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253화 (253/1,064)

<-- 2부 -->

마침내 시작 됐다.

위글로우에 급보라면 급보인 소식이 당도한 것은 ‘그 일’이 벌어지고 엿새가 지난 후였다.

“타칸 연합이 탈주자들의 송환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조정은 탈주자들이 아닌 귀순자들이라며 송환을 거부할 예정입니다.”

전령의 보고 후에 막시밀리언은 곧바로 관료 회의를 소집했다.

“알아본 바, 아국으로 귀순해온 부족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 중에는 부족원은 만 명에 달하는 부족들도 몇 있다 들었습니다.”

“조정은 물러서지 않을 것 같군요.”

“기회라면 기회가 되겠지요. 이 일을 빌미로 타칸 연합이 거칠게 나온다면 아국은 명분을 쥐게 되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놀랍습니다. 분명 타칸 연합의 대족장이 철저히 단속을 할 텐데도 귀순자들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지 않습니까.”

조정의 대처에 대한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타칸 연합에서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는 귀순자들에 대한 부분으로까지 옮겨갔다.

사실 이 문제는 누가 옳다 그르다 따질 수 없는 문제다. 그저 선택의 문제였을 뿐. 선택에 따라 얻는 게 있고, 잃는 것이 있다.

베이고르는 탈주자들을 송환하여 타칸 연합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덕분에 도망쳐 온 초원부족들을 대거 흡수했지만, 그 때문에 타칸 연합과의 관계가 다소 경색될 것이 분명하다.

“이게 시작이다. 앞으로 타칸 연합과의 마찰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동요하는 기색은 없는가?”

타칸 연합과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반응을 일으킬 자들은 역시 상인들이다. 공식적으로 국경을 넘어 상행을 다니는 자들이 당장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다.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 길게 늘어졌으면 좋겠군요.”

한 관리가 그리 말했다. 얼핏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

상인들은 많은 세금을 바친다. 그들의 수입이 늘면 관부 역시 수입이 늘고, 그들의 수입이 줄어들면 마찬가지로 관부 역시 거둬들이는 세금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관리로서 그런 말을 하는 까닭. 그것은 위글로우를 지탱하는 금이 일반적인 상인들보다는 암상들로부터 거둬들이는 게 많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물류 통행에 제제가 걸리기 시작하면 물건의 값이 오른다. 타칸 연합이 차지한 구 바크렌의 서쪽 지역은 그렇다 쳐도, 갈색 초원과 그 너머 흰 땅에서 넘어오는 사치품을 포함한 여러 물건들은 지금도 일단 들여오기만 하면 파는 데는 걱정이 없을 만큼 수요가 많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대놓고 물류가 막힌다면? 암상들만 입이 찢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타칸 연합과의 분위기가 썩 좋지 못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물건들의 값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암상들은 재빨리 물건을 쟁이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관부에 끈을 댄 선을 통해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알고자 했다.

몇 안 되지만 군터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었다. 그를 ‘후원’하는 상인들이었다.

“경. 이런 일로 찾아뵙게 되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이해한다. 상인으로서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이니.”

이토레테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알아줘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어찌 되는 것입니까? 조정에서 탈주자들의 송환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타칸 연합의 대족장이 유감을 표했다는 소식도.”

군터는 말을 하기 전에,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답,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걸 그대로 이야기해줘도 괜찮을까? 당연하지만 막시밀리언과 란도흐 백작이 나눈 이야기는 기밀 중의 기밀이다. 아무리 이포레테스가 자신의 후원자라고 해도 고스란히 다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다.

‘답을 줄 수는 없다. 적당히 조언만 해줘야겠군.’

군터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이다. 타칸 연합과 아국의 분위기가 좋지 않아.”

“으음. 회복될 수는…있는 것입니까?”

“뭔가 알고 있나?”

군터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보통 이런 경우에는 ‘언제쯤 좋아질까’를 물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이포레테스는 ‘시기’가 아닌 ‘가능성’을 물었다. 이는 그가 앞으로 이런 안 좋은 상황이 계속 이어질 것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다. 비관론자에 가까운 신중론자이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알고 있거나.

“상인으로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항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긴 발단. 그 원인은 타칸 연합의 대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가혹한 통치 때문에 여러 부족들이 동요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가 바뀌지 않는 한 타칸 연합의 상황은 적어도 한동안은 계속 혼란스러울 테고…….”

“아국은 뒤늦게 태도를 바꾸지 않을 테니, 이 상황이 좋게 풀리지도 않을 것이다?”

“예. 소인은 보고 있습니다.”

‘훌륭하군.’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감탄했다. 굳건한 마음뿐 아니라 크게 내다보는 안목이 있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말이 옳다. 최소한 당분간은 이런 상황이 이어질 것이다. 조정은 타칸 연합의 비위를 맞춰줄 마음이 없다.”

“역시 그렇습니까…….”

“안타깝게 됐군.”

때 아닌 혹한의 시기를 맞이하게 됐다. 군터는 그에 대해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그에 이포레테스는 감사를 표하면서도 무언가 할 말이 남은 듯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뭐지? 할 말이 더 남았다면 지금 이야기해라. 당분간은 시간을 내기 힘들지도 모르니.”

다가올 전쟁을 대비해 군사를 조련해야 한다. 그간은 살라스와 할렌에게 일임하다시피 했었지만, 이제부터는 직접 챙겨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새로이 초원의 전사들이 합류하게 된다면 특히나 더 그렇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경께, 큰 부탁 한 가지를 드려도 되겠습니까.”마음을 정한 듯, 이포레테스가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입을 뗐다. 군터는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군상(軍商)의 지위를 내려주십시오.”

“…….”

뜻밖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군터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시간을 가져야 했다.

