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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70화 (270/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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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소 장군. 반군 놈들과 야만인 놈들이 알아서 상잔을 벌여주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가 움직여야 하는 거요?”

내용은 타박에 가까운데 목소리는 사정하는 투다. 화려한 차림의 중년인은 제발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듯 표정과 몸짓까지 동원하며 상대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불같은 호통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대체 몇 번이나 더 같은 말을 반복해야 알아듣겠소 성주! 놈들이 상잔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호기인 거요!”“도무지 이해를 못하겠군. 어째서 지금이 호기가 될 수가 있소? 가만히 놔두면 두 놈이 알아서 서로의 살을 깎아먹을 텐데.”

성주라 불린 사내가 한숨을 쉬자 상대, 아그니스 체스퍼가 팔짱을 꼈다. 잔뜩 날이 선 목소리에 무인의 기세가 섞여 흘러나왔다.

“내가 모를 것 같소 성주? 무식한 무부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것마저 못 보는 장님은 아니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두 놈 중 한 놈이 끝내 피투성이가 되어 남는다고 해도, 어차피 3주는 움직일 생각이 없지 않소이까.”

“…….”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황좌 쟁탈전의 양상을 살피느라 외적과 싸우기 보다는 보신에 급급한… 그대를 포함한 3주의 성주들. 그들의 마음을 내 모르지 않소이다.”

“내 흑포장군의 면을 보아 참으려 했건만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작금의 상황이 벌어진 데는 그대의 책임이 가장 크지 않은가! 바크렌을 잃은 패장에게 어처구니없는 타박을 들을 만큼 내 물렁하게 이 땅을 다스려오지 않았거늘!”

“패장이기 때문에! 내 소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목숨을 걸고 과오를 갚으려는 것이외다!”

“목숨을 걸 요량이었다면 바크렌에서 도망쳐 나오기 전에 그리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제 와서 내게 억지를 부릴 것이 아니라 말이다!”

“억지라고 했는가!”

콰앙!

벌떡 일어난 아그니스 체스퍼가 탁자를 내리쳤다. 그의 주먹을 맞은 커다란 탁자가 부서져 내렸다. 성주의 친위병들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은 타라냐드의 성주에게 못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그대의 말이 맞다. 목숨을 걸 요량이었다면 바크렌에서 걸어야 했었지.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그대에게 모욕을 받는 일도 없었을 터.”

강철 같은 표정에 한 줄기 회한이 스쳐지나갔다.

“허나, 그때 그 상황에서 목숨을 걸었다면 무엇 하나 의미 있게 이루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 내가 내린 결정은 결코 이 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조차 변명 밖에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그대에게 비웃음을 살 정도는 아니다. 대관절, 그대는 제국의 신하가 맞기는 한 것인가?”

“더 이상의 모욕은 참을 수 없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할 수 있는 최대한 서늘한 목소리를 내는 타라냐드의 성주.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를 비웃었다. 내가 너를 같잖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최대한 알아달라는 듯, 한쪽 입 꼬리를 비틀면서 살기 어린 눈빛을 번뜩였다.

“조심하지 않으면? 내 목을 베기라도 할 텐가? 좋다. 그리 나오겠다면 나도 제국에 불충한 이를 단죄하기 위해 이 한 목숨 내놓겠다. 비록 바크렌에 도사린 적도들과 싸우다 죽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아그니스 체스퍼는 부러진 탁자의 잔해를 걷어찼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잔해는 성주의 의자 옆 기둥에 부딪치며 산산조각 났다. 성주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선택권을 넘기겠소 성주. 그러니 그대가 선택하시오. 협조를 하든, 나와 결단을 내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시오.”

“…어째서 이렇게 무모하시오 장군. 다들 숨죽이고 있소. 내가 제국에 불충한 신하라서 그런 것이 아니오. 충성을 바칠 주인을 잃은 상황이 아니오. 작금의 제국에서 어찌 처신을 해야 하는 것이 옳은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대의 말마따나 불충한 자들이 활개를 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적도 놈들을 잡겠다고 순진하게 병사를 낼 수는 없소. 약해지는 순간 물어뜯길 것이 자명한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장군! 부디 이성을 찾으시오.”

