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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나올 생각을 않는구나.]
타르가이 베르겐은 가파른 언덕 위에 위치한 요새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를 웃게 한 것은 늠름하게 선 성벽이 아니라, 그 위에 빼곡하게 서 있는 깃발들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다 죽어가는 비루먹은 개가 이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경사가 상당합니다. 친다면 무너뜨릴 수는 있겠습니다만…….”
전사장(戰士長) 콰이렌은 말끝을 흐렸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그의 속내가 어느 정도 묻어났다.
저 소몬루렉이라는 요새는 보통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전번의 전투에서 적장이 약삭빠르게 물러났던지라 온존한 병력이 상당했고, 그 병력들이 지금 저 단단한 요새에 잔뜩 들어가 있다.
공략을 한다면 단기전보다는 지구전으로 가는 것이 현명하다. 포위망을 두텁게 하고 보급을 끊으면 저 요새 안에 비축한 식량이 아무리 많다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저 요새는 지금 요새의 규모에 맞지 않는 과도한 병력을 들인 상태였으니까. 지구전으로 간다면 장담컨대 열흘. 늦어도 보름 안에 요새와 그 안의 병력들을 모두 괴멸시킬 수 있으리라.
콰이렌과 다른 족장들 몇이 그런 생각을 전했다. 그리고 타르가이 베르겐은 그들의 제안에 코웃음 쳤다.
[꼬리를 말고 구멍에 틀어박힌 쥐새끼들이다.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열흘이나 발이 묶여 있을 필요는 더더욱 없지.]
“하오면…….”
[놈들은 무시하겠다. 우리는 살마드(현 베나시드)로 간다.]
“괜찮겠습니까?”
[놈들이 감히 나의 그림자라도 밟을 수 있을 성 싶으냐. 그 정도 용기가 있었다면 진즉 싸워 죽었겠지. 놈들은 기세가 꺾이고, 목숨 하나 건져보겠다고 비참하게 도망친 패잔병들에 불과하다.]
그의 뜻이 선 이상, 무엇을 더 말한다 해도 소용없다. 그러므로 콰이렌은 앞으로의 일을 떠올려보았다.
‘곧장 베나시드로 간다. 보급만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면 무리는 없지만, 괜찮을지 모르겠군.’
그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쪽의 전선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벌써 사흘 째 별 다른 보고가 올라오지 않고 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대족장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걱정이군.’
사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다른 쪽 전선도 전선이지만, 그보다 대족장의 상태다. 그는 점점 급해지고, 과격해지고 있다. 이전의 그가 얼마나 냉정하고 치밀한 성격이었는지를 아는 콰이렌으로서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혹자는 광증(狂症)이라고도 했다. 그런 말을 한 자들의 목을 때로 직접 베기도 한 콰이렌이었지만, 그런 그조차 그것이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대족장은…그림자에 먹혀가고 있는 거다.’
일찍이 타르가이 베르겐은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했었다. 그는 그가 지닌 힘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어찌할 것인가. 애초에 그 힘을 거부했다면 모를까,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한 이상 위험부담은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된다.’
현명하고 용감한 대족장이 가혹한 군왕이 되었다. 그게 기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의 전사들에게 원하는 것은 복종이니, 그 바람대로 그에게 복종을 하면 그만이라 여겼다.
혹자들은 폭정이라 한다. 그러나 콰이렌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이전에 사나운 정치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유독 지금에 와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그만큼 타칸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합이라는 것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대족장은 그것을 파괴하려 들고 있다.
반발하는 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족장을 거짓말쟁이라 여길 것이다. 처음 그들을 끌어들이며 했던 말은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자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무릎을 꿇으라 한다면…화가 날 수밖에 없겠지.
‘이 전쟁을 이기면,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다.’
대족장은 지금 다소 흥분해 있을 뿐이다.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나면, 그의 야망이 달성되고 나면 이전처럼 너그럽지는 않더라도 다시금 현명한 지도자로 돌아올 것이다. 콰이렌은 그렇게 믿었다.
*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군영 내에 이미 모르는 이가 없더군요.”
군터는 대꾸하지 않았다. 할렌도 딱히 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가 들은 이야기들과 병사들의 분위기를 전할 뿐이었다.
“프롱기우스 백작령의 병사들을 두고…인형이라고들 하는 것 같더군요.”
“인형?”
