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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56화 (256/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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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한 인형(人形)이 어둠에 잠긴 땅을 걸었다. 흐릿한 달빛이 내려와 그를 비췄지만 드러나는 것은 없었다. 검고 짙은 안개가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달빛조차 그를 투과하지 못했다.

그것은 미로를 지나고, 절벽을 건너 적막한 골짜기에 당도했다. 그리고 거대한 돌 앞에 섰다.

인형의 존재는 왕을 깨웠다. 깨어난 왕은 그의 앞에 선 인형, 그 너머에 자리한 자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군.]

[그대도 그런 말을 쓰는가. 색다른 느낌이야.]

[자유롭지 못하게 눌려 있으니 그렇게 되더군. 시간이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지. 기준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인간들처럼 조급함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

[딱하다고 해야 하나.]

[내가 자초한 일이다. 그보다 무슨 일이지? 또 다시 막으려 하는가.]

[아니.]

[어째서지?]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군. 그렇다면 왜 이곳까지 인형을 보낸 건가.]

[확인하기 위해서.]

[확인? 무엇을 말인가.]

[요정의 왕이여. 그대도 알고 있겠지. 이질적인 신이 일어났다.]

[멀리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는가.]

[인간의 세계는 그대의 생각보다 더 깊고 넓다네. 내 귀로 듣지 않아도 결국 들리게 되지]

[그렇군. 그래서, 그 이질적인 신이 그대를 자극했나?]

[흥미가 생기더군. 사실 나는 그대가 관계되어 있지 않은가 생각했었는데,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군.]

[내 꼴을 보고서도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요정의 왕은 오랜 세월 동안 계약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 감수하기로 마음먹고 받아들인 일이지만 반쯤 봉인 되어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은 그로서도 견디기 힘든 고난이었다. 때문에 받아치는 말 속에 그의 감정이 요동쳤다.

[날 탓하지 마시게. 어디까지나 거래였다. 나나 그대나, 각자의 사정에 따라 얽혔을 뿐이야. 나의 선택이었고, 그대의 선택이었지. 혹시 그대는 그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는가?]

[아니. 모두를 위한 결정이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참된 왕이로군. 헌신적이야.]

[확인은 끝난 건가? 그렇다면 이만 돌아가라. 인형이라 할지라도, 그대와 마주하는 것은 거북하니.]

[짙은 분노가 느껴지는군. 이런 감정의 동요라니. 요정왕답지 않군.]

[나다운 것이 무엇인가. 나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가? 끝없는 탐구를 추구한다는 자가 오만하군.]

[이전에 직접 대면했던 그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변하지 않았으나, 내 그릇이 노여움을 머금는다.]

[흠. 그렇군. 그릇이 껍데기만은 아니라는 건가. 내용물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흥미롭군.]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정말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군.]

[한 번 어그러뜨렸다. 뒤늦게나마 만회할 기회가 생겼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길 바라네.]

[탐구자여. 그대는 날 막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단지 확인하고자 여기까지 인형을 보냈는가?]

[그럴 리 없지. 난 비효율도, 낭비도 좋아하지 않아.]

[그렇다면, 역시 관여할 셈인가.]

[알려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그저 과거의 거래로 묶여있을 뿐이니.]

[나의 껍질이, 그대의 인형을 불살라버리고 싶다 말하는군.]

[하하하.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지 않은가. 나는 제국이고, 내 인형도 역시 제국이지. 그리고 우리의 거래는 아직 유효하네.]

[서로의 용건은 끝났다. 이제 떠나라. 이 땅은 그대를 반기지 않는다.]

[그러지.]

인형이 휙 돌아섰다. 기척 하나 없던 땅에는 어느새 수백 명의 요정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다. 인형을 향한 그들의 서늘한 시선이 칼날처럼 꽂혔다.

[아직까지도 거래는 유효하다. 길을 열어라.]

왕의 한 마디가 떨어지자 요정들은 바람처럼 좌우로 움직여 길을 텄다. 인형은 그가 이곳에 왔을 때처럼 빠르고 고요하게 요정들의 땅을 빠져나갔다.

*

전사장 콰이렌은 거대한 움막 앞에서 잠깐 숨을 골랐다.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이런 습관이 생겼다. 아마도 그건 우러러보기만 했던 대족장이 어려워지고, 두려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대족장.”

[무슨 일이냐.]

“베이고르의 사신이 당도했습니다.”

[또 다시 서신을 가져왔느냐.]

“예.”

[놈의 목을 베어라.]

“옛?”

절로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사신의 목을 베라고? 그것도 동맹인 베이고르의 사신을?

“대족장! 어째서 그런! 동맹의 사신이 아닙니까? 아무리 못마땅하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콰이렌은 이를 악 물고 땅에 두 무릎을 찍었다. 바짝 엎드려 용서를 구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일전에 대족장께서 이르시길, 베이고르의 쓸모는 길게 이어질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충분히 길었다. 이제 놈들의 쓸모는 다했다. 무엇보다, 은혜도 모르는 놈들이 내게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느냐. 콰이렌. 당장 가서 놈의 목을 베어와라. 명령이다.]

콰이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의 이마에 맺힌 핏방울과, 움막의 가림막을 날려버렸다.

“…….”

높게 쌓인 짐승의 가죽위에 빛나는, 짙은 자주색 안광이 눈을 멀게 할 듯 강렬하게 빛났다. 콰이렌은 감히 그 앞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질끈 눈을 감으며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전사시여. 저는…당신처럼은 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돌아서며 탄식했다. 걸어가며 칼을 뽑았다. 어찌 되었느냐고 묻는 전사들에게 한 마디 대꾸도 없이, 그는 성큼성큼 사신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째서 대족장께로 안내해주지 않는 거요?”라 말하는, 얼굴을 몇 번 익힌 사신의 목을 베었다.

