
[우리가 아니다. 왕이다. 우리는 그저 왕의 존재만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그런가. 대단하군 요정왕께서는.”
조금은 가벼운 목소리가 다 흘러나오자마자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어느 한쪽이 아니라 모든 방향에서 조여오는 것 같은 독특한 압박감이었다. 칸디시아렌 공작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
그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거친 흙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지는 하늘 아래서 그의 시선은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을 꿰뚫었다.
그의 시선은 눈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그의 눈은 길게 내려온 로브의 후드에 가려 있었고, 그 안에서 감겨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작고 연약한 눈이 아닌 그의 정신, 그 자체였다.
그는 눈을 감고도 보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눈을 감는 대신 세상에 있는 무수한 눈들을 빌리는 것이다. 그 능력으로, 그는 지금 앉아서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인형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곳을 보았다.
높게 솟은 첨탑. 길게 늘어선 성벽. 그 안팎을 오가는 사람들.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무사(武士)들.
큰 도시다. 또한 사나운 도시다. 뿐만 아니라, 어렴풋하게나마 특별한 기운들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큰 나무 밑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다. 고개를 들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길게 늘어진 그림자만 보고도 커다란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기울어가던 해가 어느덧 완전히 저물었다.
그는 일어섰다. 그의 의지를 따르는 껍데기는 뻣뻣했다. 남들이 보았다면 기괴하다 하였겠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있어 인형이란 마음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어찌 움직이느냐는 상관 없다.
그는 인형을 움직였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그런 그의 뒤를 스쳐갔다.
*
“수고했다.”
서신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쭉 읽어 내려간 후에야 프롱기우스 백작은 군터에게 물러가도 좋다 허락했다. 군터는 짤막하게 군례를 취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갔을 때, 할렌이 달려와 그를 맞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좀 쉬시지요.”
“괜찮다. 그럴 시간도 없을 것 같고.”
“예?”
“곧 출진명령이 떨어질 것 같다.”
“빠르군요.”
“적이 눈치 채지 못했다면, 눈치 채기 전에 움직여야하지 않겠느냐.”
“괜찮으시겠습니까?”
할렌이 염려하는 것은 당연했다.
혼자 적의 눈을 피해 양 군의 진영을, 사안의 시급함 때문에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오갔던 군터다. 피로가 쌓이지 않을 수 없다.
“문제없다.”
“그거 다행이군.”
군터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몸을 돌리고 동시에 군례를 취했다. 네리스 남작이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도 기병대의 역할이 막중하네. 자네가 내 옆을 지켜줘야 하지 않겠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헌데.”
“음?”
“아군의 역할은 후방교란이 아닙니까?”
당연한 생각이다. 당장 셍겔스 평야에 주둔한 적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장 이쪽보다는 월등한 규모일 것이다. 허를 찌른다고는 해도 대놓고 들어가는 것은 무모하다. 그러니 당연히 주공(主攻)은 칸디시아렌 공작의 2군단이 되고, 4군단이 적의 뒤를 치는 것이 옳다.
허나 네리스 남작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반대일세. 시선을 끄는 것은 저쪽이고, 주공은 우리야.”
“…….”
“아. 그것도 아닌가? 음…그래. 그렇군. 주공은 양쪽 모두라 할 수 있겠어.”
또 다시 영문 모를 소리다. 네리스 남작은 듣는 이도 없건만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화공(火攻)을 쓸 걸세. 적의 기동력을 봉하고 끝장을 보겠다는 뜻이지. 완벽하게 시행하기 위해서는 적의 신경을 빼앗아둘 필요가 있어.”
화공이라. 그러고 보니 때마침 날은 건조하고, 전장이 될 셍겔스 평야는 평야라고는 하지만 풀들이 제법 깔려 있었다. 불을 지피기에는 꽤나 적절한 조건이다.
“2군단이 먼저 움직일 걸세. 그들이 시선을 끌어주면 그때 우리가 적의 후미를 치는 거지. 적이 혼란에 빠지면 2군단도 밀고 들어올 것이고, 그 틈에…….”
그럴듯한 계획이다.
하긴, 모든 계획은 바보가 짠 것이 아닌 이상 다 그럴듯하다. 문제는 그 그럴듯한 계획이 실전에서도 구상한 것처럼 잘 맞아떨어지느냐 하는 것이고, 그 답은 직접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계획을 듣자마자 든 의문이 있었다.