“마음대로 조종하다가, 필요에 의해 언제든지 실이 끊어지는 게 닮았다는 뜻이겠지요.”
“꽤나 감상적이군. 군인이 상관의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냐.”
“그렇다 해도…누가 그런 꼴이 되고 싶겠습니까.”
“…….”
그렇다. 싸움터에 나선 군인이 싸우다 죽는 것이야 반쯤은 운명이려니 받아들이겠지만, 그 방식이 문제인 거다. 싸움 끝에 오는 죽음이라면 내키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죽음 그 자체가 도구로 쓰이는 건…그것도 보통 죽음이 아니라 처참하기 그지없는 죽음이라면 제 아무리 목숨을 내놓은, 군기가 바짝 든 정예병이라 해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군단장, 프롱기우스 백작이 그의 친위대를 사용해 보인 싸움은 그런 것이었다.
잘만 싸우던 병사들의 몸이 터져나가고, 걸친 갑옷과 뼛조각들이 무기가 되어 적들을 덮쳤다. 그렇게 해서 적을 몰살시켰지만, 그것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던 병사들은 꽤나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 해도 병사들의 마음이 뒤숭숭할진대, 그 뿐만 아니라 군단장이 병사들을 제물로 바쳐 적군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소문이 슬슬 돌아다니고 있다 보니 병사들의 사기는 다시 한 번 가라앉았다.
이제 병사들은 그들의 군단장을 두려워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보다도 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괜찮을까요?”
전군을 이끄는 군단장이다. 병사들이 믿고 따라야 할 자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건 할렌이 보기에는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군터는 생각이 달랐다.
“문제없다.”
그는 ‘무엇이 문제냐’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불안해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프롱기우스 백작이 터무니없는 졸장인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효율적으로 적들을 상대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 방식이 다소 잔혹했다한들 그것이 그의 공을 덮을 만한 사유는 되지 못한다. 물론 이런 그의 감상은, 어쩌면 동류에 대한 관대한 시선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몸이 터져나갔다는 병사들이나, 소문의 그 저주. 아마도 사령술의 일종이겠지.’
직접 보지 못해 확신은 하지 못해도, 짐작은 갔다. 모렌스 남작이 그랬듯, 프롱기우스 백작 역시 사교와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직까지도 두려움의 대상인 모양이군.’
하긴 사령술이라는 힘은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꺼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의 힘이라는 것이 가지는 특수성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제국도 그렇고, 같은 편이라 할 수 있는 베이고르도 그렇다. 살아있는 인간인 이상은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직접 그 힘을 다루는 이가 아닌 이상은 말이다.
“…….”
어디론가 향하는 몇몇 이들이 보였다. 조금은 이색적인 복장을 한 자들. 다른 곳에서 온 전령들이다. 어디서 온 자들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이곳이 아닌, 다른 세 곳 전선 중에 한 곳이 아닐까.
군터는 걸레짝이 되어버린 예전 것 대신 새로 착용한 딱딱한 갑옷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몸에 익혔다. 또 다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익숙해지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이전 것보다 딱딱한 재질이 더 들어간 것 같은 그의 새 갑옷은 좀처럼 마음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
며칠 동안 부지런히 움직인 베이고르군 앞에 콰이벡 산맥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싶게 생긴 산맥을 앞에 두고, 장교들은 숨죽인 한숨을 내쉬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아무렇지 않은 척 힘 있게 떼어내며 천천히 경사를 타기 시작하는 땅을 밟아 올라갔다.
푸르르륵!
경사는 점점 가팔라졌고, 불어오는 바람은 점점 서늘해졌다. 병사들의 호흡소리는 어느새 바람의 소리를 닮아갔다.
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산맥을 올랐다. 수레를 미는 병사들은 그 와중에도 입에서 단내를 폴폴 풍겼다. 수레를 밀던 병사들이 탈진하기 직전에 한 번씩 교대를 하니, 상태가 안 좋아지는 병사들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이건 미친 짓이야…….”
제 딴에는 안 들리게 한답시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중얼거린 말이겠지만 군터의 귀에는 제법 또렷하게 들렸다.
“…….”
그래도 군터는 모른척했다. 이 정도 자그마한 불평에 날을 세운다면 가뜩이나 바닥을 기는 병사들의 사기가 아예 땅을 뚫고 들어가 버릴 것이다.
덜컥!
“어, 어? 이, 이거 왜 이래?”
“이런 제기랄…좀 밀어봐!”
