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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네리스 남작이 이끄는 기병 부대는 전장을 크게 우회하여 달렸다. 가로 막는 적을 최대한 피하면서, 될 수 있다면 적의 후방에서부터 찔러가려고 한 시도였지만, 예상했던 대로 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슈슈슝!측면에서 화살비가 날아들었다. 기사에 능한 초원의 전사들이 땅에 서서 쏘는 솜씨가 떨어질 리 만무하다. 한 번의 공격으로 수십의 기병이 대열에서 낙오했다.
네리스 남작은 질끈 이를 깨물었다.
“전속 질…….”
“아직입니다.”
“주…?! 그게 무슨 소리인가?”
군터의 제지에 네리스 남작은 화를 내지 않았다. 일개 기사가 한 부대의 지휘를 맡은 사령관을 막아서는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불경이나, 군터에게 목숨 빚을 지고 그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는 네리스 남작이었기에 그는 불쾌감을 드러내는 대신 의문을 표했다.
“벌써부터 힘을 쓰면, 정작 힘이 필요할 때 곤란해집니다.”
“하지만 적들의 견제가 만만치 않네!”
“감수해야 합니다. 어차피 잠시일 뿐입니다.”
“으음!”네리스 남작이 신음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또 한 번 화살비가 쏟아졌다. 이번에도 수십의 기마가 떨어져 나갔다.
“이익! 알겠네. 모두! 방패를 들어라! 머리를 보호해라! 적의 화살은 우릴 따라오지 못한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베이고르의 기병들이 가진 것은 정말로 머리나 간신히 가릴 수 있는 작은 방패다. 그 초라한 보호에 의존하며 병사들은 말과 밀착했다. 그 뒤로도 세 번 더 화살이 쏟아졌다. 그때마다 수십이 사라졌다.
“지금이다! 전군! 나를 따르라!”
개죽음은 아니었다. 화살밥이 되기 위해 말을 달린 것도, 피를 뿌린 것도 아니었다. 희생을 딛고 착실히 달린 결과, 그들은 어느덧 타칸 연합군의 측면을 넘어 배후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적장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좌우군에서 일부 병력을 뒤로 돌렸는지 만만치 않아 보이는 벽이 떡 하니 세워졌다.
그러나 네리스 남작은 알았다. 저 사뭇 단단해 보이는 벽 너머에는 적의 심장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찌르면 승리한다. 이 전투의 승리를 따오는 대공이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공명심이 그의 안에서 활활 타올랐다. 전의가 솟구쳤다. 그의 목소리가 자연히 힘을 얻고, 허공에 긋는 칼질에 자신감이 가득 찼다.
“돌파하라아아아아아아!”
목이 터져라 내지르는 고함에 군터가 힐끔 그를 살폈다. 그리고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잔뜩 흥분했군.’
여기서 그냥 내버려두면 어떻게든 벽을 넘어선다 해도 그 뒤에 변을 당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공에 눈이 먼 것인지, 아니면 전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흥분에 머리가 달아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과한 흥분은 항시 독이다. 다른 곳에서라면 따끔하게 데이는 정도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전장에서는 그것이 곧잘 죽음으로 다가오곤 한다.
‘곤란하지.’
네리스 남작이 죽어버리면 곤란하다. 그가 죽어버리면 뒤따르는 병력이 길을 잃는다. 자신이 어떻게든 수습해서 이어받을 수도 있겠지만,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지휘관은 괜히 지휘관이 아니다. 애초 이끌던 병력이라면 모를까, 소속이 여럿인 이들을 이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그러한 연유로, 군터는 말라가는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한껏 달아오른 네리스 남작을 제치고, 선봉으로 나갔다.
콰직!
칸젤의 끝에 걸린 적의 몸이 박살났다. 창날은 팔을 가르고, 가슴 언저리까지 파고들어 날려 보냈다. 피를 뿌리며 회전한 창극이 또 다른 전사의 목을 관통하고, 그 뒤의 적까지 찔렀다.
채앵!
옆에서 날아들던 칼날을 네리스 남작이 쳐냈다. 군터가 뿌린 피를 얼굴에 제법 뒤집어 쓴 그는 방금 전과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 한 번 빚을 지는군!”
“그 빚은 지금 막 갚으셨습니다!”
또 하나의 적이 쓰러졌다. 땅을 찍는 말발굽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부족해! 이번 전투에서 자네의 옆을 충실히 지키도록 하지!”
