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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따라올 생각조차 못하는군! 하긴, 적의 우두머리에게 머리가 달려있기는 하다면 감히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안 그렇소이까?”
“그럴지도, 아닐지도.”
기껏 사람이 들떠서 말을 하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영 시큰둥하다. 무안함을 삼킨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뻥 뚫린 길을 보았다.
너른 길. 완만한 길. 다소 가파른 길.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다 길이다. 어디로든 달려갈 수 있고, 어디든 칠 수 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라니. 무슨 소리요?”
“거리는 충분히 벌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겠지. 놈들과 승부를 보거나, 아니면 놈들의 땅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휘젓거나.”
“흐음. 이미 결정된 것 아니오? 놈들을 끝장냅시다.”
베이고르군을 끝장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보급을 끊으면 된다. 이미 국경 부근에 자리 잡은 부족들은 떠난 지 오래이니, 그들은 약탈로 보급을 충당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느린 이동속도로 보급선을 어지럽히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도, 힘이 빠지기 전에 약탈할 만한 곳까지 들어가지도 못할 터. 그들은 결국 천천히 죽어가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사냥. 느긋하게 사냥감의 숨통을 조여 가는 것이다.
“아니. 그건 너무 지루하지 않은가.”
“그게 무슨 말씀이오? 지루하다니?”
“적이 지치고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나.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워.”
“허면 군장의 생각은?”
“이런 건 어떤가. 우리가 누구보다 먼저 놈들의 왕도를 점령하는 거다. 왕궁을 불태우고, 왕도의 모든 불태우는 거다. 왕족, 귀족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도륙내서 도시와 함께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자. 어때? 사냥감이 죽어가길 지루하게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뭐…그렇기는 한데.”
“결정이군.”
더 이야기할 필요 없다는 듯, 발루아는 말 위에서 두 팔을 쭉 펼쳤다. 어쩐지 찌뿌둥했던 몸에 활력이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
“각하!”
“잘 듣고 있으니 목소리 높이지 않아도 되네.”
프롱기우스 백작이 점잖게 말했지만 얼굴을 잔뜩 붉힌 세비로스 자작의 목소리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이건 비상사태입니다! 후방의 병력이 놈들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절대 불가합니다!”
“그래. 힘들겠지.”
“그렇게 가볍게 말씀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건 명백히 우리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놈들을 놓쳤기 때문에 놈들이 아국의 영토를 유린…….”
“아직 놓치지 않았네.”
“예?”
“놈들을 따라 갈 것이야. 그러니 아직은 놓친 것이 아니지.”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 병력의 대다수는 보군입니다. 놈들의 기동력을 따라갈 수는…….”
“놈들도 계속해서 달리기만 할 수는 없을 걸세. 중간 중간에 전투도 치르겠지. 부지런히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든 잡을 수 있지 않겠나?”
“허!”
대놓고 상관의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지휘관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다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상관을 무시했다 하여 꼬집을 수 있는 무례인데도, 당사자인 프롱기우스 백작은 세비로스 자작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조금 냉정한 자들은 처음에는 다른 이들과 같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가, 곧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런 자들 중 하나가 막시밀리언이었다.
“혹 군단장께서 품고 계신 생각이 있으십니까.”
“생각이 어찌 없겠나. 이만한 대군을 이끄는 자리에 앉아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말이 안 되지.”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각하께서는 적들의 돌발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걱정이 없으신 것 같다는 것입니다.”
“…….”
“혹, 이미 수를 쓰신 바가 있는 게 아닌지.”
“아직은 때가 아니군. 기다려 보세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네. 그러니 너무들 조급해하지 말라 이야기해주고 싶군. 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부지런히 놈들을 따라갈 것이야. 그러니 다들 그렇게 알고, 잘 따라주었으면 좋겠네.”
언제나처럼 회의는 군단장의 일방적인 선언, 혹은 주장으로 끝났다.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불만이 쌓이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대놓고 드러내는 자는 없었다.
