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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66화 (266/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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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당했군.”

완만한 구릉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군을 보며, 프롱기우스 백작은 그답지 않게 탄식하며 머리를 짚었다.

“정말이지 무식한 놈들이 아닌가.”

정면에서 떡 하니 모습을 드러낸 타칸 연합군을 본 순간, 그는 일이 어찌 된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대강’ 한 짐작이지만, 그는 그 짐작이 맞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성가시군. 그냥 그대로 얌전히 죽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피할 수도 없다. 생각 같아서는 어떻게든 떨쳐내고 군을 물리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붙었다. 게다가 간밤의 소란으로 병사들의 피로가 쌓인 상태.

피할 수 없다. 어처구니없지만, 여기서 회전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이럴 거라면 너무 과했다. 버리는 패였나?’

보다 힘을 빼고 야습을 가할 수도 있었다. 미치광이 짐승마냥 날뛰어댔던 간밤의 괴인들은 고작 야습 한 번에 소모하기에는 과한 전력이었다.

“각하. 어찌 하오리까?”

“받아줘야지 않겠나.”

베이고르군은 횡진을 펼쳤다. 어차피 타칸 연합에 기병 전력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보병끼리의 정면 대결이 펼쳐질 터. 프롱기우스 백작은 점점 다가오는 타칸 연합군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뿌우우우-!

그때 울려 퍼지는 웅혼한 뿔 나팔 소리.

일전을 앞둔 심각한 상황에서, 그는 픽 웃었다. 웃고자 한 게 아니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객기를 부린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저 나팔 소리를 기억했다. 초전에 보다 승기를 확실히 거머쥘 수 있는 기회의 순간에 번번이 들려왔던, 그의 계획을 어그러뜨렸던 훼방의 상징과도 같은 소리.

그 소리가 지금 다시 들려온다. 마치 ‘이번에도 네 생각대로는 안 될 거다’라고 목 놓아 외치는 듯하다.

‘그 의미 그대로 돌려주지. 이번에는 생각처럼 되지 않을 거다.’

*

두 군대는 신중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후에는 양측 모두 대열을 정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양 쪽 다 물러설 생각은 없다. 이번 전투로 둘 중 하나는 무너진다. 결코 양보할 수 없고 미룰 수도 없는 전투다.

둥! 둥! 둥!

전고가 신호를 보낸다. 병사들이 발맞추어 앞으로 나아간다. 이에 질세라 반대쪽에서도 웅혼한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양 군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서로 가까워질수록 두 군대는 정반대의 움직임을 보였다. 베이고르는 좌우의 양 군이 앞서 나갔고, 타칸 연합은 중군이 앞장서고 좌우익이 뒤를 받쳤다.

와아아아아!

두 군대가 부딪쳤다. 타칸 연합의 선두에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바르바피들이 질주해 들어갔다. 그 거친 물결에 베이고르군 전체가 크게 뒤흔들렸다.

크허어엉!

바르바피들의 우악스런 돌진은 베이고르군의 잘 짜인 진형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밀어붙였을 뿐, 깨지는 못했다. 프롱기우스 백작의 안배 때문이었다. 그는 전열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두텁게 뭉쳐 세웠고, 그런 배치는 직접적인 기동이나 전투 돌입 후에는 방해가 될지언정 1차적인 충돌을 견뎌내는 데에는 탁월했다.

그렇게 바르바피들이 다수 밀집하여 공격해 들어간 중앙이 버티는 사이, 길게 펼쳐진 좌우익이 타칸 연합군을 감싸 안았다. 방패와 장창의 2인 1조로 구성된 베이고르의 병사들은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타칸 연합의 전사들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전체적으로 베이고르의 뜻대로 흘러가고, 타칸 연합으로서는 답답한 양상을 띠는 전황이었다.

“지휘는 자네에게 맡기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어찌할 셈이오? 내 보기엔, 아직은 길이 열리지 않은 것 같은데.”

발루아는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아래를 내려보며 씩 웃었다.

“항상 뚫려 있는 길을 갈 수만은 없지. 가끔은, 없는 길을 뚫어내야 할 때도 있는 법.”