“밀고 있어! 으그그극!”
뒤쪽에서 자그맣게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인가 돌아보니 수레 한 대가 기우뚱해 있었다. 병사들이 달라붙어 밀려고 하는 것을 보니 바퀴가 부러진 것은 아닌 듯했고, 아마 파인 땅에 바퀴가 잘못 걸린 것 같았다.
“멍청한 놈들! 뒤에서 밀기만 한다고 되겠느냐! 말을 부려라!”
장교가 나서서 병사들을 나무랐다.
좋은 지적이다. 사람의 힘으로만 미는 것보다 앞에서 끄는 말의 힘을 이용하면 훨씬 더 수월하게 수레를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장교는 간과했다. 이미 오랜 시간 수레를 끌어온 말의 힘과 의욕은 이미 상당히 꺾여있었다는 것을.
푸르르륵!
말이 혀를 빼물었다. 나름대로 끙끙 거리기는 했지만 수레는 조금씩 들썩거리기만 할 뿐, 앞으로 나아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채근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저…송구합니다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지, 병사들과 말을 향해 신경질을 내던 장교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는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즉각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저놈이 힘이 빠진 것 같습니다. 말을 한 필만 잠시 빌려주실 수 있을지.”
장교는 미트라스의 휘하였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같은 코누다이안 소속인 만큼 야박하게 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이 짐을 끄는 말로 보이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말을 전우로 여기는 기병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전우에게 짐수레 따위를 끌게 하고 싶겠는가. 그건 일개 병사가 아닌 지휘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군터는 일반적인 기병보다도 그런 경향이 더했다.
“아, 아…송구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싸늘한 말이 흘러나오자 장교는 사색이 되어 죄인이라도 된 양 굽실거렸다. 그 모습이 썩 보기에 좋지 않았다.
“잠시 고삐를 잡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군터는 할렌에게 내쉬의 고삐를 맡기고, 여전히 앞뒤로 조금씩 흔들거리고 있는 수레 쪽으로 향했다. 굽실거리던 장교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서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비켜라.”
“예?”
수레의 뒤쪽으로 돌아간 군터는 얼굴이 새빨개져 있는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넉넉하게 수레 뒷부분을 붙잡았다.
“끄응!”
갑옷이 부풀어 올랐다.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답답하게 머물러 있던 수레가 쑥 앞으로 밀려나갔다. 앞에 있던 말도 놀랐는지 히힝! 하고 울음소리를 냈다.
“허억!”
기겁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군터는 조금 저릿한 손을 털어내고 할렌에게 가 고삐를 돌려받았다.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장교가 다급히 다가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군터는 간단한 말로 그를 돌려보내고 실실 웃는 할렌에게 핀잔을 주었다.
“상냥하시군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군.”
“그렇게 말씀하셔도 말이지요. 장주님께서는 따뜻한 분이십니다.”
“흰소리는 그쯤 해둬라.”
“옙.”
더 했다가는 엉덩이라도 한 대 걷어차일 것 같아, 할렌은 깔끔하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이런 면 때문일 것이다. 그저 엄하기만 한 상관이었다면 휘하 군졸들이 그에게 충성을 다할 이유가 없다. 말이야 바른 말로, 그저 후대만을 바란다면 같은 기사라 해도 군터 보다는 미트라스 쪽이 더 낫다. 그럼에도 병사들이 군터를 떠나지 않고 그에게 충성하는 까닭은, 물론 떠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소속을 옮겨갈 수 없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군터가 마냥 엄한 게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 마음을 써 주기 때문이었다. 주머니로 들어오는 동전의 개수가 아니라,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 묘한 간지러움이 있다.
할렌은 확신했다. 그의 상관은 부하로서 믿고 따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다. 이것은 그가 군터에게서 사사로이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나온 답이다.
“뭐가 힘들다고 헥헥대는 거냐! 네놈들이 저기 있는 녀석들처럼 수레를 밀기를 하냐! 짐을 옮기길 하냐! 지금부터 혓바닥을 입 밖으로 보이는 놈들은 죄다 뽑아버릴 테니 그런 줄 알아!”
험한 말을 뱉으면서도 할렌은 희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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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들은 모두 읽고 있습니다.
프롱기우스 백작의 등산은 한니발의 알프스 등산을 모티프로 한 것이 맞습니다 ㅎㅎ
진도를 빼는 데 좀 더 속도를 내보려 합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