*
군대는 타칸 연합군을 쫓아 이동했다. 지금까지 온 경로를 반대로 거스르는 셈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질주하는 타칸 연합의 군대를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정말로 재앙이 벌어져버릴 테니까.
당장 며칠 뒤부터 그 재앙의 전조가 조금씩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페렝 인근 마을 십 수 곳이 습격 받았다고 합니다! 생존자는 전무!”
“브리스니올 부근이 완전히 초토화 되었다고 합니다!”
지휘부를 동요케 하는 보고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탄식하는 이도 있었고, 분개하는 이도 있었다. 그 외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마지막에 취하는 행동은 다 똑같았다. 군단장인 프롱기우스 백작을 쳐다보는 것이다.
“속도를 더 올리시지요.”
“병사들이 힘들어 할 거네.”
대체 언제부터 병사들을 그렇게 신경 썼는지. 세비로스 자작은 울화가 치미는 것을 간신히 꾹 눌러 참으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라면 전선에 계시는 국왕 전하께서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군단장과, 저희 모두를 질책하시겠지요.”
“질책 정도야 달게 받지. 며칠 전에 자네가 이야기한 대로, 이는 우리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
세비로스 자작은 내심 프롱기우스 백작의 말 중에서 ‘우리’가 ‘나’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이 동진을 시작했을 때 곧바로 힘을 다해 쫓았다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피해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흘러간다면 국왕 전하께서…각하와 저희의 지휘권을 박탈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아니요. 충분히 그럴 만한 사유가 됩니다. 만약 놈들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 전에 놈들이 끝날 거라는 말이네. 그러니 지휘권 박탈까지 갈 이유가 없지. 국왕 전하께서 크게 노하시기 전에 모든 상황이 정리 될 테니까.”
막사 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게…무슨 말씀이십니까?”
세비로스 자작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변했다.
그는 프롱기우스 백작에게 유감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마 여기 있는 이들 중에는 가장 불만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는 프롱기우스 백작이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자라고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이해 못할 행동을 할지언정, 직접 진지하게 입 밖으로 낸 말에는 무게가 있다.
그런 그가 말했다. 국왕이 노하기 전에 모든 상황이 정리 될 것이라고. 적들을 끝장낼(정확히는 ‘끝난다’였지만) 것이라고.
“코누디스 남작이 저번에 내게 물었던가? 이미 수를 쓴 것이 아니냐고?”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때는 아직 불안했거든.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겠어. 맞다. 나는 이미 손을 썼다.”
모두가 프롱기우스 백작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숨소리마저 고요했다.
“나는 놈들에게 저주를 걸었다.”
“저주?”
“내 영지에서 데려온 병사들 중 이상해 보이는 놈들이 있지 않았나? 조금만 관심 있게 군을 훑었다면 다 알고 있을 게야. 이상하지 않던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전장에 그런 빌빌 거리는 쓰레기들을 데려온 것이?”
자신의 병사들을 쓰레기라고 부른다. 태도는 지극히 냉소적이다. 그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왠지 모를 거북함과 오싹함을 느꼈다.
“그것들은 제물이었다. 처음부터 준비한 제물이었지. 그 제물을 이용해서 나는 우리가 맞닥뜨린 타칸의 군대에게 저주를 걸었다. 그 저주는 지극히 은밀하고, 조심스럽지. 놈들은 이제야 슬슬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프롱기우스 백작이 음침하게 웃었다.
*
히히힝.
털썩!
전사를 태우던 말이 힘없이 픽 하고 쓰러졌다.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말을 따라 쓰러진 전사가 쓰러진 말을 다급히 살펴보았지만, 역시 다시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군장. 알고 계시오? 전사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소.”
“…….”
발루아는 답하지 못했다. 그는 무거운 눈으로 그의 군대를 돌아보았다.
