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자누겔과 그의 부족은 곧 결정을 내렸다.
“따르겠소.”
“환영한다. 지금부터는 이쪽의 언어를 조금 더 열심히 배워야 할 거다. 적어도 존대 정도는 제대로 익혀두도록.”
“그러지. 아니, 그러지요.”
사실 뜻한 바대로 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라면, 그건 초원의 전사들이 익숙하지도 않은 농사일보다는 전사(군인)로서의 삶에 더 끌릴 것이라는 점 하나 정도였다. 거기에 조금 더하자면,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그들을 이용해먹으려는 자들보다는 동족의 밑에서 일하는 게 어찌 되었든 더 나을 거라는 생각도 조금은 해주지 않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고.
그들의 교육은 할렌이 맡겼다. 살라스가 할 수도 있겠지만 할렌이 같은 초원인인데다, 기질적으로도 더 맞겠다 싶었다.
“이전까지 너희가 뭘 하던 놈들이건, 그런 건 이제 아무 의미 없다! 너희는 다 똑같은 신병일 뿐이야! 정규군으로서 차근차근 기초부터 다져주마! 굴러라!”
자누겔의 부족민 중에서 여자를 빼고, 사내 중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은 자들을 빼니 병사로 쓸 만한 자들은 마흔 남짓이었다. 결코 적지 않은 수다. 게다가 그들은 일반적인 신병도 아니고 사냥과 전투에 익숙한 초원의 전사들. 거기에 본래 따르던 족장까지 있는 마당이니 보통의 신병들처럼 군기를 잡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할렌은 그들을 혹독한 것을 넘어 가혹하게 다뤘다. 자연히 반항하는 이들이 생겼고, 할렌은 그때마다 인정사정없이 처벌했다. 죽이지 않고, 사지를 끊어놓지만 않았다 뿐. 거의 반 시체로 만들어버렸다. 제 아무리 초원의 전사들이라 해도 할렌은 어린 나이부터 전장을 전전한 역전의 용사였다. 게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나서부터는 얌전해졌을 뿐, 그는 한때 군터조차 염려할 정도로 거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요 몇 년 간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자중해왔다지만 본성이 어디 가겠는가. 자누겔, 이제는 지온이라는 새 이름을 쓰게 된 그와 그의 (전)부족민들은 매일 같이 비명을 지르며 이를 박박 갈았다.
만약 그게 다였다면 그와 그의 부족민들은 크게 반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군터는 그들에게 약속한 것을 곧바로 지켰다. 병사가 된 이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족민들을 그의 장원으로 보내 살게 했고 집과 일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족장!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겠소?”
“어찌 되었든 그는 약속한 바를 지켰다. 허면 우리도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는 병사가 되기로 했지, 노예가 되기로 한 게 아니잖소. 아니, 노예도 이렇게는 다루지 않을 거요.”
“끄응! 조금만 더 참아 보자.”
“족장!”
“잊었는가? 난 이제 족장이 아니다. 그리고 참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 야밤에 몰래 저 악귀 같은 놈의 목이라도 벨 테냐? 그 뒤는 어쩔 생각이지?”
“끄응!”
“설마하니 병신을 만들거나 죽이려고 병사로 들였겠는가? 참자. 견디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온은 그의 수하였다가, 이제는 동료가 된 병사들을 다독였다. 그럼에도 참지 못하고 훈련 중에 할렌에게 대들었던 세 명이 정말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난 후, 다른 병사들은 불만이 있더라도 행동으로 드러내는 대신 속으로 꾹꾹 눌러 참았다.
*
할렌이 씩씩하게 보고했다.
“훈련은 순조롭습니다.”
“꽤나 심하게 하는 모양이던데.”
“아직 지들 마음대로 말을 달리던 때를 기억하는 놈들입니다. 제대로 된 병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를 죽여 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신병들에 대해서는 네게 일임했으니까. 그래. 앞으로 얼마나 걸리겠느냐?”
