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255화 (255/1,064)

<-- 2부 -->

“그래서…그 맹우란 게 뭐지?”

“죄송합니다. 맹우라기보다는 동맹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요. 무엇이 되었든, 이제는 의미 없어진 말이지만.”

미겔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막시밀리언은 그 비웃음이 뭘 향한 것인지 묻지 않았다.

“영주님께서는 혹 요정들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요정? 이야기 속에 나오는…그 신비한 종족 같은 걸 이야기하는 건가?”

“예. 맞습니다.”

“왜 갑자기 현실의 이야기가 동화 속으로 빠져드는 거지?”

“동화가 아닙니다. 실제로 요정들은 존재합니다. 또한 그들은 베이고르의 동맹이었습니다. 100년도 더 전까지는 말입니다.”

“…….”

막시밀리언은 잠시 턱을 어루만졌다. 그는 지금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영주님께서 모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이는 확실히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아니지요. 허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요정들은 그들의 은밀한 삶을 대가로 베이고르의 왕실과 약조, 아니 계약을 맺었습니다. 베이고르가 그들의 평온한 삶을 보장해주는 대신, 언젠가 왕실에 위기가 도래했을 때 그들의 힘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계약의 내용이었지요.”

막시밀리언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지. 하지만 베이고르는 이미 한 번 멸망당하지 않았나. 그건 왕실의 위기가 아니라 베이고르의 위기였던가?”

제국이 베이고르를 정벌하던 당시의 이야기는 자세히 전해 내려오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비밀로 묻히 것도 아니었다. 막시밀리언이 아는 한, 베이고르 정복 전쟁 당시 요정들이 참전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당시 요정들은 계약대로 베이고르를 구원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요. 그게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추측키로는 제국과 어떤 협상을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왜냐하면 요정들은 제국의 치세가 이뤄지던 동안에도 그들의 땅에서 아무런 탈 없이 잘 지내왔기 때문입니다.”

“그 말인즉.”

“예. 그들은 아직도 이 땅에 존재합니다. 수백 년 전부터 지내온 그들의 고향에.”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미겔도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단지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아냐는 막시밀리언의 질문에

“저는 어렸을 적에 요정들의 땅에서 자랐습니다.”라고 답했을 뿐.

*

안개가 짙게 깔린 숲.

그 흔한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한 땅을 일단의 무리가 걷고 있다.

“어쩐지…아까부터 헤매고 있는 느낌입니다. 착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착각이 아니다. 확실히…우리는 조금 전부터 같은 곳을 헤매고 있다.”

베이고르의 자작. 시세로 하이윈즈는 두터운 갈색 나무를 손으로 쓸었다. 거칠한 감촉 사이에 움푹 파인 상처 자국은 조금 전 그가 단도를 그어 낸 것이었다.

“이백 마흔 두 걸음 만에 같은 곳으로 돌아왔군.”

“옛?”

“아무래도 우리는 이 조용한 미로에 갇혀버린 모양이다.”

“미, 미로라니요? 어떻게…….”

“그들이 그 긴 세월 동안 어찌 세상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그는 당황하는 무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을.”

“예? 아, 옛.”

“모두 주변에서 물러나라.”

그의 지시에 검을 내준 무관을 비롯해 일행이 멀찍이 뒤로 빠졌다. 그러자 하이윈즈 자작은 무관의 검으로 땅을 긁기 시작했다. 그는 제국의 문자도, 망국 당시부터 쓰이지 않게 된 옛 베이고르의 문자도 아닌 묘한 문자를 써내려갔다.

길지는 않았다. 모든 글자는 큼직하게 쓰였고, 그렇게 단 세 줄이었다. 마지막 한 글자까지 쓴 하이윈즈 자작은 마지막 글자 옆에다 품속에서 꺼낸 자그마한 깃발 하나를 내려놓았다. 베이고르 왕실의 문장이었다.

푹!

미세한 바람에 너풀거리던 깃발이 칼에 찔려 땅에 고정 되었다.

“불경을 용서하소서.”

왕실의 문장을 손상시킨다는 것은 대역죄에 버금가는, 용서 받지 못할 불경이다. 미리 허락을 받았음에도 하이윈즈 자작은 마음 한 구석에 돌덩이가 얹힌 것 같았다.

“가자.”

“괜찮겠습니까?”

