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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좋은 풍경이다.
고투 끝에 기어이 벽을 넘어 적의 심장을 마주했다. 칼날을 밀어 넣기만 하면 이 전투는 끝난다. 피로를 묻어버리는 흥분이 몸을 덥혔다.
적장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쉬웠다. 정예로 보이는 전사들에게 호위를 받고 있는, 한 인상 하는 사내가 이쪽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그는 뭐라고 말하는, 아니 외치는 듯했다.
하지만 듣지 않았다. 군터의 눈에는 그의 목 밖에 보이지 않았다.
두두두!
전사들이 마주 말을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느렸다. 정확히는 그들이 타고 있는 말. 군터는 삽시간에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잘려나간 목이며 팔들이 여기저기 튀어나갔다.
크허엉!
그 다음은 바르바피들. 그들만큼은 군터로서도 경시할 수 없었다. 최고조에 달한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달려드는 괴인들을 차분하게 상대했다. 반드시 죽이거나 벨 필요는 없었다. 그저 흘리고 넘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히히힝!
바르바피들마저 넘어서자 드디어 끝이 보였다. 잔뜩 흥분한 것 같은 얼굴의 적장이 창을 꼬나 쥐고 덤벼들었다.
채채챙!
적장의 실력은 상당했다. 군터의 전력을 다한 맹공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다만 팽팽했던 것은 잠시로, 몇 번 공방이 오가자 자잘한 상처를 입으며 밀리기 시작했다.
“흐읍!”
그리고 힘껏 내리친 군터의 일격에 기어이 말의 다리가 꺾여 무너져 내렸다.
“커헉!”
적장이 다급히 몸을 굴리며 물러났다. 그를 군터는 놓치지 않고 따라붙었다. 적장의 눈이 노르스름하게 변한 순간, 길게 뻗은 칸젤의 창끝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크르륵…….”
입에서 흐른 핏물에 자그마한 방울이 맺혔다.
군터는 목을 꿰뚫은 칸젤을 가볍게 좌우로 털었다.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던 목이 뚝! 하고 떨어졌다.
*
군터는 자신이 목을 벤 자가 적의 우두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진짜 우두머리는 군단장 쪽을 치러갔다가 덫에 빠져 전사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세운 공의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그가 목을 벤 자 역시 타칸 연합의 고위직임은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전투 직후의 수습을 마친 뒤, 군단장인 프롱기우스 백작은 직접 군터의 공을 치하하면서 두둑한 포상을 약속했다.
머리를 잃은 타칸 연합군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바르바피들이 끝까지 날뛰면서 약간 피해가 생기긴 했지만 그뿐. ‘저주’에 걸린 타칸 연합의 군대는 다 시든 재에 불과했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열기를 지핀 것이 전사한 적장(후에 그의 이름이 발루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었지만, 그 하나에 의지하던 군대는 그가 사라진 순간 허무하리만치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승전의 기쁨은 그간의 피로를 모두 날려버릴 만큼 짜릿했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전후 수습이 끝난 후에 그의 군대에게 하루의 온전한 휴식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 하루가 채 다 가기도 전에, 지휘부 막사로 다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급보입니다! 파비우스 리에론 공작 각하가 이끄시는 3군단이 적에게 패퇴! 기존의 진격로에서 이탈해 소몬루렉까지 물러났다 합니다!”
조금 전까지 흐르던 미소는 온 데 간 데 없다. 지휘관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얼굴이 돌처럼 굳어져 전령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눈을 지그시 감은 프롱기우스 백작이 입을 떼었다.
“상대는?”
“타르가이 베르겐…타칸 연합의 대족장이 이끄는 타칸 연합의 대군입니다.”
*
파비우스 리에론이 이끄는 3군단. 그들의 패퇴 소식이 들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전선에서의 보고도 연달아 들려왔다.
“국왕 전하께서 이끄시는 1군단이 적의 대군을 격파! 홀레아뮈드의 점령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합니다!”
“칸디시아렌 공작 각하께서 이끄시는 2군단이 셍겔스 평야에서 적군과 나흘 째 대치중! 대치는 장기화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전체적인 전황은 백중세. 승기를 잡은 쪽도 있고, 밀려난 쪽도 있었다.
“3군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당장 지원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여기서 소몬루렉까지 가려면 못해도 스무날 이상 걸릴 겁니다.”
세비로스 자작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은근히 몇몇 사령관들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 파비우스 리에론에게 끈이 닿아 있는 이들로, 당연히 막시밀리언 역시 그 중 하나였기에 당연히 그의 시선을 받았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리에론 공작 각하께서 소몬루렉까지 물러나셨다함은 3군 군단의 사정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 속히 움직이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세비로스 자작의 은근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박이 튀어나왔다. 그가 은근히 흘겨본 자들 중 한 명이었다.
“내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아군은 북쪽 끝에 있고, 3군단은 남쪽 끝에 있지. 우리는 그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네. 우리가 구원을 가고 싶다 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아니면 무엇인가? 자네는 보름 길을 하루 만에 주파할 수 있는 묘안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4군의 한 축이 무너지면 아국의 대전략도 무너진다는 겁니다. 만약 타르가이 베르겐이 리에론 각하를 기어이 쓰러뜨리고 왕도로 진격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일이 벌어질 일은 없을 걸세.”
“어찌 장담하십니까?”
“놈들이 왕도를 눈에 담기도 전에, 놈들의 수도가 먼저 불 탈 테니까. 놈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돌아와야 할 것이야.”