“한 달 정도면 기본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후에는 본대와 섞을 생각입니다.”
“자누겔…아니, 지온은?”
할렌이 씩 웃으며 답했다.
“분수를 아는 놈입니다. 혹여 다른 놈들을 선동하거나 했으면 처리할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솔선해서 다른 놈들을 다독이더군요. 족장이라는 옛 신분도 잘 내려놓은 것 같습니다.”
“음? 마음에 들었나보군.”
“훈련에서도 가장 성실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솜씨도 괜찮은 것 같고, 이대로 잘 적응한다면 십인장 정도는 시켜줘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호오.”
지온과 그의 부족을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신병들도 그렇지만 그의 장원으로 보낸 이들도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었다. 특히 그들 중에는 가축을 돌보는 데 재주가 있는 자들이 많았다. 초원민족들은 여인들은 물론이고, 무기를 들고 말을 타기엔 너무 나이를 먹은 사내들이 사냥이나 전투에 나서는 대신 말과 양 등을 돌보아야 했으니 가축을 다루는 솜씨가 좋을 수밖에 없다.
‘더 사들여도 되겠군.’
가축을 돌 볼 손이 늘어났다. 이번에 이포레테스에게 군상 자리를 내주면서 두둑하게 성의를 받았으니, 가축들을 더 늘려도 되겠다 싶었다.
‘말은…아무래도 조금 힘들겠지.’
다만 가장 원하는 말의 수를 늘리기는 힘들 것 같았다. 타칸 연합과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서 말의 가격이 오르고 있었다. 특히 군마로 쓸 수 있는 덩치 좋고 힘 좋은 말들은 값이 문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는 구하기 자체가 힘들어졌다. 마상(馬商)들이 배짱을 부리는 게 아니라, 관에서 자체적으로 통제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슬슬 대부분의 영주들이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공기는 걷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걷히기는커녕, 얼마 후 벌어진 일은 경직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국경에서 소요가 일었다 합니다. 타칸 연합의 추격대가 도망자들을 쫓아 국경선을 넘어왔다는 것 같습니다. 국경을 넘은 채 반나절 동안을 머물다가 돌아갔다는군요.”
“명백한 도발이군.”
소식을 들었을 때 군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와 같이 생각했다. 왕도에 있는 왕을 비롯해, 중신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타칸 연합에 강력히 항의했다. 사전에 양해를 구한 것도 아니고, 우방이라고는 하나 멋대로 타국의 국경을 넘어와 소란을 일으킨 것은 존중의 결여이며 나아가 무시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일이라면서 말이다.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지는 명확했다. 베이고르의 항의는 정당한 것이었고, 타칸 연합이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면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타칸 연합은 베이고르에게 정중한 사과의 말 대신 까칠한 비난을 던졌다.
[본국의 반역자들을 그대들이 감싸고도니, 어쩔 수 없이 아국의 전사들이 수고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은 이 한 마디를 전했다. 당연히, 베이고르 조정은 후끈 달아올랐다.
위글로우에서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막시밀리언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반응은…상식적이지 않은데. 혹시 타칸 연합에서 눈치를 챈 것은 아닌가?”
“아국의 속내를 읽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우방에게 이런 식으로 도발을 해올 리가 있겠는가.”
잠자코 있던 군터가 한 마디 꺼냈다.
“아국의 속내를 알아차렸다기보다, 그저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적? 국가의 일에 그런 것이 작용할 리 있겠는가.”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듯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군터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타르가이 베르겐이 폭군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자들은 미쳤다고도 하더군요. 그가 근자에 벌였다는 일들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흠.”
“이제 타칸 연합은 온전히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한 나라가 미친 왕(狂君)의 사유물이 되었으니 덩달아 미쳐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하. 재밌는 말이군. 뭐, 자네의 말도 일리는 있어. 실상이 어떤지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들이지.”
