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250화 (250/1,064)

<-- 2부 -->

전신에 힘이 쭉 빠진다. 근육이 풀리고 관절이 삐걱거린다. 극도로 단련된 데다 알 수 없는 신비까지 더해져, 완벽히 인간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신체가 이렇게까지 비명을 지르는 일은 아무리 훈련을 혹독하게 한다고 해도 좀처럼 볼 수 없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실제로 힘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장대한 체구가 가볍게 툭 치면 그대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역시 그 비술은 몸에 막대한 부하를 가져오는군요.”

모페이브가 침음을 흘렸다. 군터는 말을 할 힘도 없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훈련을 거듭하면 점점 익숙해지시겠지만, 거듭하여 능숙해지신다 해도 비술을 사용하실 때에는 언제나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조절에 실패해도 원기가 상하실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한 번 원기가 상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 죄수들처럼 말이군.”

칸젤을 지팡이처럼 짚고 숨을 조금 고르고 있으니 체력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삐걱거리던 몸이 조금씩 안정감을 찾아갔다.

“예.”

“내 이 술수가 녀석들의 것과 같은 것이라 했었지.”

“더 정확히는 ‘같은 것 같다’라고 했었지요. 제가 그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늘에…어쨌든 사슴이라고 했다.”

모페이브가 웃으며 말했다.

“편하게 부르시지요. 사신이라는 명칭이 입에 익지 않습니까?”

“그래. 아무튼, 그 사신의 신도들은 다 사령술을 쓰는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전에 몸을 담고 있던 곳만 하더라도 내려오는 비술들은 대개 땅의 술법이었지요. 음, 하지만…….”

“하지만?”

“그들이 사신의 추종자들이라 탄압을 받았을 때, 이 땅의 사람들 중 일부는 그것을 일방적인 박해라 보지만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지?”

“종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신에 매달리는 이유는 의지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더 꼬집어 말하자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지요. 사람을 괴롭히는 두려움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

“사람은 옛적부터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숱한 노력들을 해왔습니다. 일전에 제가 구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그들은 술법의 힘으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사령술에 빠져들었지요. 술법이 아니라 신을 찾는 종교인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이 사령술을 탐닉했다는 소리인가?”

“그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은 신에게 저마다 원하는 것을 투영하지 않습니까? 신은 인간들이 바라는 형상을 취하기 마련입니다. 신도들이 죽음을 주무르길 원한다면 신은 그가 할 수 있는 내에서 그 비슷한 것이라도 내려주겠지요.”

“하지만 자네가 몸 담았던 교단은 그러지 않았다 하지 않았나.”

“그래서 일부라 말씀드린 것이지요. 쓸 데 없는 말일 수도 있으나, 제가 몸을 담았던 교단이 추구한 것은 풍요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풍작에 대한 염원을 신에게 투영했었지요. 때문에 교단에서 내려오던 비술 중에는 땅을 비옥하게 바꾸는 술수도 있었습니다.”

“그거 대단하군. 그것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추수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예. 대신 땅의 너비만큼 산제물이 필요하지요.”

“…….”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사신이니 사교니 불린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저희를 박해했던 제국의 교단들이 흠결 하나 없이 마냥 성스러운 곳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말에 날이 섰군.”

“아무래도 당한 게 있어서 말입니다. 이전에야 이런 말을 하기가 눈치 보였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모렌스 남작이 사교와 손을 잡았다. 때문인지 영주님께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시는 것 같다.”

“오랜 세월 음지에 숨어있을 수밖에 없던 자들입니다. 긴 시간 동안 무너지지 않고 세를 유지해왔다면 칼을 갈아도 단단히 갈았을 터. 어떤 위험을 품고 있을지 모르지요.”

“너희는 그렇지 않았다는 건가?”

“어찌하여 자꾸만 지나간 일을 들추시어 저를 곤란하게 하십니까. 그리고 저희 교단은 나름대로 평화적인 교단이었습니다. 말씀드렸듯, 저희는 풍요를 숭상했습니다. 하하.”

슬쩍 꼬집는 말에도 넉살 좋게 웃음을 흘린다. 군터는 요 근래 제법 살이 붙어 포동포동해진 모페이브를 보며 처음 그를 만났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때의 그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사교의 사제가 아닌 저택의 집사 모페이브에 익숙해진 것이다.

“말했던 것은 어찌 되었나.”

“준비해놓았습니다. 말씀을 올리기 위해 장주님의 훈련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바로 만나도록 하지.”

“이곳으로 데려오리까?”

“아니. 안에서 하지.”

군터는 아직도 식을 생각을 않는 몸을 이끌고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 봄에도 어쩐지 친숙한 느낌이 드는 사내 세 명을 만났다.

“인사 올려라. 코누다이안의 기사, 군터 경이시다.”

