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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51화 (251/1,064)

<-- 2부 -->

군터는 모페이브가 따라준 차를 마셨다. 본래는 취미가 없던 차였지만, 언젠가부터 술을 마셔도 취하지 못하게 된 뒤로는 술 대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취기가 오르지 않는 술을 마시느니 차향이라도 느껴보자는 취지 아닌(?) 취지였다. 덕분인지 처음에는 반쯤 억지로 마시던 차가 이제는 술술 입에 들어갔다.

“데려와도 제대로 데려왔더군.”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아는 게 많은 녀석이다. 녀석의 무리도 쓸 만하고.”

“거두려 하시는군요.”

“가능하다면. 초원의 전사들은 모두 훌륭한 군인이지.”

“영주님께는 아뢰셨습니까?”

“물론.”

위글로우 내에서 벌어지는, 정말 사소한 것들을 제외한 모든 일들은 막시밀리언의 눈과 귀를 피할 수 없다. 한 둘도 아니고 백이 넘는 인원이 움직인 일인 만큼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바로 이실직고 하는 편이 좋다. 군터는 그리 했고, 막시밀리언은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알겠노라 했다.

“그렇지요. 장주님. 연구에 대해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음?”

“자그마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장주님. 괜찮으시다면 한 번 보시겠습니까?”

“그러지. 기대되는군. 한참 매달리지 않았었나.”

“그랬지요. 다행히 작게나마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페이브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는 군터를 별채의 지하실로 안내했다. 군터가 마련해준 모페이브의 연구실은 그곳에 있었다.

술사의 연구는 대개 가치가 높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그렇다고 했다. 하여 모페이브는 그의 연구실의 보안을 철저하게 해줄 것은 요청했고, 군터는 그를 들어주었다.

철컹!

두 번째 문에 걸려 있던 자물쇠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풀렸다. 모페이브는 벽에 걸린 횃불이 희미하게 밝히는 어둠 속을 성큼성큼 걸었다.

“일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제 연구는 장주님의 칸젤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무구와 같은, 생명이 없는 일개 도구가 의지를 가진다는 것. 그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현상이지요.”

“신의 힘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하지만 모든 술법은 결국 신을 비롯한 초월적인 존재들의 모방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제 연구 역시 그러하고 말이지요.”

철컹!

세 번째 문이 열렸다. 마지막 문이다.

문이 열리자 눅눅한 공기가 느껴졌다. 환기도 잘 되지 않는 적당한 크기의 방에는 무엇에 쓰이는지도 모를 온갖 물건들이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여전히 지저분하군.”

“으음. 나름대로 잘 정리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만.”

“결과물이라는 건 어디에 있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꺼내오겠습니다.”

모페이브는 등에 불을 붙이고 구석으로 향했다.

책상이나 책장, 심지어 바닥까지 깨끗한 곳이 없는 연구실에서 유일하게 다른 물건이 없는 곳이었다.

자그마한 원형 탁자. 그 위에는 정체 모를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모페이브는 손에 든 등마저 내려놓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모르는 자의 눈에는 갓 세상에 나온 자기 자식을 안아드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렇게 조심스럽게 가져온 물건은 주먹만 한 크기의 돌덩이였다. 다만 평범한 돌덩이하고 다른 점은, 돌덩이의 중앙 즈음에 자그맣게 빛나는 또 다른 돌멩이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건…기석이 아닌가.”

“예. 기석이지요. 허나 자세히 보십시오.”

모페이브는 내려놓았던 등불을 다시 가까이 가져왔다. 군터는 그의 말대로 돌에 둘러싸인 기석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곧 모페이브가 가져온 마석의 자그마한 특별함을 알아챌 수 있었다.

“빛이…….”

“일렁이지요? 마치 잔 속에 이는 물결처럼 말입니다.”

“뭐, 확실히. 하지만 이게 다인가?”

“장주님. 단순히 빛이 춤을 추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 녀석은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다고? 그건 무슨 농담이지?”

“살아있다는 건 생명을 가졌다는 것. 장주님. 장주님께서는 생명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때마다 들썩거리면서 숨을 쉬는 것? 말을 하는 것? 아니지요. 저는 생명의 증거란 의식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표출이 되겠지요. 의식을 가지고 있다한들 그것을 드러내어 보여주지 못하면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마석이 의지를 가졌다는 건가?”

모페이브가 환히 웃었다. 평소에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열기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정확하십니다. 이 마석은 의지를 가졌지요. 이 녀석이 발하고 있는 빛은 다른 평범한 마석들이 발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녀석의 빛은 온전히 녀석의 의지에 따라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모두 이 녀석의 의지에 따라서 말입니다.”

군터는 손에 들고 있던 마석을 모페이브에게 돌려주었다.

“솔직하게 말해서…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군.”

“아주 큰 의미가 있지요. 장주님. 저는 없던 생명을 탄생시킨 겁니다!”

“여인도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지. 물론 혼자서는 안 되고, 사내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지만.”

“…정정하지요. 저는 생명이 없던 것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을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의 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으음. 그렇다고 해도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합니다만.”

“그래.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건 인정하지. 그래서…그걸 어떻게 써먹을 수 있지?”

“아, 그건…당장은 써먹을 곳이 없습니다. 이게 보기보다 어마어마하게 기운을 쓰기 때문에 말입니다. 기석으로 실험을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동력을 주체로 삼은 거지요. 그렇게 했음에도 오래 가지는 못할 겁니다. 사실 이 녀석, 처음 만들었을 때에 비해서 지금은 활동이 현저하게 뜸해졌습니다. 힘이 빠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많은 보완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잠깐. 그 보완 작업이란 건, 실험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실험에 필요한 재료는 기석인가?”