“날 설득할 생각은 마시오 성주. 그대가 해야 할 것은 설득이 아니라 선택이오.”

“정녕!”

“병사를 내어달라는 말은 않겠소. 내가 이끌고 온 병사들. 그들만을 데리고 바크렌으로 가겠소. 그러니 그들을 위한 물자. 그것만 지원해 주시오. 그리만 해주신다면 이 사람, 아무런 소란도 없이 조용히 떠나리다.”

“…….”

타라냐드의 성주는 한 손을 이마에 댄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아그니스 체스퍼는 형형한 시선으로 답을 촉구했다.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하던 성주는 곧 입을 떼었다.

*

가혹한 행군이었다. 올라갈수록 가팔라지는 경사와 덮쳐오는 추위. 그에 비례해 떨어지는 체력. 이 3박자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니 병사들에게는 끔찍한 비극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쓰러지는 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명이 쓰러지기 시작하니 다른 이들도 줄지어 쓰러졌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가벼운 탈진으로 끝났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동상에 걸리는 자들도 속출했다. 발가락 한, 두 개로 넘어가면 다행이었다. 발 하나가 얼어버리는 경우는 답도 없었다. 울부짖는 목소리가 늘어가고, 낙오되는 인원이 늘어갔다.

그들은 점차 말을 잃어갔다. 표정이 굳은 것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런 무모한 결정을 내린 군단장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는 병사들처럼 직접 걸었고, 얼어붙은 오른 발가락 세 개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잘라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이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은 그 ‘소식’을 주변으로 전파했다.

‘대단하군.’

군터는 프롱기우스 백작이 발가락을 잘라내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절로 혀를 찼다.

군단장까지 갈 것도 없이, 어느 정도 지위가 되는 이들의 경우에는 추위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체온을 유지해주는 법구를 사용하면 되니까 말이다. 실제로, 지금 베이고르 군의 어지간한 고위 장교 이상은 법구 하나씩은 구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프롱기우스 백작은 무려 군단장씩이나 되면서 몸을 덮치는 추위를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얼어붙은 발가락을 잘라냈다. 이것은 냉정히 보면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는 그런 연극이 필요했다. 낙오하는 동료들을 보며 사기가 곤두박질 친 병사들에게, 최고 지휘관이 같은 처지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굉장히 크다. 불과 하루 전, 다 죽어가는 얼굴이었던 병사들이 오늘은 그런 와중에도 독기를 품고 있는 것만 봐도 그 효과를 알 수 있다.

결국 그들은 콰이벡 산맥을 넘었다.

더 이상 살을 굳히는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 곳까지 내려왔을 즈음, 그들의 수는 산맥을 오르기 전보다 천 가량이 줄어 있었다.

산맥 하나를 넘기 위해서 지불한 대가로는 역시 터무니없다. 그러나 상식적이지 않은, 터무니없는 수준을 넘어서는 정신 나간 것 같은 결정들이 종종 이루어지는 곳이 전장이고 전쟁이다.

“2군단과 접선을 해야 한다.”

2군단과 대치하고 있는 적은 설마하니 또 다른 적이 콰이벡 산맥을 넘어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을 터. 그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2군단과 공조하여 적을 앞뒤에서 들이친다면 크게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를 위해 필요한 일이 있으니, 적들 몰래 2군단과 접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병(勇兵)들로만 꾸려서 최대한 조용히 진행해야 하겠지.”

어차피 가져가야 할 것은 친서 한 장뿐이니,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인원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프롱기우스 백작이 운을 띄우자 막시밀리언이 입을 열었다.

“제 수하 중에 용맹한 기사가 한 명 있습니다.”“아아…그, 군터 경이었던가?”

“예.”

