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막시밀리언은 측근들을 불러 모았다. 메르마엠의 시장으로 부임해 간 위벨을 제외하고 코누다이안의 중진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다 모였다.
막시밀리언은 란도흐 백작이 꺼내놓고 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당분간은 비밀로 해야 할 이야기이나,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코누다이안의 중진임과 동시에 막시밀리언의 측근들이었다. 사실 이 둘은 같은 말이다. 막시밀리언의 측근이 되지 않고서는 코누다이안에서 중진이라 할 만한 자리에 오를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강력한 우군이라니. 소인은 그게 무엇일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아마도…제국의 3주들 가운데서 합류하는 세력이 나올 거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 리 없다. 아무리 제국이 돌아가는 모양새가 사납다고 해도, 영토만 보자면 저들은 제각기 아국보다도 더 크다. 이제껏 그들이 아국을 도모하지 못한 것은 타칸 연합과 아국이 손을 맞잡고 있었기 때문이지, 아국 하나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한 관리가 낸 추측을 막시밀리언이 단박에 부정했다.
“당장 이해는 가지 않지만, 란도흐 백작이 헛소리나 하려고 바쁘게 움직이지는 않겠지. 어찌 되었든 그가 예고한 대로 멀지 않은 때에 타칸 연합과 전쟁을 치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준비를 해야겠군요.”
“은밀히. 타칸 연합의 눈이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우리를 살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겠지.”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2차 재건전쟁 이후, 거의 곧바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이제야 좀 숨을 돌리고 여유를 부리려는 차에 또 다시 전쟁이라니? 물론 당장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아니라지만, 어찌 되었든 숨이 막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기회이기는 하지.’
숨이 턱 막히는 것과는 별개로, 타칸 연합을 도모할 절호의 기회다.
사실 두 국가가 제국이라는 대적을 앞에 두고 서로 등을 맞대고 있기는 하지만, 베이고르의 입장에서 보면 타칸 연합은 적지 않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갈색초원 전역과 구 바크렌의 영토 반절을 가졌다. 거기에 베이고르의 무장들과, 몇몇 인사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양국은 어느 정도 국력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두 번에 걸친 제국과의 전쟁에서 명백히 입증이 됐다.
“…….”
군터는 다가올 전쟁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관망했다. 그는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는 미트라스를 한 번 보았다가, 그와는 정반대로 홀로 생각에 잠긴 듯 한 마디도 않는 미겔을 보았다.
‘전쟁이라.’
또 전쟁인가 싶기도 하고, 가슴 한 구석이 들썩거리기도 한다. 그 외에 뭔가 대단한 감상 같은 것은 없다. 두려움도 없고, 과도한 흥분도 없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거겠지.’
두 번의 전쟁을 치렀다. 수십 번의 전투 속에서 피를 묻히고, 뿌렸다. 나이가 아닌 순수한 경험으로만 본다면 그는 이미 십전(十戰)을 넘어 백전(百戰)을 향해 가고 있는 노련한 군인이다.
“군터.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막시밀리언이 뜬금없이 물었다. 관망하다 못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군터는 슬쩍 난처해졌다. 솔직히, 그는 지금 무슨 대화가 오고 가던 중이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막시밀리언은 그를 곧바로 곤혹스러움에서 구해주었다.
“군터 천인대…아니지. 이제는 군터 부대라고 불러야겠군. 상태는 어떤가? 이전처럼 용맹하게 전장을 누빌 수 있겠나?”
군터는 벌떡 일어나 힘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코누다이안 군의 선봉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믿음직스럽군.”
도로 자리에 앉는 군터에게 막시밀리언이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본 순간 군터는 막시밀리언이 자신을 골탕 먹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의에 집중하지 않고 한눈파는 모습을 들킨 것이다.
‘쯧.’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군터는 겸연쩍은 마음을 무표정으로 감추면서 흘러가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간간이 짤막하게나마 의견을 내기도 하면서 말이다.
*
“이보시오. 좋은 물건이 있는데 한 번 보고…….”
“…….”