한 번의 번뜩임 후 목이 잘리며 피가 솟았고, 나머지 사신단의 관리들이 비명을 질렀다. 콰이렌은 그들도 순식간에 마저 베었다.

“전사장! 이게 무슨…….”

전사들이 대경하여 달려왔다.

“닥쳐라!”

콰이렌은 도리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피를 보았기 때문일까, 짙푸른 안광이 살기까지 머금고 번뜩였다.

“베이고르 놈들이 같은 말을 돌려 하며 대족장과 우리를 능멸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참다못해 역도들의 목을 보내라 했더니 놈들은 이번에도 말장난만 가득한 종이 쪼가리로 우리를 기만하려 들었다! 여기서 더 이상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전사들은 살기등등한 콰이렌에게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그들은 말끝을 흐렸고, 콰이렌은 신경질적으로 칼을 내팽개치며 돌아섰다.

‘이제는…정말 돌이킬 수 없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까지 다다랐을 때, 콰이렌의 눈은 음울함을 머금었다. 그는 곧 다가올 미래를 직감했다.

‘대전사시여. 당신께서 떠나신 이후부터였습니다. 감히 이런 마음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당신이 조금은 원망스럽군요.’

소리 없는 한숨이 바람에 스며들었다. 우울한 하늘이 그의 마음을 비치는 거울과 같았다.

*

사신이 죽었다.

“이런 모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제 타칸 연합은 우리의 동맹이 아니다!”

베이고르 왕. 주앙 칼 고르는 왕도에서 선언했다. 그는 모든 영주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각지에서 군대가 꾸려졌고, 집결지를 향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전쟁이 벌어진다.

이제는 왕국의 모든 이들이 다 알았다. 국경에 인접한 지역에서는 벌써부터 피난민들이 속출했다. 해당 영지의 영주들이 단속을 했지만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백성들은 헐거운 그물망을 잘도 피해나갔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말도 아니군.”

코누다이안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아니, 그나마 정도가 아니라 왕국 전체를 놓고 봐도 손에 꼽을 만큼 안정적이었다. 전선에서 거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타칸 연합을 피해 도망친다면 국경을 넘지 않는 이상 다다를 수 있는 종착지 중에 하나가 바로 코누다이안이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출정명령을 기다리며, 군터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휘하 병력들의 준비는 이미 끝내놓은 상태였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내인 벨리사와 두 아이, 보리스와 실비아뿐이었다.

평소에도 거의 빠지는 일 없이 매일 있던 가족식사 자리가 새삼 귀중하게 느껴졌다. 군터는 가족들에게 먼저 말을 걸려고 노력했다. 형편없는 말솜씨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기에 마음만 앞서서 횡설수설했지만, 가족들은 그의 중구난방인 말에도 곧잘 응해주었다. 그렇게 한 마디 말이라도 더 나누며, 군터는 마음속에 자꾸만 쌓이는 미련을 덜어낼 수 있었다.

“저…당신. 내일 점심에 시간 괜찮아요?”

잠자리에 들기 전. 벨리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음? 괜찮은데. 무슨 일 있나?”

“그게.”

벨리사가 말을 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군터는 그런 그녀를 차분히 기다렸다.

“우리…영주 부인과 식사 자리 한 번 갖는 게 어때요?”

“뭐?”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요즘 영주 부인께서 힘든 상황에 놓이신 거. 그래서…….”

같이 식사 자리라도 가져서 영주 부인의 존재감을 조금이라도 올려주자는 이야기다. 군터 경이 아내와 함께 영주 부인과 자리를 가졌다는 소문이 돌면 사람들은 군터 경이 영주 부인에게 힘을 실어준다고 생각할 테니까.

“으음.”

솔직히, 별로 내키지 않았다.

“당신 생각인가?”

“예?”

“영주 부인의 생각이군. 그녀가 당신에게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나?”

벨리사는 답하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할 뿐.

“당신이 영주 부인을 좋게 생각한다는 걸 알아. 그래서 당신이 그녀와 만나는 것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부정적인 말이 나올 것을 직감한 벨리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덩달아 군터의 마음도 불편해졌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영주 부인과는 되도록 얽히지 않는 게 좋아. 영주님의 마음은…이미 그녀를 떠난 것 같으니까.”

애초에 정략혼으로 맺어진 사이이기에 무슨 특별한 마음이 있었을까마는, 영주 부인이 수 년 째 아이를 갖지 못하면서 필요에 의해 엮인 관계마저 금이 갈대로 간 상태였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어떻게 필요에 의해서 왔다 갔다 할 수가 있겠어요. 영주 부인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그래서 그 분의 처지가 더 안타까운 거고…….”

‘끄응.’

군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벨리사의 모습에 속이 다 답답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녀의 말에 가슴 한 쪽이 뜨끔하기도 했다.

‘필요에 의해 왔다 갔다 할 수 없다고. 맞는 말이지.’

마음이라는 것은 수중의 물건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건 마음이 아니리라.

‘보기 싫군.’

우울한 얼굴의 아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는 항상 웃어주었으면 했다.

“그래. 알았어.”

“네?”

“간단하게 식사나 하지. 장소는 그녀가 정하나?”

벨리사는 기뻐하지 않았다. 그녀는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억지를 부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고작 식사 자리 한 번이야. 그게 뭐 어려울까.”

대수롭지 않은 척 웃어넘겼다. 연기가 제법 그럴 듯했는지 그제야 벨리사가 환히 웃었다. 군터의 마음도 덩달아 개었다.

============================ 작품 후기 ============================

혹시 했지만 역시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확실히 그간의 비중이 공기였으니...

그나저나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황제의 팬(?)분도 계시다니...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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