그는 높이 자란 나무들을 올려 보았다. 고개를 한참 뒤로 꺾어야 볼 수 있는 끄트머리 가지 위로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그 하늘조차 거짓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으득!

입가에 서늘한 조소가 어렸다. 하이윈즈 자작은 이를 갈며 발걸음을 옮겼다.

‘역겨운 배신자들.’

그들은 다시 이백 스무 걸음을 걸었다.

문장을 고정한 검. 상처 입은 땅 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대략적인 형체라고 할까? 생긴 구조는 사람과 같았다. 작은 머리와 두 팔, 두 다리.

그러나 그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외의 것들이 인간과는 확연한 차이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상대를 해주시는군. 베이고르의 자작, 시세로 하이윈즈라 하오. 아국의 오래 된 동맹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왔소. 그대들의 왕께 안내해주길 바라오.”

당당함을 잃지 않으며, 하이윈즈 자작은 눈으로 상대를 아래서부터 훑어 올라갔다.

그들은 넷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큰 키. 체구가 큰 무관들보다도 머리 두 개는 더 큰,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거인이라고 할 만한 키다.

체구도 그에 못지않다. 우락부락한 몸은 아니지만, 딱 보기에도 단단해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전사의 몸이다.

[베이고르는 멸망당했다고 들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 명의 시선은 모두 그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모두 같아 보여 순간 섬뜩함이 일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뜻이 이해가 된다. 직접 겪어보니 신기하군.’

요정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리가 아닌 뜻을 전한다. 그것이 그들의 소통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겪으니 느낌이 색달랐다.

“그랬었지. 그러나 아국은 다시 일어섰소.”

[안내하겠다. 하지만 함께 가는 것은 그대 혼자다.]

“그건 그대의 뜻이오, 왕의 뜻이오?”

[왕께서 그리하길 원하신다.]

“그렇다면 따르리다.”

하이윈즈 자작은 그의 일행을 대기시켰다. 그리고 안내자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일행과 함께 헤맬 때는 그렇게 걷고 걸어도 열리지 않던 길이, 안내자와 함께 하니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풍경이 바뀌었다. 백 걸음도 걷지 않아 지긋지긋하던 숲이 사라지고 황량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광활한 회색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 아니…산인가?’

풀 한 포기 없는 돌바닥. 완만하게 경사가 져 있는 곳을 천천히 오르다보니 어느새 그들은 절벽을 앞에 두었다. 슬쩍 내려다보니 절로 뒷걸음질이 쳐지는, 끝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바닥이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했다.

[여기까지다. 홀로 건너라. 너머에 또 다른 안내자가 기다리고 있다.]

“친절하시군. 고맙소.”

안내자가 돌아섰다. 홀로 남은 하이윈즈 자작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앞을 보았다.

가파른 절벽 한 가운데에 다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발을 댄 땅과 같은 회색의 다리. 마치 땅에서부터 뻗어나간 가지 같은 모양새의 다리는 왜인지 모르게 고풍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

다리의 앞에 서서,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들어 다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추측키로, 시간이 제법 흘렀다. 얼마나 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한 걸음’을 중얼거렸다. 앞만 보고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그는 땀을 식히지 않고 계속 발을 뗄 수 있었다.

[따라와라.]

간신히 다리를 다 건넌 그에게 이전의 안내자와 ‘똑같이’ 생긴 안내자가 말을 건넸다. 하이윈즈 자작은 불평할 틈도 없이 다시 쇳덩이 같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움직여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오래 걷지는 않았다.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골짜기 같은 곳에 당도했고, 안내자는 거기서 걸음을 멈췄다.

[기다려라.]

“…….”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하이윈즈 자작은 우두커니 선 안내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기묘하군.’

쥐 죽은 듯 고요한 것이야 숲(이제는 그곳이 정말로 숲이었는지도 의심스러웠지만)에서부터 줄곧 마찬가지였으니 제한다고 해도, 지금 이곳은 굉장히 묘했다.

‘비석인가?’

공터 같았다. 그런데 곳곳에 큼지막한 돌들이 박혀 있었다. 평범한 돌처럼 생긴 것들도 있었지만 인위적으로 손을 댄 것처럼 길쭉하게 솟은 것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돌들이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만 족히 수십은 되어 보였다.

쿵!

