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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61화 (261/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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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길게 두 번 울린 뿔 나팔 소리.

그 의미를 궁금해 한 자는 적어도 주변에는 없는 것 같았다. 직접 땅을 박차는 게 아니라, 달리는 말 위에 앉아있을 뿐인데도 하나같이 자기가 직접 달리는 것처럼 씩씩대는 이들. 군터는 그 사이에서 잠시 시선을 높고 넓게 두었다. 앞에서 일으킨 흙먼지 때문에 시야가 잘 확보되지는 않았지만, 아주 어렴풋이 저 멀리 적군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온다? 이쪽을 둘러싸겠다는 건가?’

그 외에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없다. 군터는 순간 이것을 지금 병력을 이끌고 있는, 이름 모를(들었지만 까먹은) 자작에게 이야기해나 싶었지만 관두었다. 어차피 지금 대열을 맞추어 달리는 중에 따로 가서 알려줄 방법도 마땅치 않을뿐더러, 알려준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없다. 어차피 당초의 목적은 돌파다. 그걸 해낼 수 있다면 적에게 포위될 일도 없다. 만약 뚫지 못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적에게 둘러싸여 싸워야하는 것은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마음속에 자그마한 불안감 하나라도 덜 지고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준비는 해놔야겠지.’

군터는 그의 뒤에 바짝 붙어오는 할렌에게 들리도록 적당히 목소리를 높였다.

“할렌. 내가 신호를 보내면 대열을 이탈해 내 뒤를 따라라. 알겠느냐?”

“옛!”

군터가 이끌고 온 휘하 병력은 정확히 오백. 지금 좌측으로 나뉘어 움직이는 병력의 삼분지일 가량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지금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 위치상으로는 크게 보아 2열. 즉, 허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자리했다. 선봉은 그 이름 모를 자작의 친위기병대가 맡았다. 자처해서 선봉을 맡을 정도로 자신감은 있어 보였지만, 그 자신감이 적에게 제대로 먹힐지는 봐야 아는 일이다.

“꿰뚫어라!”

부딪쳤다. 갑작스레 대열이 휘청거리고 달리던 속도가 확 줄어들었다. 비명과 비명. 포효와 고함이 뒤섞여 모든 이들을 귀머거리로 만들었다.

‘쯧. 글러먹었군.’

줄어들던 속도는 기어이 멈춘 것과 다름없어졌다. 실패를 직감한 군터는 앞의 기마병을 찢고, 이쪽을 향해 뛰어오르는 바르바피를 노려보며 외쳤다.

“들어라!”

외침과 동시에 찔렀다. 창대 끄트머리를 고쳐 잡고 쭉 뻗은 창날이 바르바피의 가슴을 찔렀다. 갑옷처럼 변한 피부도 칸젤의 예리함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심장이 찔린 바르바피는 경련을 일으키며 힘을 잃었다.

“돌파한다! 나를 따르라!”

군터는 창끝에 매달린 바르바피를 떨쳐내고 방향을 틀었다. 정면은 아군과 적이 뒤엉켜 단단히 틀어 막혔다. 힘으로 뚫으려드는 건 미련한 짓이다. 상대가 어중간한 적들도 아니고 괴력의 바르바피 부대라면 더욱 그렇다. 직접 그들과 질리도록 싸워본 군터이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돌파는 무리. 그렇다면 남는 건 우회뿐.

“어엇?!”

몇몇 당황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아니, 정말 들렸나? 어쩌면 착각인지도 모른다. 지휘관의 명령도 없이 독자적으로, 어쩌면 전투 이탈일지도 모르는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당연히 평범한 반응은 나오지 않을 터.

하지만 상관없다. 일이 생각한대로 흘러간다면, 어차피 선두에 섰던 지휘관은 살아남지 못한다. 멍청하게 가만히 앉아 적의 뜻대로 놀아나느니, 차라리 과감하게 움직이는 편이 낫다.

*

“대체 뭘 믿고 덤벼든 거지?”

물어봤지만, 죽은 자에게서 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그래도 굳이 쓸데없이 한 마디 한 것은, 그만큼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는 화려한 갑옷의 사내와, 그를 지키다가 죽은 병사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몇이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앞에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크르르르…….

“기웃대지 말고 저 앞으로 가라. 죽이든지, 죽든지.”

