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2부
숨을 헐떡이며 진군하던 도중이었다.
타칸 연합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요새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역시 먼저 움직이는군.”
전령이 전한 급보에 프롱기우스 백작은 놀란 기색도 없이 중얼거렸다.
사실 이는 이미 예견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베이고르가 아무리 재빠르게 움직인다한들 타칸 연합의 신속한 군대 앞에서는 선수를 챙기기 어렵다. 그들의 군대는 보급도 필요 없다시피 하며, 다른 군대가 사흘은 걸려 갈 길을 하루 만에 주파한다.
게다가, 양국 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그들도 어느 정도는 낌새를 채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베이고르가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겠지.
“어디까지 밀릴 것이라고 보나.”
“적의 병력을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최선에 대한 최악을 가정해야겠지.”
“그렇다면…아무래도 빌타기림까지는 밀리지 않겠습니까?”
“꽤나 후하군. 난 최선에 대한 최악이라고 했네.”
“각하께서는 달리 보십니까?”
“글쎄.”
프롱기우스 백작은 ‘빌타기림’에서 손가락 세 마디 정도 떨어진 곳을 짚었다. 그곳에는 ‘쇼두아르’라고 쓰인 성 그림이 있었다.
“나는 적어도 이곳까지는 적이 들이닥칠 거라고 보네만.”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손가락을 한 번 짚음으로써 그전에 한 자작이 빌타기림을 언급한 것을 무척이나 낙관적인 견해로 탈바꿈시켰다.
“아무리 그래도…설마하니 그렇게까지 가겠습니까.”
“충분히. 내 보기에, 그대들은 아국의 전력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어. 그게 아니라면 저 야만인 놈들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거나.”
느릿하고 갈라진 목소리가 좌중을 뒤덮었다.
“놈들의 병력은 하나하나가 모두 용맹한 전사지. 거기에 전쟁 경험까지 풍부하다. 1차 재건전쟁 당시 제국의 군주를 물러가게 한 것은 우리가 아닌 저들임을 명심해야해. 본래대로라면 아국은 최대한 길게 놈들의 손을 붙들고 함께 가야 할 처지였네. 뜻하지 않게 행운이 따라주면서 상황이 바뀌긴 했지만, 그럼에도 놈들은 여전히 강대한 적이다. 그리고 그 강대한 적은 상당히 화가 나 있지. 모르긴 몰라도 개전 초기, 그들의 기세는 분명 예상하는 것 이상일 것이다.”
프롱기우스 백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 타칸 연합의 군대가 움직였다는 보고가 당도한 후로,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전령들이 꼬리를 물고 도착했다.
“보고! 적군이 카곤을 함락시켰습니다!”
“보고! 적군이 라이웨를 돌파!”
“보고 드립니다! 적군이 발타기림을…….”
이틀.
일전의 회의에서 한 자작이 했던 말이 굉장히 낙관적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데 딱 이틀이 걸렸다. 보고를 듣는 이들의 안색이 붉다 못해 하얗게 질린 것은 당연했다.
“말도 안 되는! 요새며 성을 지키는 놈들은 모두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을 했다더냐! 그게 아니라면 어찌 이리 빨리 무너질 수가 있는가!”
“화를 낸다고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네. 그리고 국경 수비대 정도면 아국의 정예라 할 수 있는데…설마 싸워보지도 않고 백기를 들었겠는가. 그건 그들에 대한 모욕이지.”
“끄응! 송구합니다.”
“서둘러야 할 이유가 생겼군.”
잠자코 있던 막시밀리언이 나섰다.
“허나 각하. 여기서 더 속도를 높인다면 낙오하는 자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병사들의 피로가…….”
“그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네. 바쁘게 달려가서 바로 놈들과 싸우지는 않을 것이니.”
“예?”
“자네 말대로 다 지친 병사들을 데리고 놈들과 싸워 무엇 하겠나. 하지만.”
