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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한 번 부딪쳐보고 알았다.
기습에 대한 반응. 받아치는 힘. 그 모든 것이 범상치 않다.
‘저 놈이 대장인가?’
뭘 알고 짐작한 것은 아니다. 그냥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적으로 전사들 사이의 위계는 일신의 무력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섬뜩한 살기를 흘리고 있는 저 사내의 직위는 결코 낮지 않을 터.
“남작님. 어서.”
“하지만 말이…….”
네리스 남작이 난처해 할 때, 할렌이 주인 잃은 말 한 필을 끌고 왔다. 남작은 훌쩍 그 위에 올라탔다.
“이런 빌어먹을. 놓칠 것 같나!”
발루아가 달려들었다.
“할렌! 남작님을 모셔라! 말했던 대로 움직여라!”
“옛!”
할렌이 네리스 남작과 함께 말을 달렸다. 군터는 그들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발루아가 대도를 휘둘렀다. 낮게 깔리는 공격. 내쉬의 뒷발을 단칼에 잘라낼 듯 날카로웠다.
카앙!
길게 내려 뻗은 창날이 공격을 막았다. 불똥이 튀며 내쉬가 힘껏 내달렸다. 발루아가 뒤쫓으며 연달아 베어왔다. 그를 군터가 받아치니 순식간에 2번 더 충돌이 일었다. 누구 하나 이득을 보지 못했고, 내쉬는 그대로 속도를 내서 거리를 벌렸다.
“제길!”
발루아가 순식간에 멀어지는 군터를 보며 짜증스레 탄식을 토했다. 손에 쥔 대도도 분하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실은 아직 충격을 다 해소하지 못하고 떨릴 뿐이지만, 발루아에게는 그것이 원통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마음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저런 놈이.’
차라리 모든 힘을 다 끌어내볼 것을 그랬나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잡을 수 있었을 거라는 확신은 없다. 축복이 안겨준 힘은 막강하지만 광기를 동반한다. 아직 그는 그것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
‘실패는 실패. 이미 놓쳐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
발루아는 아쉬움을 삼키고 뿔 나팔을 입에 물었다.
뿌-우우우우!
*
군터로부터 바깥에서 조여 오는 적의 존재를 들은 네리스 남작은 탄식했다.
“바깥쪽에서의 협공이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우선은 병사들을 수습해야지! 여기서 희생되게 둘 수는 없네! 기병을 크게 잃는다면 이후의 전투가 어찌 흘러가든 아군의 손해가 될 테니.”
“가능하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군터가 네리스 남작을 구한 것도 그가 지휘관이기 때문이다. 좌군 기병대는 이미 머리를 잃었지만, 우군 기병대의 머리는 살아남았다. 발 빠르게 움직인다면 활로가 보일지도 모른다.
“해봐야지. 그나마 자네의 병력이 있어서 다행이야. 내 뒤를 받쳐주게.”
“옆을 지켜드리지요.”
“음. 내 자네의 공을 잊지 않겠네.”
네리스 남작은 군터 부대와 함께 혼란한 전장을 누볐다.
“나는 네리스 남작이다! 베이고르의 장병들은 이쪽으로 합류하라!”
그는 목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치며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베이고르의 병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작 몇 명씩 모여들던 것이 조금 시간이 지나자 십 수 명씩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네리스 남작의 목에서 가래 낀 소리가 나기 시작할 즈음에는 모인 병사들의 수가 족히 천 명에 가까워졌다.
“남작님.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어쩔 수 없군.”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완전히 발이 묶이게 된다. 삼면에서 적이 조여오고, 뒤에서는 프롱기우스 백작이 이끄는 본군이 다가온다. 그들은 아군이지만, 대열을 맞추고 다가오는 본군에 기병들이 끼어봐야 방해만 줄 뿐.
“포위망을 돌파. 그 후에 다시 선회하여 적의 뒤를 괴롭힌다.”
그것이 최선이다. 챙기지 못한 병사들이 격전에 휩쓸릴 테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했다. 더 이상 욕심을 내는 건 미련한 짓이다. 네리스 남작은 냉정히 판단을 내렸다.
“빠져나가지.”
결정을 내리고 움직이기 시작한 때는 아슬아슬한 시점이었다. 타칸 연합군의 포위가 쩍 벌린 괴물의 아가리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슈슈슈슝!
질주하는 그들의 위로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며 최대한 벗어나려 했지만 여러 방향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을 다 피할 수는 없었다.
히히히힝!
사람이 비틀거리고 말들이 쓰러졌다. 앞이 쓰러지니 뒤도 뒤엉켜 무너졌다.
“윽!”
옆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화살을 뒤늦게 눈치 챈 네리스 남작이 다급히 몸을 틀려던 순간, 번개처럼 튀어나온 손이 화살을 낚아챘다.
“자, 자네.”
“조심하십시오. 눈 먼 화살은 누구라도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담담히 말을 하는 군터의 몸에도 몇 대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가슴이며 어깨며, 모두 급소를 벗어난 곳들. 미처 쳐내거나 피하지 못한 것들이다. 갑옷이 있으며, 질긴 근육이 있어 깊게 박히지 않고 피륙의 상처로만 끝났다.
군터는 손에 잡은 화살을 분질러 내팽개치고 전방을 주시했다.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쪽도 마찬가지네. 순순히 죽어줄 수 없지.”