짜증스레 뱉는 말에 맞추어 새파란 안광이 번뜩였다. 슬쩍 이를 드러냈던 바르바피가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의 명령대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제부터 그는 계속해서 죽일 것이다. 더 이상 죽일 상대가 없거나, 자신이 죽기 전까지.

‘대전사 포라칸은 홀로 수백의 바르바피들을 통솔했다 하던데.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안 되는 모양이군.’

대족장이 가장 신뢰했다는 대전사의 위명은 초원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 만큼 대단한 것이다. 직접 싸워보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몇 번 보기도 했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단한 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발루아는 대다수 전사들과는 달리 대전사를 존경하거나 우러러 보지는 않았지만 인정은 했었다. 그랬기에 그가 제국군의 잔당을 추격하다가 전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질 나쁜 농담인가 싶었었다.

‘그런 대단한 자도 결국 죽는다는 거지. 전쟁이란, 전장이란 본시 그런 것.’

풀렸던 긴장이 다시금 거세게 가슴을 옥죄어온다. 발루아는 어느 순간 입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피를 뱉어내고 몸을 돌렸다. 한 쪽은 막았으니 이제 위태로운 반대쪽에다 힘을 보탤 생각이었다.

크허엉!

“응?”

그런데 바로 그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저건.’

일단의 기마가 튀어나왔다. 수는 대략 사백? 아니, 오백 정도. 그들은 달려드는 바르바피들을 떨쳐내며 혼자서 다른 쪽으로 빠져나갔다. 도망을 친 것이다.

‘어처구니없군. 대장을 버리고 도망을 간다?’

살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실소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발루아는 킥킥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바르바피들이 쫓아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쫓아가봐야 의미도 없고. 저 정도 수가 빠져나갔다고 해서 크게 아쉬울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잔챙이들이 아니라 대장의 목.

뿌우우우-!

천천히 밀리고 있는 반대쪽으로 향하며 다시 한 번 뿔 나팔을 불었다. 다가오고 있는 아군에게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동시에, 적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것이다.

‘나는 여기 있다.’

그러니 내 목을 가져가라. 그렇게 외치는 것이다.

*

뿌우우우-!

“영주님!”

“저 쪽으로 간다! 나를 따르라!”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돌파한다면, 거슬리는 것을 치우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네리스 남작은 수하의 우려를 일축하며 방향을 잡았다. 그의 칼에는 방금 벤 바르바피의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적이 아직 태세를 갖추지 못했다! 반대편의 아군이 힘써 싸워주고 있는 덕분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

네리스 남작은 영지의 용맹한 기사 둘과 함께 나란히 선봉에 서서 길을 열었다. 일반적인 검보다 날이 길고 큰 검을 쥐고 휘두르는 그의 기세는 일평생 무예를 연마해 온 휘하 기사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지휘관이 직접 앞장서서 길을 여니 뒤따르는 병사들도 힘을 얻어 용맹하게 싸웠다. 끔찍한 적들이 사납게 그들을 위협해왔지만 돌처럼 단단하게 뭉친 그들은 계속해서 말을 달리며 길을 열고, 넓혔다.

크허엉!

‘끔찍하군. 소문으로는 익히 들었지만, 직접 적으로 맞닥뜨리니 느낌이 달라.’

손에 쥔 무기가 아니라 짐승처럼 자라난 발톱과 이빨로 싸운다. 외형은 도저히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다. 이야기에나 나오는 마물이 딱 이런 모습이 아니겠는가. 네리스 남작은 문득 자신이 이야기속의 전사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자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생각이 스스로도 우스웠던 것이다.

“qerebasashinoa?(뭐가 그리 즐겁지?)”

환청과도 같은, 뜻을 알 수 없는 섬뜩한 목소리.

본능적으로 치켜 올린 칼날에 아찔한 충격이 닿는다 싶더니, 그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꿈인가 싶었지만 칼날에서 전해지는 충격이 몸까지 덮친 터라, 그 고통이 이게 꿈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덩달아, 역시 마찬가지로 들려오는 환청 같은 익숙한 목소리들도 그를 현실에 붙들었다.

“영주님!”

땅을 굴렀다.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래도 혀를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도 진동을 멈추지 않는 칼날을 땅에 박고 일어서서 본래 그가 있던 자리에 선 자를 보았다. 그는 홀로 두 명의 기사와 세 명의 병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크허엉!

