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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식사 약속을 하루 전에, 그것도 밤늦은 시간에 전한 것이 조금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영주 부인이 말을 꺼낸 것은 이틀 전이었다. 벨리사가 혼자 끙끙 앓면서 고민을 하다가 전날 밤에야 이야기를 꺼냈을 뿐.
‘그 여자도 곤란하겠군.’
벨리사는 야밤에 하인을 시켜 영주 부인에게 서신을 전했다. 잠들기 전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서야 점심에 약속이 잡혔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어느 쪽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영주 부인은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약속 장소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 장소가 의외였다. 영주 관저 옆에 붙은 별채에서 보게 될 줄 알았는데 그녀가 택한 곳은 시내에 있는 고급 식당이었다. 고관이나 부유한 상인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회원제 식당이었다. 군터도 초대를 받아 몇 번인가 그곳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아아. 그렇군.’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생각을 더 해보니 무슨 의도로 그런 곳에 약속을 잡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요컨대 제대로 이용하겠다는 뜻이리라. 소수가 이용하는 회원제 식당이라고는 해도 소문이 안 퍼질 수는 없다. 더군다나 영주 부인과 영지의 기사 정도 되는 위치라면 어디에 가더라도 무성한 소문을 피워내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아마, 만에 하나 조용하다고 해도 영주 부인 쪽에서 알아서 움직여 이야기를 퍼뜨릴 것이다. 그걸 위한 자리니까 말이다.
‘알면서도 당해주는 건가.’
묘한 기분이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벨리사의 밝은 모습을 보고 풀어졌다가, 또 영주 부인의 얼굴을 떠올리면 슬슬 약이 올랐다. 그나마 화가 아니라 ‘약’이 오른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식사 자리에 가서, 벨리사를 옆에 둔 채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하루가 지났다고 노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에게도, 벨리사에게도, 그리고 영주 부인에게도.
“모시겠습니다.”
군터와 벨리사는 마차에 함께 탔다. 살라스가 길을 이끌고 열 명 남짓한 병사들이 마차 주변을 호위했다.
“마차는 영 익숙하지가 않아.”
“저도 그래요.”
“당신은 익숙해져야지 않나.”
농담을 섞은 핀잔에 벨리사는 베시시 웃었다.
“몸은 익숙해졌어요. 그런데 마음은 여전히.”
“느리군. 보통 사람은 싫은 것에는 몰라도 좋은 것에는 금방 익숙해지는 법인데 말이야.”
“모르겠어요. 저는 아직도 직접 걸어 다니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지네요. 아! 따라붙는 사람들 없이.”
“그건 곤란해.”
“알고 있어요.”
“…내가 없는 동안, 살라스의 말을 잘 따르도록 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이제 군인의 아내로 있는 게 익숙하니까.”
“미안해.”
“미안할 것 없어요. 그리고…저도 미안해요. 영주 부인의 부탁, 아무래도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당신이야말로 미안할 것 없어. 그저 식사 한 끼 같이 하는 것뿐인데.”
그 식사 한 끼가 그냥 한 끼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다. 그래서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것이고.
“장주님. 도착했습니다.”
밖에서 들려온 살라스의 목소리. 군터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착 말고 마차가 멈출 이유가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식당은 조용했다. 식사 시간이니 조금은 붐빌 법도 한데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군터 경. 부인. 영주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말끔한 인상의 중년인이 그를 맞이했다. 몇 번 본 적 없는 얼굴이라 군터는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리에론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은 생각이 났다.
그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는데 병사들이 식당 곳곳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몇 번 모퉁이를 돌아서자 큼직한 문이 보였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문을 열었고, 그러자 안쪽 깊숙한 곳에 큼직한 탁자가 보였다. 그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도.
탁!
문이 닫혔다.
“영주 부인을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사석에서 이렇게 따로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맞나요?”
“그런 것 같군요.”
“편히 앉으세요. 군터 경도. 부인도.”
길쭉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앉았다. 보통 의자를 두 개 반 정도 이어 붙여 놓은 것 같은 큼지막한 의자에 군터가 앉았고, 벨리사는 그 옆에 있는 평범한 크기의 의자에 다소곳이 자리했다.
“부인께 부탁을 하고서도 실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이렇게 자리를 갖게 되니 기쁘군요.”
“아내의 부탁인데, 식사 한 번 같이 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뱀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듯 하는 말을 군터는 칼 같이 끊었다. 그는 내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어디까지나 아내의 부탁 때문이고, 이 자리는 단순한 식사 자리라고 못을 박았다. 그런 그의 뜻을 읽어냈는지,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흐릿하게 웃었다.
“부인을 많이 아끼시는군요.”
“내가 택한 아내이니, 당연히.”
벨리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에 반해 군터는 담담히 맞은편의 여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흔치 않은 사내이시군요. 군터 경. 부인께서 부군의 칭찬을 그렇게 늘어놓으신 이유를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부인. 부끄럽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아아. 미안합니다. 두 분의 사이가 부러워서 나도 모르게 짓궂은 말을 해버렸군요.”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군터는 그녀를 물끄러미 살폈다. 한숨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얼굴에 깔린 그늘만큼은 진짜인 것 같았다.