“…뚫지 못한다면?”

“하! 뚫지 못한다면 죽게 되겠지. 당연한 걸 뭘 묻고 있나.”

사내는 달리 대꾸하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연신 불안한 듯 거친 콧김을 팍팍 내고 있는 갈색 말이 보였다.

“끄응! 창칼 앞에서 움츠러드는 쓰레기들을 타고서? 아무래도 무리라 보는데.”

“언제나 만전일 수는 없지! 자! 슬슬 인사를 해야겠는데.”

발루아가 대도를 고쳐 쥐었다.

사내는 하늘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사뭇 진지한 눈으로 발루아에게 말했다.

“다시 봅시다.”

“그리 될 걸세.”

‘살아서든, 죽어서든.’

뒷말은 삼켰다. 발루아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말을 탄 오백 명 남짓한 전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

프롱기우스 백작은 병사들을 동원해 인위적으로 만든 고지에 올라 전투를 지휘했다. 그는 차분하게 전장 전체를 살폈고, 때때로 벌어지는 변수에 대응해갔다.

‘음?’

그런 그의 눈에 아주 작은 일렁임이 보였다 아니, 흔들림이라고 해야 할까?

‘움직이는군.’

얼핏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자그마한 변화였다. 하지만 프롱기우스 백작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 작은 움직임이 화살을 시위에 거는 것과 같다는 것을 확신했다. 가볍게 손 하나 움직일 뿐이라고 방심했다가는 머리로 날아드는 화살을 그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리라고.

그렇기에 그는 기민하게 대응했다.

“후미의 기마대에게 신호를 보내라.”

“옛!”

이전과 똑같이, 기마대를 후미에 대기시켰다. 초전에 입은 피해가 커서 전력이 반감 되었다고는 하나 먼젓번과는 달리 타칸 연합의 기병 전력은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활용도가 큰 기마대를 후미에서 놀려두었던 까닭은, 그들이 언제라도 나설 수 있음을 적이 인지하고 움츠러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의 의도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잘 먹혀들어갔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제는 칼집 속에 고이 보관해 둔 칼을 뽑아들 때가 되었다.

‘노리는 건 내 목이겠지?’

그의 눈은 그 군터라는, 코누디스 남작의 기사처럼 좋지 않다. 당연히 화살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어딜 노리고 날아올지는 알고 있다.

“중군의 병력을 좌우로 벌린다.”

“옛!”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대놓고 만들어주면 의심할 테니 혼전 중에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처럼 비쳐야 한다.

펄럭!

깃발이 올라갔다. 거대한 방패로 벽을 쌓은 것처럼 버티기에만 열중하던 중군이 조금씩 적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밀리기만 하던 중앙의 전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르바피들이 베이고르군에 파고들었고, 반대로 베이고르군이 타칸 연합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도 했다.

‘자. 와라.’

무대는 마련 됐다. 이제 곧 날아들 화살만 처리하면 승리는 눈앞이다.

*

명령이 내려왔다.

군터는 힐끗 네리스 남작을 살폈다. 그는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사전에 명령을 받은 바 있기에, 지금부터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는 상태다.

그렇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다. 성공한다면 분명 제1공, 못해도 2공에 해당하는 대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나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틀림없이 목이 날아갈 것이기에.

“출진이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네리스 남작은 그래도 의연하게 중압감을 이겨낸 듯했다. 그는 천오백이 조금 안 되는 기병대를 이끌고 좌군의 뒤로 이동했다. 먼젓번에는 둘로 나뉘어 움직였으나, 병력이 줄어든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가뜩이나 적은 병력을 나눠봐야 실속 없이 힘만 줄어들 뿐이다.

“간다.”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군터는 묵묵히 내쉬의 고삐를 고쳐 잡았다.

*

“간다.”

산책을 나가듯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완만한 경사를 다 내려갔을 때, 그들은 거대한 화살이 되었다. 시위에서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강하게 달려 나갔다.

와아아아아!