선두가 멈춰서니 뒤따르던 병사들도 멈춰 섰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적들이 몰려들었다. 예의 그 끔찍한 괴성이 전후좌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니, 이번에는 다른 의미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것이냐.’

자책했다. 떨리는 몸을 힘주어 세우고 땅을 찍은 검을 뽑았다.

콰앙!

쾅!

정체 모를 적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강했다. 그는 다섯 명을 상대하면서도 우위를 보였다. 병사 둘의 목이 날아갔고, 기사 한 명이 부상을 입고 낙마했다. 뒤이어 병사들이 합세했으나 그에 질세라 끔찍한 적병, 바르바피들이 마주 달려들었다.

싸움은 순식간에 난전으로 치달았다. 한 걸음을 떼자마자 네리스 남작도 그 혼란의 틈바구니에 휩쓸렸다. 어디선가 다가온 바르바피가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낸 것이다.

“크윽!”

아직까지도 몸에서 충격이 가시지 않았으나 그는 물러섬 없이 맞서 싸웠다. 말에 올라 싸울 때와 두 다리로 땅을 밟고 싸우는 것은 차이가 컸다. 그를 보조해 줄 든든한 전우 없이 홀로 이 마물 같은 적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콰직!

갑옷에 몇 줄기 굵직한 흔적을 새긴 끝에, 그는 적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헉…헉…….”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도 날카롭게 치뜬 눈은 사방을 살폈다. 괴물과 인간의 비명이 누가 누구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섞여서 강물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적아가 하나인 것처럼 뒤엉켜 지휘는 꿈도 꿀 수 없다. 자신의 목숨을 손에 쥔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지켜야 하는 상황.

툭!

“…….”

무언가가 날아와 발뒤꿈치를 때렸다. 익숙한 얼굴이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목 아래가 잘려나가 없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수하다. 그것도 그냥 수하가 아니라, 그의 영지에 단 셋뿐인 기사 중 한 명이었다.

“eziaqaro buseba(확실히 더 낫군).”

네리스 남작은 검을 쥔 손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자다. 자신을 날려버렸던 자. 그 짧은 시간 동안 둘러싼 상대들을 모두 처리하고 왔는지, 그의 몸은 피 범벅이었다. 척 보기에도 여유로운 모습. 말을 잃어버렸는지 걸어서 다가오고 있지만 그것은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도움을 기대하기는…힘들겠군.’

가만히만 서 있어도 주위의 혼란스러움이 느껴진다. 여유를 가지고, 멀쩡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명령을 내릴 자도, 명령을 들을 자도 없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이 전장에서 지금 그는 혼자였다.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다.

네리스 남작은 최후를 직감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인정하기 싫은 것을 애써 받아들이자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두렵게만 느껴져, 마치 안개에 휩싸인 것 같았던 적이 보다 또렷하게 보였다. 그의 얼굴, 표정, 걸음걸이까지.

“와라. 죽더라도 한 칼 정도는 먹여주겠다.”

갑자기 찌그러진 갑옷이 거슬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갑옷을 벗어던질 때가지 적이 얌전히 기다려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네리스 남작은 아쉬움을 삼키며 검을 들었다. 신중하게 살피는 시선이 적의 푸르스름한 눈과 마주쳤다.

적이 웃었다.

적이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군마가 땅을 박차고 나가는 것만큼이나 빨랐다. 반응했을 때는 이미 큰 칼날이 허공을 갈라오고 있었다.

콰앙!

‘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채운 순간. 귀와 머리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졌다. 바로 앞까지 다가왔던 적이 튕겨져 나가고, 그의 앞에는 살기를 잔뜩 머금은 칼날 대신 서슬 퍼런 창날이 자리했다.

“지휘관이십니까.”

“네, 네리스 남작이다. 자네는?”

“코누디스 남작님 휘하의 기사, 군터라고 합니다. 네리스 남작님. 적이 포위를 좁혀오고 있습니다. 서둘러 이곳을 탈출해야 합니다.”

불경하게도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쏟아내듯 내뱉는 말에 네리스 남작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지적해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고려해보겠습니다.

신의 존재를 넣은 건... 아무래도 판타지에 대한 제 나름의 당위?를 찾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추천도 그렇지만 쿠폰은 특히 더 감사드립니다. 단 한 장일지라도, 그건 노블레스에 있는

수많은 글들 중에서도 특히 제 글을 독자분들께서 선택해주셨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적든 많든 항상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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