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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60화 (260/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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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프롱기우스의 예상대로였다. 적들이 뒤를 쫓거나, 야습을 해오는 일은 없었다. 정찰대들이 밤을 잊은 수고를 해준 바에 따르면, 적들은 밤새도록 잠잠했다고 한다. 마치 아군이 지근거리에 도착한 것을 알지 못하는 듯이.

“시작해볼까.”

하루 사이에 진채는 어느 정도 갖춰졌다. 프롱기우스는 진채를 중심으로 병력을 길게 늘어뜨렸다. 언제든지 물러날 수 있는 거리까지 나아가고, 고지대를 선점하며 적을 내려다보았다. 정석적인 포진이었다.

적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둔한 곳에서 살짝 소요가 이는 것 같기도 했으나 그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북을 쳐라.”

“옛!”

둥! 둥! 둥!

조용한 땅에 긴 고동이 떨쳐 울렸다.

이것은 도발이다. 움직이지 않는 상대에 대한 조롱이며, 동시에 하루를 쉬었다 하나 여전히 지쳐 있고 사기가 떨어진 아군을 위한 고양의 노래였다. 북 소리가 한 번씩 울리고, 적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병사들의 뛰는 가슴이 조금씩 자신감을 머금었다.

“왜 움직이지 않는 걸까요?”

“글쎄.”

군터는 할렌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그 역시도 왜 적장이 병력을 움직이지 않는지가 궁금했다. 어쩌면 국경을 넘어 몇 개의 성벽을 넘는 동안 군대가 꽤 상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넘겨짚는 추측일 뿐이다.

*

둥! 둥! 둥!

“군장(軍長)! 대체 언제까지 늘어져 있을 셈이오!”

“알았으니 보채지 마라!”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웃옷도 걸치지 않은 채 천막을 들추고 나왔다. 상처와 근육이 가득한 그의 몸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사내의 이름은 발루아. 한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면서, 동시에 이번 전쟁에서 독자적으로 군대를 부릴 수 있는 군장의 지휘를 부여받은 자였다.

밖으로 나온 그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팠다. 찡그리는 인상은 덤이다.

“거참 시끄럽군. 하루 정도는 더 목을 붙여주려고 했더니, 그렇게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건가?”

“전사들이 불만에 차 있소. 속히 움직여 놈들을 쓸어버립시다!”

“불만? 전사들이? 아니, 아니지. 전사들이 불만인 것이 아니라 그대가 불만인 것이겠지. 안 그런가?”

“크흠!”

사내는 발루아의 빈정거리는 말에 반박치 못하고 어색한 헛기침을 뱉었다.

발루아의 말이 사실이었다. 전사들은 아직까지 딱히 불만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전까지 치른 전투의 흥분. 그리고 살육과 약탈의 즐거움이 아직 남아있는 탓이다. 시끄럽게 구는 적들이 불만스러운 것은 어디까지나 사내 자신이었다.

“뭐, 너무 보채지 말게. 흥은 이미 다 깨져버렸으니, 자네 말처럼 저 시건방진 놈들을 한 번 호되게 야단쳐줄 생각이야.”

발루아가 두 팔을 벌리며 기지개를 폈다. 우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몸과 팔이 새의 날개처럼 양 옆으로 뻗었다. 실뱀들이 우글거리는 것 같은 흉터들도 덩달아 덩치를 키웠다.

나가서 싸울 것을 요구하던 사내는 그 가벼운 몸짓에 숨을 죽였다.

쾌활해 보이는 겉모습에 가린 군장, 발루아의 진면목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전부터 그에 대한 소문을 귀가 따갑게 들었던 데다, 이번에 몇 번 함께 전투를 치르면서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했다.

이 사내는 맹수다. 그것도 보통 사나운 게 아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이빨을 박아 넣는 흉험한 맹수.

벌써부터 그의 눈에는 짙은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 사내 역시 덩달아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축복’을 받은 후부터, 그의 피는 때때로 타오르는 불보다도 더 뜨겁게 달아오르곤 했다. 지금이 그러했고, 발루아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움직일 시간이다! 주제도 모르는 잔챙이들에게 초원 전사들의 호된 맛을 보여주자!”

적에게 하는 것인지, 아군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거친 일갈이 터졌다. 다소 늘어져 있던 전사들이 삽시간에 전투태세를 갖추고 집결했다. 그 사이 발루아는 갑옷이 아니라 조금 두꺼운 옷처럼 보이는 가죽 갑옷을 걸치고서 전마에 올라탔다.