“…실은 그 때문에 장주님을 여기까지 모시고 온 것입니다. 장주님. 비록 지금은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하지만, 부족한 이 몸에게 조금 더 많은 시간과 예산을 허락해주신다면…….”

“됐다.”

군터는 길어질 것 같은 모페이브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리고 절박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온 몸과 마음으로 지원을 갈구하는 모페이브에게서는 평소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알고 있나? 지금 자네, 재밌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지요.”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는 않게 해주지. 원하는 대로 해보게.”

“감사합니다! 반드시 후회하시는 일 없도록 큰 성과로 보답하겠습니다.”

큰 성과?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모페이브에게 지급되는 연구비는 그의 삯이나 마찬가지. 이제껏 술사로서 그의 능력을 써먹은 적은 드물지만, 조금(사실은 많이) 비싼 집사를 쓴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이전이라면 모를까, 어차피 여러 상인들의 후원을 받게 된 지금은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될 만큼 풍족하다.

‘하지만 저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정말 모르겠군.’

군터는 모페이브가 끌어안고 있는, 간헐적으로 반짝이는 기석을 흘겨보았다. 다시 봐도 저게 왜 대단한 것인지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막시밀리언은 코누다이안의 영주다. 그런 그가 코누다이안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상석을 양보하는 상황은 좀처럼, 아니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지금과 같은 극히 드문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이름 높으신 란도흐 백작 각하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너무 띄워주시는군. 난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오. 이렇게 불청객처럼 찾아왔지만, 부디 얼마 머물지 않는 시간 동안 편히 대해주셨으면 좋겠소.”

“불청객이라니요. 그런 황망한 말씀을.”

“후후. 대낮에 신분을 밝히고 들어온 것이 아니외다. 무슨 의미인지 잘 아시지 않소?”

란도흐 백작이 웃었고, 막시밀리언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국왕 전하의 뜻을 받잡고 움직이신 거겠지요.”

“바로 그렇소.”

“제가 알아야 하는 일입니까?”

“알아서 나쁠 것은 없겠지.”

“알아도 되는 일입니까?”“영주께서 원하신다면. 안 될 것은 없소이다.”

“허면 알려주시겠습니까? 경청하지요.”

“허허허. 사실 영주께서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실 듯한데…….”

“맞습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요. 하지만 직접 듣는 것과 거쳐서 듣는 것은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두 분 공작 각하들께서 함께 자리한 곳에서 논의된 일이오. 걸쳐 들은 것과 지금 내게서 듣는 것이 무에 다르겠소.”

“다르지요. 란도흐 백작 각하께서는 국왕 전하의 ‘입’이 아니십니까.”

란도흐 백작이 싱긋 웃었다. 동시에 느슨하던 그의 눈빛이 일변했다.

“말재간이 좋구려. 좋소. 잘 들으시오 남작. 왕국은 조만간 고토의 완전한 회복을 위해 세 번째 재건 전쟁을 일으킬 것이오.”

“타칸 연합과 등을 지는 것입니까.”

“남작이 그런 소리를 하니 조금 우습구려. 구실은 만들기 나름이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작께서는 잘 아시지 않소?”

“…….”

“남작도 알겠지만, 타칸 연합은 혼란에 빠져 있소. 내전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그렇다 치지요. 제국은 어찌합니까.”

“그를 위해 내가 이곳에 온 거요. 나는 이대로 본다인으로 넘어가 본다인의 지휘부와 협상을 할 거요.”

“정전입니까?”

“타칸 연합 이상으로 제국은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지. 내전은 이미 시작 됐소. 황도에서 탈출한 황자들이 각자의 세력을 가지고 군을 정비하고 있다는 정보요. 이런 혼란의 시기에, 지방 정부는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겠지.”

“그렇다면…차라리 회유를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어찌 그리하지 않겠소. 다만 아직 아국은 제국에 비하면 초라하지. 때문에 거래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복속의 대상은 될 수 없소.”

막시밀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에는 다른 분들이 움직이고 계시겠군요.”

“그렇소.”

“타라냐드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문제가 되기는 하겠지. 하지만 괜찮소.”

“괜찮다니요?”

“그 자는 수차례 타칸 연합과 아국으로의 진군을 주장하다가 타라냐드의 유력자들에 의해 반쯤 실각한 상태요. 약간의 소란은 일으킬 수 있겠지만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하겠지.”

“흠. 하지만 그렇다 해도 걱정이 되는군요. 협상을 맺는다 해도 결국은 밀약. 아국이 타칸 연합을 압도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린다면 그들이 다른 마음을 먹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타칸 연합은 강합니다. 그들이 내부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 해도…….”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아오. 어찌 그들의 힘을 모르겠소. 전하께서도 그들의 저력은 익히 알고 계신다네.”

“하긴 그렇군요.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나 봅니다. 그렇다면 뭔가 묘수라도?”

“음. 당장 밝히지는 못하지만, 강력한 우군이 함께 할 거요. 그들의 힘만 있다면 타칸 연합은 걱정할 바가 아닐 것이외다.”

“강력한 우군……?”

막시밀리언은 의아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란도흐 백작은 그에 대해 더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는 말만 반복할 뿐.

그는 그를 따르는 호위 및 수행인들과 함께 위글로우에서 꼬박 이틀 동안을 머물렀다. 그 이틀 동안 그들은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푹 쉬기만 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을 때, 그들이 왔던 것처럼 은밀하게 도시를 떠났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해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저 역시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초보이다 보니 여러 부분을 고려하는 데 있어 미숙함이 있습니다.

어쩌면 슬럼프가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계속 노력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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