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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63화 (263/1,064)

263====================

2부

먼저 물러난 것은 베이고르군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크게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사망자만 2천을 헤아리고, 움직이기 힘든 부상병까지 합하면 3천 가량. 거기에 기병까지 상당수 잃었다. 뼈아픈 손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대가로 타칸 연합 역시 적지 않은 수의 바르바피들을 잃었다. 손실 병력이 전력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을 놓고 본다면 크게 차이는 나지 않는다. 그것이 군단장인 프롱기우스 백작의 판단이었다.

*

비가 내렸다.

언제 오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비는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군단장 프롱기우스 백작은 커다란 모닥불을 진지 중간 중간에 피우게 하고 병사들로 하여금 잠깐씩이라도 그 주변에서 온기를 쬐게 했다.

“병사들의 고통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무지막지한 장군이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런 건 또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글쎄.”

군터는 할렌의 말에 뭉뚱그려 답했다.

사람에게는 여러 면이 있다. 사납다고 하여 사납기만 한 사람이 없고, 부드럽다 하여 부드럽기만 한 사람도 또한 없다. 늑대 같은 자라도 자기 상황이나 마음에 따라 늑대보다 더 흉포한 짐승이 될 수도 있고 더없이 온순한 양이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음침한 군단장 역시 가혹한 지휘관의 면모를 지녔지만 어느 정도는 병사들을 살필 줄 아는 온기 또한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이 불은, 뭔가 특이하군.”

“예? 특이하다니, 어떤 점이?”

“모르겠다. 설명은 못하겠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드는군.”

“으음. 장주님은 아주 가끔씩 뜻 모를 말씀을 하십니다.”

아주 가끔씩이라. 언제 이런 말을 또 한 적이 있었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이 불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따뜻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무언가 몸 한 구석을 간질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냄새가 났다. 착각이 아닌가 싶을 만큼 희미하지만…틀림없다.

“피로하여 그러신 것이 아닐지.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선봉에서 쉬질 못하지 않으셨습니까.”

“피로? 아니. 그럴 리가 있느냐. 이전에는 며칠 씩 밤낮을 잊어가며 전투를 치렀었다.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기억하지요. 그때는 정말 끔찍했었습니다. 이제와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몇 번인가는 졸면서 싸운 적도 있었습니다. 깜빡 정신을 놨다가 눈을 뜨니까 제 창이 웬 모르는 놈의 모가지를 뚫고 있더군요.”

“체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즉, 평소의 단련이 모자랐다는 뜻이지. 이번 전쟁을 끝내고 돌아가면 제대로 한 번 봐주마.”

“아아.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멋지게 활약할 테니 조금 봐주십시오.”

군터는 피식 웃으며 수통을 건넸다. 수통도 수통이지만, 그 안에 담긴 물도 그냥 물이 아니다. 피레 잎이라 하여 단맛이 나는 풀을 빻아 분말로 만든 것을 조금 뿌려 넣었다. 텁텁한 물만 마시다가 가끔씩 피레 분말을 뿌린 물을 마시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당연히 값이 만만치 않아 어지간히 여유가 있는 이가 아닌 이상 누리기 힘든 사치다. 그리고 그것은 할렌 역시 마찬가지라, 금덩어리를 건네받듯이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소심하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카아! 좋군요.”

“나머지 녀석들에게도 한 모금씩 돌려라. 수통은 네가 알아서 챙겨두도록 하고.”

“어? 어디 가십니까?”

“한 바퀴 돌고 오겠다.”

“아, 그럼 제가 호종을.”

“됐다. 앉아서 쉬고 있어라.”

군터는 막시밀리언을 찾아갔다. 그는 뭔지 모를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잠깐 주변을 돌아보고 올까 합니다.”

“혼자서 말인가?”

“예.”

“하하. 자네답군. 지치지도 않나?”

막시밀리언은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군터는 당초 원했던 대로 홀로 조용히 나갔다 올 수는 없었다. 막시밀리언이 그도 함께 하기를 원한 것이다. 영주이고, 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인 막시밀리언이 움직이니 자연히 호위 병력도 같이 움직였다. 막시밀리언으로서는 소수만 대동했다고는 하지만 그 소수가 십 수 명이었다.

“기이하지 않나?”

“예?”

“하늘 말이야.”

“……?”

무슨 뜻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뭐가 기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군터가 답이 없자 막시밀리언이 말을 덧붙였다.

“꾸준히 비가 내리고 있어. 그런데 하늘은 맑지. 너무도 맑아. 구름 한 점이 없고, 무수한 별들이 떠 있고. 달도 더 없이 밝게 빛이 나.”

“…그렇군요.”

수긍했다는 듯 말하기는 했지만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비는 꼭 우중충한 하늘에서만 내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비 오는 날이라고 하기에는 보기 드물 정도로 하늘이 유난히 맑기는 했다. 단지 군터는 그것이 보기 드문 정도이지, 기이하다고까지는 여기지 않았다.

“잠잠하군.”

“예. 이상할 정도입니다.”

군터는 기이하다면 오히려 하늘보다는 적의 동태가 더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말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번 전투에서 누가 득을 봤다고 생각하는가?”

“…타칸 연합 쪽입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지?”

“그들은 바르바피를 잃었지만, 아군은 기병을 잃었습니다. 놈들이 빠르게 움직인다면 아군은 놈들을 쫓아갈 수 없습니다.”

군단장이 실착을 저질렀다고 대놓고 말할 수 없어 속으로만 삼키고 있었지만, 그것이 군터의 솔직한 진단이었다.