“그럼, 부탁드리지요!”
네리스 남작은 비스듬히 물러나 좌측을 지켰다. 그리고 어느새 앞질러 나온 할렌이 우측을 지켰다.
그들에게 옆과 뒤를 맡기고, 군터는 앞만 보고 칸젤을 휘둘렀다. 이 전장 어디에도 같은, 혹은 비슷한 모습조차 찾을 수 없는 기병은 그의 손에서 격렬하게 춤췄다.
피와 살점이 쉬지 않고 허공을 날았다. 단단한 벽은 군터의 앞에서 속절없이 갈려나갔다. 물러서지 않고 막아서는 전사들은 다가오는 족족, 다가가는 족족 찔리고 베여나갔다. 때로는 길게 잡고 우악스럽게 휘두른 창대에 걸려 몸이 으스러지기도 했다.
길지 않은 시간. 그의 손에 수십의 목숨이 사라졌다. 또 하나, 또 하나가 그 위에 더해졌다.
“후욱! 후욱!”
호흡이 거칠어졌다.
지친 것은 아니다. 그저, 어쩔 수 없는 흥분이 스멀스멀 차오르고 있는 것뿐이다.
적절한 흥분은 피로를 잊게 만들었다. 착각일 뿐이겠지만, 적을 베면 벨수록 힘이 차올랐다. 간혹 눈 먼 창칼이 몸에 상처를 냈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서걱!
용감하게 뛰어오른 적이 허공에서 목이 잘려나갔다. 떨어지는 몸뚱이를 뚫고 창날이 찔러오는 것을 손으로 낚아채고 힘껏 밀어냈다.
퍼억!화살이 꽂혔다. 오른쪽 가슴이 뒤로 밀렸다. 그뿐이다.
내쉬가 달리는 속도는 줄어들지 않는다.
군터가 칸젤을 놀리는 속도도 줄어들지 않았다.
*
와아아아아!
사방에서 적이 쏟아져 나왔다.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말 그대로 사방(四方)이다.
앞을 가로막는 적. 양옆에서 들어오는 적. 그리고 지나온 길을 메우며 압박해오는 후방의 적.
그들은 완벽히 고립되었다. 멈추는 순간 죽는다는 것을 그들 모두가 알았다.
발루아는 그의 본래 색을 잃었다. 그는 온통 붉었다. 그의 피와, 그가 뿌린 적의 피가 그를 혈인으로 만들었다.
서걱!
또 하나, 막아서는 적을 베어 넘기며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부하들은 잘 따라오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죽었고, 얼마나 남았을까. 혹시 혼자 남아버린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런 거라면.
‘조금은 처량해 보일지도 모르겠군.’
재미있는 생각이었지만 그 가정은 곧바로 들려온 소리로 인해 헛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히히히힝!
밀려드는 적을 두고 뒤는 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전방에 걸친 좌우 정도는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흐릿하게 지나간 일부를 보고 발루아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짐작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약삭빠른 놈이군.’
그의 칼날을 피해 움직였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옆과 뒤를 잘라먹는다. 화살촉은 피하면서 대를 꺾겠다는 수작이다. 날카롭기만 한 화살촉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니까.
대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군데군데 흰 부분이 남은 이빨이 바람을 맞았다.
“끝이 보이는구나아아아-!”
시원한 외침.
그의 목소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프롱기우스 백작에게도 들렸다.
“곧 오겠군.”
그는 초원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저 함성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았다.
“준비하라.”
그의 뒤와 양 옆으로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움직였다. 모두 기병에 튼실한 무장을 갖춘, 척 보기에도 정예라는 느낌이 드는 자들. 그들은 프롱기우스 백작의 친위대였다.
‘역시 제법이야.’
프롱기우스 백작은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는 발루아의 돌격부대와, 그 허리를 절묘하게 찌르고 있는 일단의 병력을 눈여겨보았다.
‘막시밀리언 코누디스. 소문 이상이군.’
상인의 자식이 전쟁에서 그럭저럭 공을 세워 출세했다고 들었다. 그러다 운 좋게 든든한 줄을 붙잡게 되어 귀족이 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는 평범한 사내로 알려졌었다. 그런 그에 대한 평가가 바뀐 것은 아샤즈 테오모렌과 그 일파에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면서부터.
기지를 발휘해 영지 하나를 통째로 꿀꺽한 수완은 상당히 훌륭했었고, 때문에 그를 신경 쓰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용병술도 나쁘지 않군.’