여러 의견들이 나왔다.
“곧 소집령이 내려올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 서두르지는 않을 겁니다. 아국과 타칸 연합은 우방. 국경의 자그마한 소요로는 명분이 약하지요.”
“어차피 주변으로는 죄다 적밖에 없지 않습니까. 제국 아니면 타칸 연합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눈치를 살피겠습니까. 전쟁을 할 거라고 다 알려주고 시작하느니 비난을 받더라도 기습을 가하는 게 상책입니다.”
마지막에 미트라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의견에는 여러 바로 여러 사람의 반박이 들어왔지만 군터는 미트라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명분은 무슨 명분.’
미트라스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반면에 명분 운운하는 자들은…….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말은 번지르르하군.’
저들이 칼 한 번을 제대로 써 봤겠는가.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몰라 긴장을 풀 수 없는 하루를 지새워봤겠는가. 지금 입만 살아서 떠들어대는 자들 중 대다수는 남의 목숨은커녕, 자기 목숨 하나 험하게 다뤄본 적이 없을 것이다.
“군터 경.”
그때, 막시밀리언이 그를 불렀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군.”
“소관은…미트라스 경과 같은 생각입니다.”
“아니. 그것 말고. 자네는 여기 이들의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
군터는 조금 당황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고, 막시밀리언이 말한 범주에 속하는 자들은 눈초리가 곱지 못했다.
“여기 자리한 이들 중 상당수는 전쟁을 모르네. 이전번의 전쟁도 편한 곳에서 지켜보기만 했겠지. 가장 앞에서,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자네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못마땅한 구석이 많을 게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막시밀리언의 말은 지금껏 열심히 떠든 자들을 지적하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지적을 받은 자들의 얼굴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이네. 대부분의 전쟁은 이런 이들이 일으키는 것이야. 전쟁을 아는 자들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지. 전쟁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그들은 피를 흘리지 않거든.”
“…….”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자네 같은 자들의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아. 다분히 실속 없고, 고리타분하지. 음. 물론 전부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그렇다네.”
“허면, 영주님께서도 조정이 시일을 끌 거라 보십니까.”
“대부분이라고 하지 않았나.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왕과 두 공작 각하들께서는 전쟁을 알고 계시지.”
“그 말씀은.”
“확실한 건, 이 전쟁은 꽤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다는 것이네. 소집령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 지금 이 순간에도 준비가 되어가고 있겠지.”
막시밀리언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나 그랬듯, 회의가 시작된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미겔이 있었다.
*
베이고르와 타칸 연합 간의 국력 차이는 분명하다. 지금 타칸 연합이 저렇게 말도 안 되는 강짜를 부릴 수 있는 것도 힘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강하기 때문에 약한 쪽을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타칸 연합이 그것을 아는데 베이고르라고 모를까?
그럼에도 베이고르는 타칸 연합을 노린다. 약한 쪽이 강한 쪽을 도모하려드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가 간의 전쟁이라는 것에서는 길거리 싸움처럼 먼저 한 대 친다고 해서 힘의 차이를 뒤집을 수 없다.
막시밀리언은 일전에 란도흐 백작과 만난 자리에서 그 점을 지적했고, 란도흐 백작은 넌지시 답을 알려주었다.
“우군.”
그게 무엇일까. 막시밀리언은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심복들에게 털어놓았을 때, 생각지도 못하게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미겔로부터.
처음에 미겔은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계속된 토의 속에, 우군이라고 할 만한 자들이 나올 구석이 없음이 확실해지자 그는 반대로 확신을 가졌다.
“그 우군이라는 건…이전에 베이고르와 협력관계에 있던 맹우를 뜻하는 걸 겁니다.”
“이전에? 맹우라고?”
“예. 지금의 재건된 베이고르가 아닌, 제국에게 멸망당하기 전에 이 이 땅을 다스리던 베이고르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