타칸 연합에 있어 바르바피들은 정면 대결, 혹은 난전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전력이다. 경무장을 하고서 말을 달리는 그들의 전력은 정면 대결에서는 조금 힘이 달리는 것이 사실이었고, 그런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바르바피 부대였다. 하지만 바르바피가 없다고 해도 그들이 크게 곤란을 겪을 이유는 없다. 정면으로 싸우지 못한다면, 본래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동력을 살려서 막강한 기병 전력의 힘을 쓰면 되니까 말이다.

반면에 베이고르군은 기병을 잃었다. 다 잃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남은 수만으로는 전원이 기병인 타칸 연합군을 견제하기가 어려워졌다. 만에 하나, 타칸 연합군이 거리를 벌리며 싸우려 한다면 어찌 대응을 해야 하겠는가? 수가 부족한 기병들로 하여금 쫓아가게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공성전도 아니고, 가만히 한 자리에서 버티고만 있을 수도 없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이제부터는 꽤나 지지부진한 싸움이 이어질 거라고, 군터는 생각했다.

“기병과 바르바피를 바꿔서는 안 됐다. 그리 생각하는 거로군.”

“예. 소관의 생각으로, 그것은 명백히 아군의 손해였습니다.”

기병들을 소모시켜서라도 바르바피들을 치려고 했다면, 군단장의 계획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계획을 세운 전제 자체가 잘못 됐다.

“프롱기우스 백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

이것은 조금 위험한 질문이다. 군터는 순간 주변에 다른 듣는 귀가 있지는 않은지 살폈다. 그러나 감각을 최대한 넓게 잡아봐도 달리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의 군재가 어떤지에 대해서 아직 나는 잘 모르겠네. 하지만 한 가지, 이제껏 그를 보며 느낀 바는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그는 음험한 자야. 냉혹하지만, 그 이상으로 음험해. 속을 드러내지 않아. 적군을 물론, 아군에게도 철저하게 속내를 숨기지. 그리고, 개전 직후부터 이제껏 그의 판단은 틀린 적이 없다. 이번 전투는 실책이 아닌가 싶지만, 이 또한 모르는 일이야.”

“모르는 일이라 하심은?”

“전투는 이제 막 시작 됐지 않은가. 잘못 끼웠다고 생각되는 이 단추가, 어쩌면 나중에 돌아봤을 때는 기가 막힌 한 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지.”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시밀리언의 말처럼, 군단장의 음험함에 한 번 기대를 해볼 수 있다면 말이다.

“지휘관 회의에서 달리 나온 말은 없었습니까?”

막시밀리언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군단장은 누구에게도 그의 계획을 터놓지 않아. 만약 그것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그의 계획이 모두 다 지나가고 난 다음이겠지.”

아군에게까지, 그것도 그냥 아군도 아니고 영주나 되는 지휘관들에게까지 비밀로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행동은 자칫 신뢰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어 사기를 떨어드릴 수도 있다.

“그가 군대의 지휘권을 쥔 군단장인 이상, 그가 무슨 이해 못할 행동을 하건 어차피 따를 수밖에는 없어. 그러니 그의 행사를 답답해하기 보다는, 다르게 한 번 생각해보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한 번 헤아려보는 것이야. 소소한 재미지.”

재미라. 재미나 찾으러 전장에 온 것은 아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영주님께서는 그러고 계십니까?”

“물론.”

“그럼, 헤아려지십니까. 군단장의 생각이.”

“대충은. 하지만 헛짚은 것일 수도 있겠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음? 내 답을 듣는 것보다는 자네 나름의 답을 찾는 것이 더 재미있을 걸세.”

“저는 영주님과는 달라서 말입니다. 그런 데서 재미를 느낄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하하.”

막시밀리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떼었다.

“내 생각에, 군단장은 일부러 기병을 버린 것 같다네.”

“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 버려진 ‘기병’에 속해 있는 군터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 말대로 아군의 기병 전력이 뭉텅이로 깎여 나가면서 전술적으로 택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좁아졌지. 때문에 적군이 기동력을 앞세워 전략을 짠다면 대응하기가 어려워졌어. 허나 이러면 어떤가. 군단장이 바로 그것을 노렸다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을 적이라고 모르겠는가. 적들은 자신들이 기동력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을 알아. 그러니 다음번 교전에서는 이전과 같은 전면전이 아니라 기동력을 활용한 방식으로 싸움을 걸어오겠지. 아닌가?”

“하지만…만약 정말 그것을 의도했다 하더라도, 적이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아군이 유리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막시밀리언이 씩 웃었다.

“그게 바로 재미있는 점이지. 그에 대해서는 자네도 한 번 궁리를 해보게나. 전제가 맞았다는 가정 하에, 군단장의 한 수가 무엇일지 말이야.”

야밤의 순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풀리지 않는 기분과, 못내 찝찝한 기분을 품은 채.

*

“군단장님! 적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급한 목소리가 잠을 깨웠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느릿하게 일어나 무장을 갖추고 막사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얼굴이 달아오른 무관은 답답한지 숨을 거칠게 팍팍 쉬다가 프롱기우스 백작이 나오자 대뜸 군례를 취했다.

“지금 적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진지까지 다 거둔 채로…….”

“흐음.”

프롱기우스 백작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타칸 연합군 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예상 밖이기는 한데, 그래도 나쁘지 않군.”

“예?”

“수고했다. 쉬어라.”

“예엣?”

“아! 탐마를 뿌려 놈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파악해두도록.”

황당한 감정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하는 무관을 뒤로 하고, 프롱기우스 백작은 다시 그의 막사로 들어가 무장을 풀고 잠을 청했다. 그 후로 바깥이 상당히 소란스러워졌지만 그가 잠에서 깨어나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태평함에 그 밑의 지휘관들만 까맣게 속을 태워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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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장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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