영리하면서도 과감하다. 재치가 보였다. 규모 있는 부대를 한 번 맡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콰앙!일반적이지 않은 굉음. 커다란 방패와 함께 우그러져 날아가는 병사가 보였다.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괴물이군.’
간혹 있다. 상식을 벗어난, 도무지 똑같이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자들이.
‘그 축복이란 걸 어지간히 듬뿍 받은 모양이지.’
타칸 연합의 불가사의한 괴인들에 대한 정보는 아마 일찍이 그들과 싸웠던 제국보다 베이고르쪽이 더 신경 썼을 것이다. 동맹이라고는 해도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강력한 이웃. 그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건 어렵게 다시 일어선 베이고르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바르바피들에 대해서도 다 안 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알 만큼은 안다. 그들의 힘, 그들의 특성.
인간을 초월한 괴력을 얻는 대신 이성을 잃는다. 오직 특별한 몇몇만이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더욱 강력한 초인이 된다.
지금 저기서 달려오고 있는, 아마도 적장으로 추정되는 사내 역시 그러한 자인 것 같았다.
“귀한 전리품이군. 준비는 문제없겠지?”
“물론입니다. 분부만 주신다면 언제라도 즉시.”
친위대가 움직일 때도 그의 뒤에서 가만히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프롱기우스 백작과 마찬가지로 별 달리 긴장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
콰앙!
길이 뚫리고 문이 열렸다. 그를 증명하듯, 이전과는 달리 색다른 장애물들이 앞을 막아섰다.
단단해 보이는 갑옷. 무거워 보이는 무기. 여유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바꿔 타고 싶은 좋은 전마.
그들의 너머엔, 재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적장이 보였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무명(無名)이라는 소리다.
‘아니지. 얕보면 안 되지.’
무슨 개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자신을 여기까지 밀어붙인 상대다.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당해봐서 알고 있다. 그런 자가 순순히 목을 내어주겠는가.
‘이놈들이 마지막이냐?’
말은 멈추지 않는다. 손에 쥔 대도 역시 쉬지 않는다.
살짝 너머의 빛을 약 올리듯 보여주는 문을 힘껏 열어젖힌다.
콰직!
‘이놈들만 넘으면 끝인가?’
축복을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우는 소리를 낸 적이 없던 그의 몸이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단칼에 갑옷 째로 베어버렸어야 할 일격이 가슴 언저리까지 가르고 멈춰버렸다. 이를 악물고 다시금 휘둘러 떼어냈지만 그 사이 한 개의 칼이 어깨를 찔렀다.
푸푸푸푹!
화살이 날아들었다. 몸이 밀려나는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시야가 뒤집혔다. 용맹하게 달려온 말이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진 것이다.
“하아…하아…….”
세상이 뒤집히고 나서야, 그제야 그는 뒤를 살펴볼 수 있었다.
수십이나 될까 싶은 전사들이 길을 막은 병사들과 뒤엉켜 싸웠다.
발루아는 몸을 일으켰다. 말발굽으로 짓밟으려는 듯 달려들던 기병을 단칼에 절단 냈다. 쏟아지는 피에서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콰앙!
아찔한 굉음과 고통.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전사들에 뒤엉킨 적병들이 하나둘씩 터져나가는 것을 보며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콰앙!
의지와 다르게 몸이 땅을 뒹굴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니 쇳조각과, 뼛조각으로 보이는 것들이 팔에 잔뜩 박힌 것이 보였다.
‘멋지군.’
귀가 날아간 것일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흐릿한 시야를 옆으로 돌렸다.
보였다. 저 멀리, 닿지 않을 것 같이 멀어 보이는 곳에 내려다보는 한 사내.
크아아아아아아-!
그는 부러진 대도를 내던졌다. 망가진 몸을 포기했다.
이성이 사라지고, 흉포함이 그를 채웠다.
맹수는 달렸다.
푸푸푸푹!
맹수는 뛰어올랐다.
콰직!
무수한 화살, 무수한 창칼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베고 찔렀다.
그러고서도 그는 십 수 명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닿지 않을 것 같던 곳에 그는 결국 닿지 못했다.
꿰뚫은 대여섯 개의 창에 그는 멈춰 섰다.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시들어갔다.
둥! 둥! 둥!
승리의 북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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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많이 풀린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울이 다 가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