말없이, 두 다리로 걷고 있는 전사들이 열에 셋이나 됐다. 대략 삼분지일 가량의 전사들이 동반자를 잃고 만 것이다. 불과 이틀 사이에 영문도 모르게 기력을 잃고 쓰러진 말들이 수천 필에 달한다.
재앙이다. 몇몇 전사들은 신의 저주를 받은 거라고 조심스럽게 수군거리기도 했다.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신의 저주라니? 대체 어떤 빌어먹을 신이 이따위 저주를 내린다는 말인가? 이 땅에 신은 없다. 다른 이는 몰라도 발루아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땅의 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것을. 그 잔재 중 가장 굵직한 것을 그들의 대족장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땅에서, 신의 저주가 내린다면 그것은 그들이 아닌 베이고르 군에 내려야 마땅할 것이다.
“군장이시여! 베이고르 놈들이 사흘거리까지 따라붙었습니다!”“놈들이 속도를 올리고 있는 건가?”
발루아는 픽 웃었다.
“우리의 속도가 줄어든 것은 생각 안 하나?”
“…그렇기도 하군.”
“사흘인가…….”
발루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불과 이틀 사이에 피폐해진 그의 군대를 보다가, 환하게 내리 쬐는 태양과 흘러가는 구름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지난다고 나아질 게 없다면, 여기서 한 번 털어내는 수밖에 없겠군.”
“무슨 소리요 대체?”
“바쁘게 움직였으니, 조금 쉬어보자는 뜻이다.”
발루아는 슬쩍 팔을 들었다. 팔꿈치에서 팔뚝으로 올라가는 부위가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여러 마리 지렁이가 꿈틀대는 것 같은 흉터와 근육 사이로 못 보던 얼룩이 생겨났다.
“…….”
그는 시선을 거두고 앞을 보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구름이 기어이 태양을 가리니, 따스하던 바람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
“끔찍하군.”
한 병사가 코를 쥐었다. 썩은내와 탄내가 섞인, 불쾌함을 자극하는 악취가 코가 마비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강하게 풍겨왔다.
벌써 열흘 남짓. 보이는 것은 온통 파괴되고 불탄 흔적들뿐이다. 태우지 않은, 혹은 타지 않은 시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곳들도 여럿 지났다.
처음에는 분노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처참한 흔적들을 보게 되자 들끓던 전의는 차갑게 내려앉았고 사기는 위태롭게 흔들렸다.
“적들은 계속해서 이동 중입니다. 다만 군마를 많이 잃어 그런지 속도가 크게 줄었습니다. 빠르게 움직인다면 이틀거리입니다.”
“오오!”
그러나 병사들과는 달리, 지휘부의 분위기는 좋았다. 군단장의 말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적들의 군마가 수천 마리나 사라졌다는 보고는 그들을 크게 들뜨게 했다. 승리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만 같았다.
“망설일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놈들은 이제 우리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반절이 걷고 있다 하지 않습니까. 이틀 후에는 말을 타고 가는 놈들을 찾기 힘들 겁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면 사흘, 아니면 나흘 뒤에는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한껏 들뜬 지휘관들에 비해, 군단장인 프롱기우스 백작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는 정찰대의 보고를 듣고는 쏟아지는 지휘관들의 기대에 찬 말들을 일축했다.
“놈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부터는 진군 속도를 반으로 줄이도록 하지.”
“예?”
“적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수는 없다. 어차피 내버려둬도 알아서 자멸할 놈들이 아닌가? 승전이 며칠 정도 늦춰진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지. 느긋하게 가세.”
베이고르군은 진군 속도를 늦췄다.
이전에도 빠르게 움직이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제는 병사들마저 ‘이래도 되나’싶어 할 정도로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조용한 밤. 임시로 세운 베이고르군의 군영.
크아아아아아아-!
붉은 안광을 내뿜는, 거 대한 괴인들의 포효가 한밤의 적막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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