“그 가정을 그대로 가져와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군요.”
그때 막시밀리언이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의 웃음에 세비로스 자작은 기분이 상했는지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 시늉을 했다.
“무슨 뜻인가?”
“우리가 놈들의 수도를 친다고 해도, 놈들이 군대를 돌릴 것 같지는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건 어째서인가?”
“본래 거처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떠돌아다니던 민족이 아닙니까. 요 근래에 잠시 정착 생활을 했다 해서 누대에 걸쳐 쌓인 습성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뜻이지요.”
“그것을 어찌 확신하는가?”
“확신이 아닙니다. 추측일 뿐입니다. 세비로스 자작님께서 적들이 말머리를 돌릴 것이라 추측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말입니다.”
세비로스 자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막시밀리언의 말은 나긋나긋했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적나라했다. 예의를 지키는 것 같은 목소리에 숨은 비꼼을 느끼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그가 한 마디 대차게 내지르려던 순간, 잠자코 있던 프롱기우스 백작이 끼어들었다.
“감정싸움은 그쯤 하지. 그대들이 누구와 함께하든 상관없다. 지금 그대들이 베이고르의 귀족이자 군인으로서, 내 휘하에 있음을 잊지 마라.”
둘 모두 즉각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차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세비로스 자작의 얼굴이 풀렸다.
하지만 아직 군단장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남쪽의 상황이 위중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 3군단이 뚫리면 적은 그대로 아국에 들이닥친다. 정말로 내친 김에 왕도까지 노릴지도 몰라. 그리 되어서는 곤란하겠지.”
“허면…….”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겠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호위무관으로 하여금 탁상에 지도를 펼치게 했다. 쭉 뻗은 지휘봉이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지금 그들, 4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위치였다.
“본래는 미렙 강까지 서진(西進) 할 생각이었지.”
갈색초원에서 내려올지 모르는 적을 차단하고, 그 뒤로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가 타칸 연합을 압박할 계획이었다.
“설마, 곧장 남진을 할 생각이십니까?”
“음? 눈치가 빠르군.”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한 귀로 흘리고, 막시밀리언은 프롱기우스 백작의 지휘봉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남쪽으로 조금씩 시선을 옮겼다.
“무리입니다.”
“길이 막혀 있어서?”
“예.”
이틀간은 내려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틀이 지나면, 거대한 장애물이 군대를 가로막을 것이다.
콰이벡 산맥. 산이 아니라 산맥이라 불릴 만큼 규모가 있으며, 꽤나 험준한 곳이다. 그것이 남쪽으로 향하는 길을 틀어막고 있다. 넓고 길게 뻗은 산맥이라 돌아가고자 한다면 한 세월이 걸릴 것이다.
“넘는다.”
“무리입니다. 이만한 대군을 이끌고서는…….”
“어찌 해보지도 않고 무리라 하는가.”
“병사들의 피로도 피로거니와, 보급이 가장 문제입니다. 강행한다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낙오하게 될지…….”
“괜찮아. 한 이천쯤 낙오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예?”
“약졸 이천을 거르고 강군 오천을 얻게 되는 게 아닌가. 나는 오히려 남는 장사라고 보는데.”
막시밀리언은 이 자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런 진지한 이야기를 하며 농담을 할까 싶었다. 게다가 그의 눈빛과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어디에서도 장난기는 비치지 않는다.
“각하. 하…….”
“전투는 머릿수로 하는 게 아니네. 머릿수를 바쳐서 시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깟 병력쯤, 얼마 정도 잃는다 해도 이득이지.”
지휘봉이 아래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2군단이 셍겔스 평야에서 대치중이라지. 콰이벡을 넘어간다면 셍겔스 평야까지는 이틀이면 닿을 수 있다. 그것도 적의 후미를 노릴 수 있단 말이지. 뒤를 잡기 전에 발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고착된 흐름을 깨고 2군단에게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을 테니.”
“2군단과 합류하여 적을 밀어내고 수도까지 진격입니까?”
“북쪽에서 넘어올 병력을 무시할 만한 가치가 있지.”
“…….”
일단 말만 들어보면 상당히 그럴싸한 계획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문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콰이벡 산맥을 넘으며 얼마나 병력이 상할지 모르는데, 그 상한 병력으로 고착된 2군단의 전장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인가.
둘째. 2군단과 합류하여 적을 밀어냈다고 해도, 그대로 수도까지 밀고 들어가려면 적의 반발을 맞닥뜨릴 것인데 그 험로를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 셋째.
‘뭉개고 지나가는군.’
만에 하나, 타르가이 베르겐이 이끄는 병력이 말머리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베이고르의 영토 깊숙이까지 치고 들어갈 경우. 프롱기우스 백작은 그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뭐라 말을 한다고 해서 들을 자도 아니지.’
막시밀리언은 슬쩍 화제에서 한 발 물러났다. 그때부터는 할 말 많은 자들이 열심히 목 아프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군단장이 그린 대전략에서 뻗어나가는 것들이 대부분으로, 그 중에는 제법 그럴듯한 의견도 있었지만 역시 관심 밖이었다. 막시밀리언은 앞으로의 일보다는 현재 시점에서 전쟁의 양상을 머릿속에 그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보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딱딱하게 끊은 것은 일부러 한 것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의도와는 다른 효과를 낸 것 같네요. 다음부터는 조금 더 신경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