“군상이라.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군상. 말 그대로 군대에 각종 물건을 납품하는 상인을 말한다. 군량은 물론, 병기와 말 등 군수물자라 하면 대부분 취급한다. 그리고 이런 군상들은 당연하지만 관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군상으로서 활동할 수 있다.

평소, 그러니까 평화 시기에 이 군상이라는 자리는 그렇게 매력 있는 자리는 아니다. 납품을 하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지만, 상품 하나하나에 붙일 수 있는 이문은 정해져 있기에 꾸준하게 수입은 날지언정 큰 수입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걸어보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진다.

“가능성에.”

전쟁은 돈 먹는 괴물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전쟁이라는 놈 자체가 아예 돈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을 하기 위한 모든 것에 돈이 든다. 그것도 아주 많이.

전쟁은 무엇으로 하는가. 약간 돌아가는 대답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딱 꼬집어 말하자면 병사로 한다. 병사가, 병력이 없으면 당연히 전쟁도 치를 수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먼저 병사들을 부리기 위한 돈이 필요하다. 병사들을 먹이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또 돈이 필요하다. 전투라도 한 번 치르면 병사들이 대거 상하고, 병기들이 그야말로 갈려 나간다. 하다못해 화살 한 대를 쏘더라도 그게 다 돈이다.

비축한 물자는 순식간에 소모된다. 전쟁이 계속 되는 한 보급도 계속 될 것이고, 자연히 돈도 계속해서 쓰이게 된다.

그 무한히 쓰이는 돈을 먹어치우는 자들이 바로 군상이다. 한 번에 취할 수 있는 이문은 정해져 있다 해도, 그 적은 이문이 끝없이 쌓여간다면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다.

이렇듯, 전쟁이 나면 군상은 금을 쓸어 담을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없다면 과장 조금 보태서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

그런데 이포레테스는 군상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가 걸어보겠다는 가능성, 그것은 전쟁이다.

“어려운 일이다. 너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어중간하게 한 발 걸치려는 자들이 대다수겠지요. 소인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하고 있는 일을 정리하겠다는 건가?”

“필요하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위태로운 모험을 하는군.”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배웠습니다. 위험은 얼마든지 감수하겠습니다. 부디 기회를 주십시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심이다. 이야기가 어디서 새어나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대담하게 나오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연함을 내비치면서도 잘게 씹힌 입술을 본 순간. 군터는 깨달았다.

‘확신하지 못했음에도 거침이 없다. 걸었다는 말이 진심을 고스란히 담았군.’

의심이 걷히니 유쾌함만이 남는다. 이포레테스는 알지 못하겠지만, 군터는 그가 던진 주사위가 무엇을 내놓을지 알고 있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좋다. 공수해야 할 품목은 사흘 내로 알려주지.”

“그 말씀은.”

“준비하고 있어라. 그리고…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내 체면도 있으니.”

“옛! 반드시!”

군인이라도 되는 양 기합을 잔뜩 넣고 고개 숙인다. 실은 이포레테스가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음에도, 그 모습이 제법 기껍게 느껴졌다.

*

군터는 족장의 아들이며, 이제는 부족의 대표가 된 사내와 독대했다.

“코누다이안에 정착할 생각이겠지.”

“그러려고 하고 있소. 영주…님의 허락도 얻었으니.”

사내의 이름은 자누겔이었다. 별 의미는 없다. 아마도 조만간 그는 다른 이름을 쓰게 될 것이다. 자누겔이라는 이름은 제국의 언어와 작명법에 익숙한 베이고르에는 어울리지 않으니.

“무얼 할 생각인가.”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지. 지금으로서는, 개척촌이라도 하나 꾸릴까 생각 중이오.”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다. 아마도 적지 않은 돈이. 내가 준 것으로는 부족할 텐데.”

“그래서 현재까지는 생각 중이라 한 거요. 굳어진 건 아무 것도 없지. 우리는 아직 이 낯선 땅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다른 방법도 있다.

“응?”

“익숙한 일을 하는 거지.”

“돌려 말하는 게 능숙하군. 초원의 방식은 아니야.”

“…그럴 지도. 난 초원에서 산 날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

“하고픈 말이 뭐요.”

“군대에 들어와라. 너희의 서툰 제국어(베이고르는 제국어를 사용한다) 실력으로도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을 거다. 물론, 어느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자누겔이 미간을 좁혔다.

“당신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요?”

“그래.”

“나쁘지 않군. 하지만…감당할 수 있겠는가?”

“음? 무슨 소리지.”

“비록 큰 무리는 아니라 하나, 한 개 부족을 이끌던 몸이오. 그런 내가 부족민들과 함께 당신의 밑으로 들어간다면 아무래도 부담이 되지 않겠소.”

“후하하하하핫!”

군터가 크게 웃었다. 비웃는다고 생각했는지, 자누겔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웃지?”

“하하하하. 너무 오만한 것이 아니냐?”

“뭐라고?”

“너와 네 부족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더냐. 부담이라고? 건방진 소리도 그쯤 되면 수준급이군.”

군터의 기세가 일변했다. 자누겔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칼날이, 아니 맹수의 이빨이 그의 이마 위에서 멈춘 느낌이었다.

“착각하지 마라 애송이 족장. 너와 네 부족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너희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다. 쓸 만한 병사가 될 기회. 왕국의 국민으로서 정당히 먹고 살 수 있는 기회. 그러니 내 호의를 조금은 더 감사히 여겼으면 좋겠군.”

군터가 말을 마치고 나가라 손짓할 때까지, 자누겔은 동상이 된 양 굳어 있었다. 두어 번 반복된 손짓에 그가 어렵사리 몸을 돌려 나가자, 군터는 그제야 살벌하게 넘실거리는 기세를 갈무리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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