“자, 가자! 이번에는 제대로 된 놈들이었으면 좋겠군!”

멈춰 있던 군대가 움직였다.

*

“옵니다!”

적이 진영을 빠져나온 순간 여러 군데에서 깃발이 올라갔다. 이어지는 북 소리와 그럼에도 가만히 있는 적군의 모습에 다소 느슨해져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팽팽하게 당겨졌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뛰쳐나오는 적들을 주시하면서 휘하 영주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의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무질서하군. 막무가내로 들이받겠다는 것인가?”

그의 눈에 비친 타칸 연합군의 움직임은 그렇게 보였다. 정제 되지 않은 거칠음. 그저 각자가 최대 속도로 말을 달려 앞으로만 향하는 모습. 그래서 난잡해 보이지만, 반대로 그래서 더 위험해 보였다. 흉하다고 해야 할까.

“대열을 정비하고, 후미의 기병대는 내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무조건 대기다.”

“옛!”

명령을 내리고, 그는 다가오는 적의 군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편, 군터는 휘하 병사들과 함께 군의 후미에서 대기 중이었다.

“알겠나! 군단장님의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 우리는 여기서 대기하는 거다! 앞에서 교전이 시작되더라도 말이다!”

‘먼저 견디고 돌려 치겠다는 건가.’

이 역시 정석이라면 정석이다. 어쩌면, 프롱기우스 백작은 의외로 정석에 기대는 용병가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게 다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더 크게 들기는 하지만.

투두두두둑!

두 군대가 격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로 나뉜 타칸 연합군의 일부가 베이고르군을 들이받았다. 나머지 일부는 선회하며 활을 쏘았다.

비처럼 쏟아져 내린 화살이 베이고르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대열의 일부가 무너지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방패로 화살비를 막아낼 수 있었다.

최초의 충돌 전, 세 차례의 화살 공격이 있었다. 대비를 하고 있던 베이고르군이었지만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균열을 일으키는 베이고르군의 대열을 거친 가시 같이 뻗어 나온 타칸 연합의 병사들이 찌르고 들어왔다.

와아아아!

“찔러라!”

창병과 방패병이 순서대로 나란히 섰다. 방패병이 재빨리 앞에다 방패를 대고, 창병이 뒤로 돌아가 창을 찌른다. 돌진해오는 타칸 연합의 전사들이 가시라면 방패 뒤에 숨어 쭉 뻗은 장창은 송곳이다.

히히히힝!

“으아악!”

굳게 뭉친 진형이 거센 파문을 일으켰다. 베이고르군이 뒤로 밀려나는가 싶더니 곧 자리를 잡고 버텨내기 시작했다.

“끝이 아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간격을 좁혀라! 2파가 온다!”

소란의 와중에 장교들의 목소리는 좀처럼 원하는 곳에 닿지 못했다. 어떻게 그 소리를 들은 병사들도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로 모르는 자들이 대다수였고, 소수의 나머지도 머리로는 알았더라도 급박한 상황 속에서 떠올리지 못했다.

크허어어엉!

가시를 막아냈더니 그 뒤에서 짐승이 아가리를 덤비고 달려들었다. 샛노란 안광이 경악한 병사들의 시야를 뒤덮었다. 검은 형체들이 시체를,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몸뚱이를 짓밟고 뛰어 올랐다. 그들은 뒤늦게 들어 올린 방패를 우그러뜨렸고, 내찌른 창을 박살냈다.

“방벽 유지! 30보 후퇴!”

그 와중에 빛을 발한 것은 장교들의 활약이었다. 제국군으로 따지면 십인대보다 조금 큰 규모의, 최소 단위로 쪼개어진 부대들이 각 부대 지휘관들의 명령에 따라 두려움을 이기고 뒤로 물러났다.

실로 침착한 대응이었으나, 그들이 그리 침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교들이 유능하거나 병사들이 정병들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이유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보다 큰 이유는 앞에서 죽어나가는 아군 병사들의 희생이었다. 무방비하다 싶을 정도로 처참하게 도륙을 당하는 병사들이 목숨으로써 흉포한 바르바피들의 발을 붙들어준 것이다.

‘저런 것들을 어디에 쓰려나 했더니…희생양이었던 건가?’