프롱기우스 백작의 시선이 다시 지도로 향했다.
“아무리 놈들이 강군이라고 해도 하루에 성벽 하나씩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상식 밖이지. 즉,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은 놈들도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놈들의 기세도 계속 이어질 수는 없어. 한 번쯤은 숨을 돌리려 할 것이다.”
“그 시기를 언제로 보십니까?”
“이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나. 쇼두아르. 이곳까지 넘거나, 아니면 앞에 두고서 놈들은 휴식을 취하겠지. 그러니 우리도 그에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어. 최대한 서둘러서 놈들을 시야에 두고, 지친 놈들이 숨을 고를 때 우리도 마찬가지로 숨을 고른다.”
막시밀리언은 표정을 숨기며 고개 숙였다.
‘묘한 자로군.’
프롱기우스의 용병(用兵)은 뭐랄까, 깔끔했다. 명확하다고 해야 할까? 길게 끄는 것이 없이 무엇을 할지를 분명하게 제시했다. 간혹 제장들에게서 반론 같은 말이 흘러나와도 주저함 없이 받아쳤다.
그렇다. 그에게는 주저함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계획, 판단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막시밀리언은 의아했다. 프롱기우스 백작이 확신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그의 확신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궁금했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 4군단의 군단장이며, 백작이다. 일개 남작에 불과한 그가 상관의 결정에 토를 다는 것은, 자칫 밉보일 수도 있는 모험이다. 게다가 그런 모험을 한다고 해서 프롱기우스 백작이 생각을 바꿀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어찌 되었든 현재까지 그의 판단은 제법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최대한 병사들을 독려하도록 하게. 뭐 하면 본보기를 보이는 것도 좋겠지.”
“예.”
그야말로 땀과 피가 흐르는 고난의 진군이 시작 되었다. 병사들은 시시각각 지쳐갔다. 이를 악 물다 못해 울먹거리는 자들도 심심찮게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발을 멈추면 가차 없는 응징이 날아든다는 것을 알기에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안간힘을 쓰며 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지독하다 못해 악랄하군요. 이러다가는 적하고 만나기도 전에 지쳐서 쓰러지겠습니다.”
할렌의 말은 ‘군터 부대’에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뒤편에 길게 늘어진 보병 대열을 향하고 있었다. 창을 지팡이처럼 짚고, 과장 좀 보태어 시체가 되기 일보직전인 것 같은 자들 말이다.
“시간이 급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않느냐.”
“그래도 이건 좀……. 만약 이렇게 움직이다가 예상이 빗나가서 적이라도 만나면 어찌 합니까?”
적은 어차피 만나게 되어 있다. 할렌의 말은 마주친 타칸 연합의 군대가 혹여 지쳐있지 않거나, 아니면 만나야 할 곳이 아닌 더 이른 지점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니냐는 뜻이다. 즉, 군단장의 판단이 틀렸으면 어찌하느냐는 것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다. 지금과 같은, 무장해제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적과 조우하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보병은 전투불능이고, 기병들만이 어떻게든 적에게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희망적인 전투가 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전장에 나선 군인에게,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은 필요 없다. 심력과 시간 낭비일 뿐.”
“알고 있습니다만…걱정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군요. 이러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것은 아닌지.”
결과적으로, 할렌의 걱정은 쓸 데 없는 것이 되었다. 적들은 폐허가 된 쇼두아르 부근에서 푹 쉬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인 정찰대 중에 하나가 전한 소식이었다.
“쇼두아르는?”
“성벽이 무너졌고, 연기가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인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설마하니…….”
누군가 불길한 추측을 중얼거리다 도로 삼켰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곧 명령을 내렸다.
“오늘은 이곳에서 쉰다. 보병들은 진채를 꾸리고, 기병 2천은 나를 따라 움직일 것이다.”
“적을 살펴보려 하십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놈들을 발견한 것처럼, 놈들도 우리를 발견했겠지. 서투른 짓을 하지 못하도록 적당히 눈도장은 찍어줘야 하지 않겠나.”