“한 번 솟아오른 불길은 피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방도가 있는 모양이더군.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그렇게 말하니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짐짓 확신에 찬 것 같은 모습을 연기하지만, 목소리 한구석에는 자그마한 불안이 느껴지는 그의 말이 맞기를 바랄 수밖에.
*
군의 이동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언덕의 경사가 엄폐를 해주는 곳에 대기했다. 처음에는 잔뜩 당겨졌다가 대기를 하면서부터 묘하게 느슨해져 있던 분위기는 저 멀리서 요란한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다시금 날카롭게 벼려졌다.
“준비하라.”
프롱기우스 백작이 신호를 보냈다. 그에 네리스 백작이 이끄는 기병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칩니까?”
군터가 물었다. 그러자 네리스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회한다. 아군이 접근할 시간을 벌어줘야 하니까.”
이미 전장의 소리를 어렴풋이나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거리를 좁힌 상황. 여기서 우회를 하다가는 자칫 뒤를 치기도 전에 적에게 발각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네리스 남작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본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고자 했다.
군터 역시 듣고 보니 그의 생각이 옳다 여겨졌다.
그렇게 그들은 빙 둘러 이동했다. 다행스럽게도 적의 탐마는 후방까지 면밀히 살피지는 않는 듯했다. 물론 아직 거리가 상당히 벌어져 있고, 전면에서 2군단이 시선을 잘 끌어주고 있는 덕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쯤이면 되겠군.”
네리스 남작이 칼을 뽑아들었다. 검신이 일반적인 칼보다 더 길고 넓은 마상검(馬上劍). 손의 대부분을 가린 건틀릿 사이로 비치는 붕대가 그를 보다 숙련된 전사처럼 보이게 했다.
이번 전쟁에서 거한 사투를 제법 거쳐서일까. 병사들을 돌아보는 그의 눈길은 거칠면서도 노련했다.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자, 가자! 베이고르의 용사들아!”
기수가 낮게 들고 있던 깃발을 높이 세웠다. 숙였던 고개를 빳빳이 들고, 꺼내든 무기를 고쳐 잡았다.
그들은 언덕을 넘었고, 탁 트인 지형을 달렸다. 저 멀리 등을 보이고 있는 대군이 보였다. 전장의 소리는 그들과, 그들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돌격! 돌겨억!”
히히힝!
선봉이라는 자리에는 희한한 마력이 있다.
등 뒤에 따라오는 병력의 수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앞서 나가는 자는 평소에는 지니지 못했던 힘을 얻는다.
그 힘은 육체적인 것일 수도, 심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여간 분명한 것은, 선봉에서 달려 나가는 자는 열 중 아홉은 평소에는 감히 낼 수도 없었던 우렁찬 고함을 내뱉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허나 그것은 신께서 내려주시는 축복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전투에서 가장 앞장서 달려 나간다는 것은 적의 창칼을 가장 먼저 맞닥뜨린다는 것. 그 두려움, 그 중압감은 어지간한 자는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이겨낸다면, 짓눌렸던 용기는 배 이상으로 커져서 돌아온다. 그리고 때때로, 한 사람을 가득 채우는 것을 넘어 함께 하는 자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
와아아아아아아!
군터는 네리스 남작의 옆에서 그가 뿜어내는 열기를 누구보다 진하게 느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군터 역시 선봉에 선 경험이 두 손으로도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근사하지.’
가장 앞장서서 달리면 그 어느 것도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탁 트인 전방을 볼 수 있다.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세상이 달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두두두!
말발굽이 거칠게 땅을 찍는다.
“슬슬 반응할 겁니다.”
“스치고 지나간다. 깊숙이 들어가면 순식간에 압사당하겠지.”
다시 한 번 느꼈다. 네리스 남작은 훌륭한 군인이다. 이전의 전장에서 그를 구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새삼 다시 느꼈다.
뿌우우우우-!
뿔 나팔이 울렸다. 적의 후미가 돌아선다. 숨 막히는, 그야말로 무수한 적의가 폭풍처럼 몰아친다.
번뜩이는 창칼이 바람을 갈랐다.
쾅!
============================ 작품 후기 ============================
adfvczxvzcx님, 멋쟁이미르님, qlcskflfk님, 구웨에에엑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보내주신 독자분들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올림픽이 끝났네요. 곧바로 패럴릭핌이 이어서 열리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