군터는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가뜩이나 큰 덩치에, 그가 탄 내쉬도 보통 말보다 체고가 높은 거마였기에 후미에서도 전황을 비교적 상세히 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열에서 죽어나가고 있는 베이고르군의 대다수가, 일전에 보았던 프롱기우스 백작령의 추레한 병사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병사들을 저런 식으로 내버리다니. 가차 없군.’

전술의 효용을 떠나, 개전 전부터 저런 판단을 미리 내리고 준비한 프롱기우스 백작의 심계가 놀라웠다. 저것은 명백히 대 바르바피 전술이다. 거리를 유지하며 기사로 적을 상대하는 기존 전사들과 흉포한 괴인으로 변신해서 싸우는 바르바피들은 전투 방식이 전혀 다르다.

전사들이 완만한 곡선이라면 바르바피들은 직선이다. 정면으로 달려들어서 상대를 힘으로 박살낸다. 그 파괴력은 그야말로 엄청난 수준이나, 그 흉성 때문에 복잡한 작전의 수행을 하지 못한다. 이는 수차례 그들과 격전을 치른 군터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프롱기우스의 미끼 전술은 상당히 유효할 것 같았다.

“준비하라!”

시기적절하게 명령이 떨어졌다.

‘목표는 당연히.’

“잘 들어라! 우리는 좌측으로 본군을 우회하여 바르바피들을 친다!”

후미의 기병부대는 둘로 갈렸다. 군터가 있는 쪽은 좌측. 나머지는 우측. 그들은 물러서는 본군을 우회하여 동시에 바르바피들을 치고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물러난 본군의 진군.

“가자!”

칸젤을 길게 늘어뜨리고 한 손으로는 투구를 매만졌다. 차가워야 할 쇠붙이가 어쩐지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

촤악!

대도(大刀)가 병사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를 일직선으로 갈랐다. 비명도 없이 터져나온 피가 그의 애마와 얼굴을 적셨다.

발루아는 입가에 튄 피를 혀끝으로 지웠다.

“너무 쉬운데…….”

그는 바르바피들의 한복판에 있었다. 광기를 드러내며 전투에 돌입한 괴인들의 틈에서 멀쩡히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와 그 주변의 소수 친위대는 지극히 이질적이었다.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보일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지휘에는 문제가 없다. 어디에 있든, 목에 건 뿔 나팔만 있으면 멀리 떨어진 병사들도 지휘가 가능하니까.

그러니 죽지만 않으면 된다. 목이 떨어지지만 않으면, 지휘관이 어디에 있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발루아의 생각, 아니 철학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생사다. 죽느냐 사느냐. 말단 졸개부터 우두머리에 이르기까지.

‘늘 그렇지.’

전쟁도, 전투도 마찬가지. 죽이면 승리하고 죽으면 패한다. 그야말로 폭력의 우아함이며 전쟁의 미학이다.

그렇기에 발루아는 대족장이 어딘가 꼬여버린 것 같은 모습을 보일 때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음,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니라…고백하자면 오히려 매우 기뻐했다. 그는 본래부터 힘을 사랑하는 전사였으며, 그 이상으로 폭력을 사랑하는 사내였다. 그렇기에 전투가 벌어지면 그의 자리는 항상 일선. 피로 목욕을 하며 찬바람에 열기를 식히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으아아악!”

한심하게 내지른 창을 고개만 틀어 피해내고 칼을 휘둘렀다. 둥실 떠오른 머리통을 빈손으로 쥐고 일그러진 눈을 마주보았다. 공포에 질린 눈이 인상적일 만큼 한심하다. 자유를 누리는 마지막 순간이라면 조금 더 괜찮은 얼굴을 해도 좋았을 것을.

와아아아!

“아아. 그랬군. 미끼였나.”

갑작스레, 그것도 좌우 양쪽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그는 마음속을 떠돌던 의아함을 지울 수 있었다. 너무 쉽다고 여겼건만, 아무래도 첫 교전은 미끼였던 모양이다.

‘바르바피. 이쪽의 도끼부터 가져가겠다는 거로군.’

그럴듯한, 깜찍한 생각이다.

발루아는 쥐고 있던 한심한 머리통을 내던지고 목에 건 뿔 나팔을 잡았다.

뿌우우우-! 우우우우-!

============================ 작품 후기 ============================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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