프롱기우스 백작은 진채를 꾸리게 하면서도 그나마 상태가 좋은 병사들을 바깥으로 빼냈다. 그리고 역시 상태가 좋은 기병들을 이끌고서 적이 주둔해 있다는 방향으로 향했다.
군터는 막시밀리언과 함께 프롱기우스 백작을 따라 움직였다.
얼마 가지 않아 저 멀리 언덕 위에 몇 기의 기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깃발을 들지 않은 그들은 외관에서부터 명백히 타칸 연합의 전사들로 보였다.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겠군요.”
군터가 작게 중얼거렸다. 막시밀리언은 대답이 없었다.
언덕 위의 기병들이 말머리를 돌려 사라지고, 그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처음 타칸 연합의 전사들, 아마도 정찰병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있던 언덕으로 올라가자 주변 지형이 환히 보였다.
‘저기로군.’
다른 자들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고개를 두리번거렸으나, 군터는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그의 기준으로도 꽤나 멀찍이 떨어져 있는 분지에 아주 작게 모여 있는 검은 점들. 그것은 분명 대군의 형상이었다.
“찾았나?”
“예.”
“어디지?”
막시밀리언은 고개 한 번 갸웃거리지 않고 군터에게 물었다. 그는 군터가 지닌, 맹금도 울고 갈 시야를 잘 알고 있었다.
“저쪽의 분지입니다.”
“헤아릴 수 있겠나?”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못해도 1만은 넘겠군요.”
“그야 당연하겠지.”
“…각하.”
그리 크지 않은 둘 만의 대화였는데, 프롱기우스 백작은 어떻게 들었는지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흥미 담긴 그의 시선이 군터를 향했다.
“보이는가? 눈이 좋군. 아니, 단순히 좋다는 말로는 부족하겠어.”
“보잘 것 없는 재주입니다.”
“그 겸손은 자네 주인에게서 배운 것인가? 주종이 나란히 재미없을 정도로 훈훈하군.”
“…….”
“그래. 어떤가? 적들은 뭉쳐 있나? 어떻게 포진해 있지? 정찰병들이 돌아가는 것이 보이는가?”
어떻게 이 먼 거리에서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것을 찾아내느냐, 의심 섞인 한 마디 정도는 던져볼 법도 하건만 프롱기우스 백작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군터의 말을 믿는 다는 듯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의 믿음에 부합하기 위해 군터는 보이는 모든 것들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때때로 고개를 꺾기도 하고, 끄덕이기도 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사이 병력에 섞여 따라온 영주들 및 고위 장교들의 시선은 군터와 프롱기우스 백작에게 고정 되었다.
“신중하군. 아니, 대범한 건가? 아무튼 잘 됐어. 시작부터 피차간에 피곤해질 일은 없게 됐군.”
“각하.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군터는 프롱기우스가 상당히, 아니 굉장히 특이한 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능력이 어떻고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사람 자체는 이제껏 겪어본 적이 없는 특별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해야 할까?
“목적은 달성했다. 이만 돌아가지.”
“옛? 적이 뒤를 쫓기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다. 우리가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놈들은 움직이지 않아. 적장은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놈이다. 그런 면에서는 나와도 비슷하군.”
‘대체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군.’
머리가 아니라 속이 답답해졌다. 혹시나 싶어 슬쩍 옆을 보았지만 막시밀리언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프롱기우스 백작과는 다른 의미에서, 역시나 그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사내다.
“돌아간다! 전투는 내일부터다!”
‘또 다시 근거 없는 말을.’
군터는 이제 저 왜소한 군단장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얼마 전에 할렌에게 해줬던 말을 자신에게 적용할 순간이 온 듯했다.
============================ 작품 후기 ============================
늦었습니다. 잠깐 볼 일 좀 보느라 12시 땡 한 것도 몰랐네요. 오늘도 함께 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