온 세상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그들은 홀로 고요했다. 앞장서서 이끄는 발루아도, 그를 따라 질주하는 전사들도 입을 꾹 다문 채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한편으로는 겁에 질려 엇나가려는 말들을 달랬다.

‘두려워할 것 없다.’

발루아는 손길로 이야기했다. 아무 것도 변한 건 없다고. 무거운 틀을 매고 짐을 나르며, 건네주는 여물로 배를 채우던 삶과 살기가 넘쳐나는 전장의 한복판을 달리는 것이 결코 다르지 않다고.

‘어차피 모두 끝을 향해 이어지는 길의 한복판이 아니더냐.’

말장난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서 조롱처럼 느껴질까? 하지만 어떤가. 주어진 것을 어찌 받아들이느냐는 재량이 아니겠는가.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수하다. 그 무수한 것들 중에 그는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잡았을 뿐.

그는 생사의 경계를 부정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결코 달라붙지 않을 것처럼, 두터운 성벽을 여러 겹 쌓아올린 자들을 비웃는다.

그는 늘 자신이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한 발자국을 내딛든, 열 발자국을 내딛든 길은 항상 양 갈래였다. 그의 발은 단 한 번도 한 쪽으로 기울었던 적이 없었으리라.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비명과 포효를 들으며, 슬쩍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하여 직접 눈으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했다.

“하하하핫!”

그는 경쾌하게 웃으며 목에 건 뿔 나팔을 입에 가져갔다.

뿌-우우우우우우우-!

길게 한바탕 불고, 힘껏 잡아당겼다. 가죽을 꼬아 만든 끈이 목 뒤에 후끈함을 남기고 끊겨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허공에 던졌다.

서걱!

서늘한 빛이 번뜩이고, 깔끔하게 잘린 뿔 나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대도의 칼날보다도 더 서늘한 눈으로, 발루아는 멀지 않은 곳에 넘쳐나는 적들을 보았다.

“시원하게 한 번 가보자!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모두들 후회 없이 한 번 날뛰어 보거라!”

한 데 뭉친 전사들이 질주했다. 그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발루아의 몸에서는 푸르스름한 열기, 혹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훨씬 더 진한 빛이 그의 두 눈에서 일렁였다.

흉맹하게 날뛰던 바르바피들이 주춤하며 길을 텄다. 그 길을 따라 발루아는 멈추지 않고 말을 달렸다. 곧 그의 눈에 베이고르의 병사들이 잡혔다. 창과 방패, 허약한 둘이 뭉쳐 선 위태로운 모습.

서걱!

창을 자르고 방패를 짓뭉갠다. 그리고는 따라붙어오는 전사들에게 넘긴다. 그가 처리할 상대는 그 뒤에 똑같이 버티고 있는 조무래기들.

크아아아아-!

팔 근육이 부풀었다. 거칠게 휘두른 대도에 두 명의 병사가 처참히 부러져 나가 떨어졌다.

발루아는 질주했다. 그를 태운 말도 언제 두려워했냐는 듯 망설임 없이 땅을 찼다. 평범한 짐말이 전장에서 몇 년을 달린 전마처럼 용맹하게 나아갔다.

그렇게 거침없이 나아가는 발루아를 뒤따르는 전사들이 받쳤다.

그들은 화살이었다.

발루아가 날카롭게 뚫는 촉이라면 전사들은 곧바로 이어지는 몸통이었다.

“으아아악!”

견고하던 벽에 균열이 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구멍이 뚫리고, 무너져 내렸다.

화살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단단한 껍질을 깨고 질긴 근육을 뚫었으며, 연한 속살을 파고들었다.

“그래. 와라.”

프롱기우스 백작은 그것을 고지 위에서 담담히 지켜보았다.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 가까워져 오는 화살을 보면서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손을 들어올리며 또 한 번 신호를 보낼 뿐.

와아아아아!

전장의 열기가 고조되어 갔다. 하나의 화살이 날아오는 순간, 반대쪽에서 쏘아 보낸 화살도 착실하게 목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휴일도 다 끝났네요.

건강하지 못하면 세상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분들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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