말을 붙이려던 상인은 무심코 옷자락을 붙잡았다. 살라스는 슬쩍 로브를 잡아당겨 허리춤의 검을 드러냈다. 그러자 신나게 말을 쏟아낼 기세였던 상인이 즉시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멀어지는 뒷걸음질은 옷자락을 붙들기 위해 다가오던 것보다 더 빨랐다.
살라스는 인파에 몸을 묻었다. 존재감을 최대한 감추고 몇 걸음씩 움직이며 주변을 배회했다. 계속 같은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씩 골목에 몸을 감추기도 하면서 다른 이들의 눈길을 피했다.
‘오늘로 다시 보름째. 이번에도 모습을 보일 것인가.’
한낮의 태양이 후덥지근한 열기를 뿜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불쾌한 더위가 차올랐지만 살라스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익숙한 얼굴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확실한 것은 골목의 그늘로 접어든 횟수만 서른두 번이고, 괜히 칼자루를 쓰다듬은 횟수가 그 배 이상이 지났다는 것이다.
절정에 이르렀던 태양의 열기가 조금은 수그러들어갈 즈음. 조금씩 지쳐 가던 살라스의 눈매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왔군.’
익숙한 얼굴의 사내.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그저 체구가 조금 좋은, 평범한 시민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자가 어디론가 향했다.
‘이번에는 끝까지 확인하겠다.’
처음, 우연히 목격했을 때는 약간 미심쩍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의심은 호기심과 맞물려 그를 다시 한 번 이 자리로 이끌었다. 그게 바로 보름 전의 일.
그리고 지금. 그는 다시 한 번 이 자리에 있다. 이제는 단순한 의심이나 호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흡사 급박한 전장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이 있다는.
물론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착각이 아닐 수도 있기에, 살라스는 없는 시간을 짜내어 이런 일탈을 벌였다.
“…….”
살라스는 조심스럽게 멀찍이 걸어가는 사내의 뒤를 쫓았다. 앞서 가는 사내, 영주 관저의 친위병사는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는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음?’
계속해서 뒤를 쫓던 중, 살라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똑바로 잘 가던 병사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이 주변의 지리를 파악해 놓은 그였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병사는 보다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일부러 빙 돌아서 갔다. 바로 우측으로 꺾어 가면 될 길을 왼쪽부터 크게 도는 식이었다.
‘놓친 것은 없다.’
먼 거리였지만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면밀히 살폈다. 중간에 다른 사람과 뭔가를 주고받았다거나, 표식을 남겼다거나 하는 행동은 없었다. 단순히 길을 돌아갈 뿐이었다.
‘성실하군. 뒤를 잡힌 것도 모르면서.’
살라스는 상황에 맞지 않게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런 발걸음은 늦추지 않았다.
‘저곳인가?’
얼마나 걸었을까. 병사는 한 건물로 들어갔다. 정확히는 상점이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잡화점처럼 보였다.
“…….”
생각에 잠긴 살라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
“그타칸 연합에서 도망쳐온 이들을 대거 거두었다고 들었네.”
“예.”
“거둘 생각인가?”
“가능하다면 그리 해 볼 생각입니다. 초원의 사내들은 모두 뛰어난 군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알지. 기대 되는군.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야기 하게.”
“예. 감사하옵니다. 하옵고…….”
“음?”
“이번에 도망자들을 거둬들이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막시밀리언이 관심을 보였다. 군터는 막시밀리언에게 그가 알게 된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대전사의 죽음 이후 변하기 시작했다는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에서부터 ‘신의 우리’라는 것에 대해서까지.
“흥미롭군. 이 이야기…부족장의 아들에게서 들었다 했는가?”
“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후계자였다고 하더군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거짓은 없는 듯합니다.”
“좋아. 그 녀석을 내게 데려오게. 조금 더 자세하게, 당사자의 입으로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
“예. 곧 그리하겠습니다.”
“관심이 가는군. 신의 우리라니. 자네는 들어본 적이 있는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시험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인간에게 술법적인 힘을 부여한다니. 게다가 말만 들어보면 특별히 횟수 제한 같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정도의 힘이라면 그것은 필시 법보라 할 만한 귀물일 게야.”