프롱기우스 백작이 군터라는 기사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건 눈이 기가 막히게 좋은, 체구가 장대한 거한의 모습이었다. 그 후에 적 본진을 뚫고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는 대공을 세우면서 첫인상의 비범함에 어울리는 빼어난 용력을 지녔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딱 거기까지였다. 조금 호기심이 가는 정도라고 할까.

“그래. 그 자라면 괜찮겠지.”

프롱기우스 백작은 선선히 수락했다.

그리하여 군터는 전령의 임무를 띠고 셍겔스 평야에 주둔하고 있는 2군단으로 향하게 되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라도…….”

“남아서 병사들을 이끌어라. 내가 없을 때는 네가 내 대리다.”

군터는 할렌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그는 군단장의 재가 하에 원하는 만큼 병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혼자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은밀함과 신속함을 요하는 임무인 만큼 혼자 움직이는 것이 편하다 생각한 것이다.

발목이나 붙들 짐은 필요 없다. 길을 안내해줄 지도 한 장이면 족했다.

군터는 가벼운 몸으로 군영을 나섰다. 간만에 마음껏 달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이라도 하는지, 내쉬가 경쾌하게 달렸다.

*

홀로 나섰지만 마음대로 달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달리는 와중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고, 때때로 고지를 지날 때에는 혹시 모를 적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몸을 숨기고 이동해야 했다.

“…….”

군터가 가진 전령으로서의 자질은 자기 한 몸 지킬 수 있는 무력도 무력이지만, 그보다는 예민한 감각이 더 큰 장점이었다. 특히 까마득히 먼 곳의 물체까지 구별할 수 있는 초인적인 시력이 큰 이점으로 작용했기에, 군터는 이따금씩 먼 곳에서 어슬렁거리는 적의 정찰병을 먼저 발견하고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저 곳인가.’

적들을 발견할 때와 마찬가지로, 군터는 보통 사람의 눈에는 티끌만한 점 하나로 보일 형체가 2군단의 군영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 왔다고 생각했지만 군터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대치하고 있는 상대의 본진에서 눈을 뗄 리 만무하다. 아마도 어딘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감시하는 눈들이 숨어 있을 터. 될 수 있으면 그들의 눈도 피하는 것이 좋다.

‘음?’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군터는 은밀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느꼈다. 그것을 느낀 즉시 몸을 낮추며 사방을 돌아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아마도 지켜보는 눈은 은밀히 숨어있는 것 같았다.

‘낭패로군.’

무섭도록 은밀하다. 몰래 살펴보는 시선을 한두 번 느낀 게 아닐진대, 이번과 같은 섬뜩함을 느낀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는 상대는 특별했다.

‘노릴 것인가.’

상대, 아마도 적일 터인 은밀한 눈들은 완벽히 미지수다. 실력이며, 수가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없다.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다 와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어차피 본래의 임무는 서신을 전하는 것이다. 꼬리를 떼어내겠다고 무리를 했다가는 자칫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랴!”

마음을 정한 군터는 이제껏 유지하던 신중함과 은밀함을 버리고 거칠게 내쉬의 배를 두드렸다.

주인의 뜻을 전해 받은 군마는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말머리가 향하는 곳은 당연히 2군단의 군영 쪽이었다.

[…….]

자그마한 수풀 속에서 거뭇한 형체가 일어섰다. 자그마한 가지에서 흘러나온 거뭇한 안개 같은 것이 비롯된 대상보다 한참은 거대한 형체를 이루는 모습은 신비로우면서 동시에 기괴했다.

완벽히 무감정한 눈은 한 쌍의 인마가 달려간 방향에 한동안 머물렀다.

============================ 작품 후기 ============================

감염된 테란 ㅋㅋ 오랜만에 스타크래프트 하고 싶네요. 게임을 잘 못해서 매번 친구들하고 할 때는 깍두기 신세였었는데 말이죠.

마검신문님, 별奎님, 식은밥님, 리블랑님, 다이슬러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원고료 쿠폰 쏴주신 독자분들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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