마음에 드는 대답이다. 군터는 두껍게 뭉치기 시작하는 전방의 적을 주시하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지나온 뒤쪽에서는 돌아온 본군과 적군의 싸움이 막 시작된 모양이었다. 전세 역전이다. 수에서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저대로 가만히 두면 성가신 바르바피들도, 실력이 범상치 않았던 적의 고위전사(로 추정되는) 놈도 다 죽어나가련만, 반대쪽에서 조여 오는 타칸 연합의 병력이 그리 되게 놔두지는 않겠지.
“정신들 바짝 차려라! 속도를 줄이지 마라! 단번에 돌파한다!”
목이 다 쉬어버린 네리스 남작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고래고래 외쳤다. 여기서 살아나간다고 해도, 당분간 그는 벙어리처럼 지내야 할 듯싶었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부탁하지. 나는 자네의 뒤를 받치겠다.”
할렌이 조금 섭섭해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군터는 숨을 골랐다.
또 한 번 화살이 무더기로 날아들었다. 마지막 방해다.
히히히힝!
힘껏 재촉하니 내쉬가 거친 콧김을 내뿜으면서 질주했다. 시커멓게 시야를 가득 채운 적군을 향해서 인마는 하나가 되어 내달렸다.
*
“군장이시여! 형세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목을 내놓고 죽을 셈이냐!”
찔러온 창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지지대 삼아 뛰어올랐다. 당황하는 적의 목을 베고 뒤에 바짝 붙어 앉아 남은 몸뚱이를 밀어냈다. 군마가 날뛰려 했지만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배를 압박하니 금세 굴종의 빛을 보인다.
발루아는 고삐를 쥐고서 조금 전 말을 한 수하에게 외쳤다.
“그런 말을 지껄일 틈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싸워라!”
말 뿐이 아니다. 그는 그의 말을 직접 몸으로 실천했다. 밀리고 있는 싸움터에 돌진해 들어가 적들을 도륙하고, 또 다시 적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향했다.
몸에 새겨진 상처는 점점 늘어만 갔다. 초라하게나마 몸을 가려주던 갑옷은 이미 다 찢겨져 사라진 지 오래.
크허엉!
죽음의 목전에서 구원 받은 바르바피들이 거칠게 포효했다. 그들은 마치 발루아를 호위하듯 주변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발루아가 피식 웃었다.
와아아아!
“아아. 좋군.”
이번에도 산 모양이야. 뒷말을 삼키며 적들을 뒤흔드는 용맹한 전사들의 모습을 보았다.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이성이 다 날아간 바르바피들도 알아챘는지, 일제히 포효하며 사납게 뛰쳐나갔다.
“하아…하아.”
“군장이시여! 아군이 당도했습니다! 이제…….”
뿌우우우-!
안도와 기쁨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던 친위대의 전사가 낯빛을 굳혔다. 그의 얼굴은 마치 ‘이게 대체 무슨 정신 나간 짓이냐’고 외치는 듯했다.
“내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린다. 이것으로 전사들의 사기가 크게 오르겠지.”
‘하지만 덕분에 우리가 죽을 확률도 높아졌습니다.’
전사는 하고픈 말을 마음속으로 삼켰다.
공기가 변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주춤거리던 적들이 점점 이쪽으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건 착각이 아니다.
“죽거나, 죽이거나. 그 외에 무엇이 있겠느냐. 담담히 받아들여라.”
“제가 군장께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바르바피들이 모여들었다. 적들도 모여들었다. 그 뒤에서는 전사들이 몰려들었다.
힘껏 불은 뿔 나팔소리 한 번에 그들이 발 딛고 선 곳은 전장의 중심이 되었다. 발루아는 가장 먼저 뛰쳐나가, 밀려오는 적들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
“막혔군.”
프롱기우스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는 전장의 흐름이 담겼다. 그래서 바로 알 수 있었다. 순조롭게 흘러가던 줄기가 어느 한 지점에서 턱하고 막혔다.
“뚫을 수 없는 건가?”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다. 답을 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어떤 문제든 간결하게 결정짓는 것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그리 명료하지가 않았다.
‘왜지?’
준비해둔 것들은 모두 하나씩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적의 성가신 창을 앞으로 끄집어냈고, 제대로 들이받았다. 우회한 병력이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그래도 시간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끝을 보지 못하다니.
‘아군이 약했거나, 적군이 강했거나.’
둘 다 아니다. 아군은 딱 예상했던 수준이었고, 적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적이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고 있는 것은, 전체의 힘이 아니라 일점(一點)의 힘이다. 그 작은 점 하나가 주변을 끌어당겨 덩치를 불리고, 단단해져서 아군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흠.”
의외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의외라고 한다면 저 바깥쪽에서 적의 뒤를 계속해서 할퀴고 있는 일단의 기마대. 실로 훌륭한 활약이라 박수라도 쳐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저들만으로는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
뿌우우-!
“짜증나는군.”
저 뿔 나팔. 저 소리가 문제다. 저게 한 번씩 길게 울려 퍼질 때마다 잠잠해지던 적의 기세가 다시금 타오른다. 순간적으로 저 소리에 뭔가 술법적인 힘이 숨겨져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북을 울려라.”
“옛!”
그는 결단을 내렸다. 분하고 짜증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정을 미룰 수는 없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의 이성은 판단을 흐리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용병. 할 수 있는 한에서 항상 최선의 선택을 내리는 것.
둥! 둥!
군세가 조금씩 뒤로 물러난다. 궁수들이 화살을 퍼부으며 뒤쫓으려는 적들을 제지했다. 그에 적들도 무리해서 추격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첫 번째 교전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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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분들 모두 설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