‘딱하긴 하군.’
벨리사는 그녀가 가엾다고 했다. 군터도 일부 동의했다.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을 리에론 가문의 여식은 시집을 온 낯선 땅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몰락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더 없을 비극이었다.
모든 이들이 그녀의 어려움을 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손을 내미는 자가 없다. 그녀가 내미는 손을 잡아줄 자 또한 없다. 모든 힘을 독점한 그녀의 남편조차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이를 주지 않는 신에게 원망의, 혹은 애원의 기도를 올리는 일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벨리사는 하나뿐인 자신의 편, 혹은 친구였으리라. 그녀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
군터는 알고 있었다. 벨리사가 카트리나 코누디스와 어울리는 것을 두고 여러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다는 것을. 그 수군거림에 종종 자신의 이름까지 덩달아 오르내린다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벨리사를 제지하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 여인들끼리 사사로이 친분을 다지는 것을 굳이 나서서 말린다는 것이 우습고 꼴사납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딱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계속 신경 쓰지 않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선을 넘었다. 스스로의 절박한 상황 때문이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사정일 뿐.
“배가 고프군요. 음식은 아직입니까?”
“아, 그렇군. 반가운 마음에 잠깐 잊고 있었습니다. 바로 들이라 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식당의 종업원들이 하나씩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입구에서 병사들이 몸수색 및 음식을 검사 하느라 들어오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별채에서 자리를 갖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군터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툭 던졌다. 그 속에 숨은 가벼운 힐난을 못 읽어낼 카트리나 코누디스가 아니었다. 그녀는 쓰게 웃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제게 미안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아내에게 미안해 하셔야겠지요.”
벨리사가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부인께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인의 호의를 삿되게 이용한 셈이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저로 인해 더 곤란해지실 분이 군터 경이니 경께도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요.”
“곤란해질 것은 없습니다. 말씀드렸듯, 고작 식사 자리 한 번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리 생각지 않을 겁니다.”
“다른 자들의 가벼운 입 따위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가 아니라면 아닌 것입니다.”
“영주께도 그리 이야기하실 수 있겠습니까?”
“…….”
군터는 막 들어 고기 한 점을 찌른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라앉은 시선을 맞은편에 던졌다.
“영주님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섬겼습니다. 제가 영주님을 아는 이상으로, 영주님께서는 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습니까. 그 또한 부럽군요.”
“…….”
슬쩍 한 번 따지듯 말했다가 한탄을 듣게 되니 사납게 굴 마음마저 꺾여버렸다. 군터는 슬쩍 벨리사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는 맞은편의 여인만큼이나 울적해 보였다. 또 한 번 마음이 꺾였다.
‘그저 식사 자리 한 번이라고 해놓고, 정작 내가 그리 생각하지 않고 있는가.’
정말 그리 생각했다면 맞은편의 여인을 대범하게 대하면 됐을 일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어떤가. 자그마한 손해에 민감해하는 꼴이 꼭 장사치 같지 않은가.
“이곳은…예전에도 몇 번 와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음식 맛이 괜찮다 생각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간만에 다시 오게 되었군요. 당장 바쁜 일이 다 끝나고 나면…아내와 종종 들러야겠습니다.”
마음을 가볍게 하고 말을 길게 이어서 냈다. 어색했지만 그런 가벼운 말 몇 마디에 경직 되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렸다. 한 번 분위기가 풀어지자 그 다음부터는 그가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었다. 카트리나 코누디스와 벨리사가 대화를 주도했고, 그는 간간이 맞장구만 쳐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속으로야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즐겁고 만족스러운 듯했다.
군터는 조용히 그런 분위기에 편승했다. 그녀가 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이번의 일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
“…최선을 다해 명을 따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살라스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군터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내가 없을 때, 믿고 맡길 만한 녀석이 너밖에 없다. 아쉬운 마음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살라스가 체념한 것 같은 목소리로 “예”하고 답했다.
그것으로 됐다. 당장은 힘이 빠지겠지만, 살라스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곧 기운을 차리고 언제나 그랬듯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병사들의 준비는?”
“당장 오늘 출진한다고 해도 문제없습니다.”
“신병들은?”
“아직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따라갈 수야 있겠습니다만…….”
“부족한 것은 실전에서 채우면 된다.”
군터는 살라스의 우려를 일축했다. 위글로우에 두고 갈 병력은 이미 정한 그였다. 그는 조그마한 불안요소도 남기고 갈 생각이 없었다.
“왕도의 힘 있는 자들이 알아서 잘 조치를 취했겠지만, 혹 본다인이 움직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리바스트라나…브록스일 수도 있겠지. 살라스. 잘 알고 있겠지만, 가족들을 부탁한다.”
“염려 마십시오. 제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마님과 아기씨들을 지키겠습니다.”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부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할렌도 믿음직스럽기는 하지만, 아직은 조금 불안한 감이 있다. 매사에 진중하고 침착한 살라스는 어떤 면에서는 수하임에도 의지가 되곤 한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안위에 대한 안배까지 끝내고 나니 비로소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마침내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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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스가 뭔가 보모처럼 느껴지는 건...착각일 겁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