생각에 잠겨 있던 중. 갑작스레 굉음이 울렸다. 하이윈즈 자작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무릎을 굽혀 몸을 낮췄다. 그랬다가 바로 앞의 안내자가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슬쩍 다시 일어섰다.

쿠구구구-

굉음이 이어졌다. 땅이 요동치면서 저 멀리 한 곳에 균열이 일었다. 갈라지기 시작한 땅은 곧 조금씩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저건…….’

조금씩 솟아오르는 땅.

갈색 흙이 흘러내리자 회색빛 표면이 드러났다. 그제야 하이윈즈 자작은 땅에서 일어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돌이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괴이하다 생각했던 것과 같은 돌이었다. 지금 일어선 것과 그것들에 차이가 있다면, 지금 막 땅에서 솟아오른 돌은 이미 드러나 있던 다른 것들에 비해 배 이상 거대하다는 점이었다.

땅의 진동이 멈췄다. 돌이 온전히 우뚝 섰다.

[왕이시다. 예를 갖춰라.]

“……?”

안내자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려는 찰나.

거대한 돌에서 은은한 빛이 일었다. 한 점으로 시작된 빛은 곧 거대한 돌 전체를 감쌌다.

우웅!

빛 속에서 형체가 나타났다. 아니, 돌에서부터였다.

처음에는 손이 나와 허공을 쥐었고, 그 다음에는 발이 나와 땅을 밟았다.

“요정왕을 뵙습니다.”

하이윈즈 자작이 잽싸게 무릎을 꿇었다. 절벽을 이은 다리에서 앞만 보고 걸었던 것처럼,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무릎을 꿇을 것을 강요치 않았지만, 굴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스로 일어나 그를 지배했다.

[약속의 문구. 베이고르. 오랜만이군.]

빛이 걷혔다. 거대한 돌은 윤기를 잃었다. 어느새 그것은 의자, 아니 옥좌가 되어 있었다.

거인은 그 옥좌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안내자와 닮았으나 미묘하게 달랐다. 감정 한 점 드러나지 않는 삭막함은 같았지만, 거기에 짙은 피로가 얹힌 점이 달랐다.

[용건이 무엇인가.]

“그 전에 여쭙겠습니다. 왕께서는 아직 아국의 동맹이십니까?”

[나를 원망하는가.]

“아니라고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지난 날, 아국이 왕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을 때. 왕께서는 약속을 저버리셨습니다.”

[그랬지.]

너무도 담담하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말에 미안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이윈즈 자작은 순간적으로 말을 멈추고 이를 악 물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예. 그러셨지요. 하여 저는 왕을 원망합니다. 다만 왕을 추궁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섬기는 왕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의 왕은 트라펠의 계승자인가.]

“예. 계약의 상속자이기도 하십니다. 물론, 그것이 아직 유효하다면 말입니다.”[증거를 보여라.]

하이윈즈 자작은 품에서 자그마한 병 하나를 꺼냈다. 단단한 쇠로 된 병이었다. 그가 그것을 꺼내자, 그것은 곧장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빠르게 허공을 날아, 옥좌에 앉은 왕의 손으로 들어갔다.

손도 대지 않았음에도 단단히 밀봉된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안에 든 내용물이 거꾸로 솟아올라 병을 빠져나왔다.

몇 방울의 붉은 피가 허공에 머물렀다.

[네 말이 맞구나. 묽지만, 확실히 이어졌다.]

“왕께서 그것을 확인하심을, 계약이 아직 유효하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계약은 유효하다.]

타올랐다.

허공에 머문 피. 손에 쥐인 병이 희미한 불길에 싸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이윈즈 자작은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나는 한 번 맹세를 저버렸다. 그렇기에 이렇게 저주에 얽매여 있지.]

왕이 눈을 감았다.

[너의 왕은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아국은 현재 큰 전쟁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전쟁에, 왕께서 힘을 보태주시기를 원합니다.”

[또 다시 전쟁인가.]

왕이 옥좌와 함께 빛에 감싸였다.

[너의 왕에게 전해라. 바라는 대로, 나와 동족들은 시기에 맞추어 지키지 못한 맹세를 이룰 것이라고.]

빛이 걷혔을 때, 왕과 옥좌가 있던 곳에 자리한 것은 거대한 돌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시세로 하이윈즈.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이전에 몇 번, 짤막하게 등장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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