법보라.
군터는 일찍이 법보라는 물건을 바로 눈앞에서 구경한 적이 있었다. 제국의 군주 쿠엘단이 제작했다는 법보, 카락시아가 그것이다. 당시 제국은 카락시아의 힘을 이용해 오테론 전역을 뒤덮은 저주 같았던 혹한을 일시에 걷어낸 적이 있었다.
기후를 뒤바꾸어 버리는,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힘. 법보는 그런 초월적인 힘을 지닌 보물 중의 보물이다. 막시밀리언은 그 ‘신의 우리’라는 것이 카락시아에 버금가는 보물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법보라…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바르바피는 창칼로도 멈춰세우기 힘든, 그야말로 괴물이다. 보통의(보통이라고 하는 것도 우습지만) 바르바피 하나에는 용기 있고 숙련된 병사 서넛은 붙어야 제어가 가능할 정도이니, 그런 바르바피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이라면 그것은 법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소관은 그 신의 우리라는 물건보다, 타르가이 베르겐의 변화가 더 궁금합니다.”
“그것도 신경 쓰이는 일이지. 그렇게까지 놀라울 일은 또 아니야.”
“그게 무슨……?”
“사람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거든. 겉으로 보기에는 강해 보여도, 속은 다 비슷비슷하다는 게지.”
“잘 모르겠습니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일국의 수장이 아닙니까.”
“일국의 수장. 게다가 제국의 군주와 맞서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초인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래봐야 그 역시 결국은 사람이네. 어쩌면 그렇게 대단한 자라서 더 쉽게 흔들리는 걸지도 모르지.”
막시밀리언은 인간의 나약함을 이야기했다. 군터는 솔직히 그의 말에 그리 공감하지는 못했다. 그는 만약 나약함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것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생각이 다름을 말해 무엇 할 것인가. 군터는 그에게 족장의 아들을 보내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저택에는 살라스가 먼저 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주님.”
“살라스. 어쩐 일이냐?”
“긴히 드릴 말씀이.”
“……?”
군터는 의아해 하면서도 그의 집무실로 가 살라스와 독대했다.
“자. 이제 얘기해 보거라.”
돌처럼 굳은 살라스의 표정만 봐도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연히 군터의 분위기와 목소리까지 덩달아 무거워졌다.
“실은, 일전에 친위대 병사를 거리에서 목도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묘한 직감 때문에 병사의 행적을 추적하고, 기어이 오늘 그 병사가 향한 곳까지 따라붙었다는 부분까지 이어졌다.
“그곳은 잡화점이었습니다. 병사가 떠나간 후, 어찌해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고, 괜히 더 파고들었다가 골치 아픈 일에 엮일까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 알아보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혹여 이 일이 코르넬님이나 영주님과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음…잘했다. 확실히, 친위대를 부릴 수 있는 이는 영주님과 코르넬 뿐이지.”
자그마치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의 수고에 대한 결실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돌아 나오다니. 정말 살라스다웠다.
“아무튼, 네 말을 듣고 보니 나도 궁금하긴 하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름대로 은밀하게 진행하는 일인 듯했다. 친위대 병사를, 그것도 하나만 빼돌려서 무언가를 들여온다니. 필요한 게 있다면 영주 관저에서도 얼마든지 다 구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이런 가정은 친위대 병사를 부린 것이 막시밀리언일 때 성립하는 이야기지만, 군터는 살라스에게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건 막시밀리언이 시킨 일일 거라고 반쯤 확신했다.
‘코르넬은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아.’
어떤 면에서는 군터 자신보다도 더 고지식한 사내가 코르넬이다. 그는 영주에 대한 충성으로 똘똘 뭉친 자다. 어떤 이유에서든 친위대를 사사로이 부릴 자가 아니다.
“장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알아보겠습니다.”
“…아니. 접어두어라.”
확실히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이 비밀스럽게 진행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굳이 들추어 알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예.”
조금은 아쉬워 할 법도 하련만, 살라스는 담담히 수긍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