“됐다. 베이고르인도 아닌 이들에게 예를 받아 무엇 하겠느냐.”

통역으로 붙은 아쿼러즈 출신 십장이 입을 다물었다. 군터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그와 병사들을 내보냈다. 물론 그들은(정확히는 그들을 이끄는 십장이) 그럴 수 없다며, 장주님의 호위를 서야 한다며 반발했지만.

“내가 내 한 몸 지키지 못할 것 같으냐? 마음은 알겠다만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허면 저희는 이만.”

군터의 단호한 한 마디에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조용하고 널찍해진 집무실에서 군터는 편히 자리에 기대어 앉았다. 반면 어정쩡하게 선 타칸 연합국 사내들 셋은 죄인마냥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는 군터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가 고된 훈련 탓에 평소와 달리 풀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와 달리 너무나 몸이 고단하다보니 은연중 흘러나오는 기세를 제대로 갈무리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파악치 못했지만, 군터는 자신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셋의 모습이 꽤 괜찮다고 느꼈다. 어차피 그가 이들과 술 한 잔 기울이자고 부른 것도 아니고, 그저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불렀을 뿐이니.

“그리 겁먹을 필요 없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불렀을 뿐이니. 너희가 아는 것을 소상히 이야기해준다면 섭섭지 않게 챙겨서 무사히 돌려보내주마.”

유창한 초원어가 흘러나오자 한 사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당신, 초원 출신이오?”

“그렇다. 질문은 지금것 하나만 받도록 하겠다. 말했지만, 이 자리는 묻기 위한 자리지 답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니까.”

“얼마든지 물으시오. 아는 대로 다 답하리다. 하지만 물음이 끝나면 무사히 보내주겠다는 말은 지켜주기 바라오.”

“약속은 틀림없이 지킨다.”

군터는 그들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물은 것은 현 타칸 연합국의 상황.

“난리도 아니지. 부족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소. 특히 이번 족장회의에서 있었던 참극으로 많이들 충격을 받았지. 대족장…타르가이 베르겐은 타칸 연합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단 하나의 부족으로 재탄생 시키려 하고 있소.”

“쌓인 게 많은 것 같군.”

“당신도 초원 출신이라면 알 거요. 우리는 힘의 논리에 익숙하지. 강자들이 길잡이 역할을 자처한다면 우리는 그를 따를 거요. 옳고 그름은 차후에 논하더라도 일단은 그 뒤를 따르겠지. 하지만 타르가이 베르겐은 이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소. 그는 모든 초원인들을 다스리려 하오. 그것도 매우 거친 방법으로.”

사내의 목소리는 분노에 찼다. 입을 열지 않은 다른 두 사내 역시 동조하는 기색이었다.

“일전에, 나는 타르가이 베르겐이 존경 받는 대족장이라고 들었다만.”

“그런 적도 있었지. 그가 초원을 일통한 후, 대병력을 이끌고 남진하여 따뜻한 땅을 사람들에게 선사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분명 존경 받는 대족장이었소. 어떤 자들은 그를 일컬어 신의 현신이라고 하며 숭상하기도 했었지. 하지만 이제 그때의 현명한 대족장은 없소. 남은 건 야욕, 그리고 폭력만을 탐닉하는 괴물 뿐.”

“…….”

이번에는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었지. 대족장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두 번째 전쟁의 막바지 때부터요.”

“맞아. 대전사가 전사한 이후부터였을 거다. 생각해보면 그때 말들이 많았지.”

“무리하게 힘을 쓰는 바람에 정양해야 한다고 보름씩이나 바깥출입을 삼간 적도 있었어.”

두 사내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처음에 말을 했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확실히, 타르가이 베르겐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대전사가 전사한 이후부터였소. 그 뒤로 그는 서서히 변해갔지. 용맹과 함께 너그러움으로 이름 높았던 그가 신경질적인 모습을 자주 보이더니, 부족회의에서도 강압적인 발언들을 서슴지 않기 시작했소.”

“잘 아는군.”

“잘 알 수밖에. 그가 말도 안 되는 폭언과 무력으로 족장들의 무릎을 꿇리는 모습을 이 두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

“직접?”

사내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내 아버지께서는 부족을 이끄는 우두머리셨소. 난 아버지를 따라 멀찍이서 부족회의를 참관할 수 있었지. 그 자리에서 난 타르가이 베르겐이 완전히 괴물이 되었다는 걸 확신했소.”

“족장의 아들이라. 그런데도 이 먼 땅까지 왔다는 말인가?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지 그랬나.”

여기서 말하는 고향이란 그들이 떠나온 갈색초원을 이름이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나, 바르바피들이 도망친 자들을 쫓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버렸지. 초원은 이미 놈들의 사냥터가 된지 오래요. 타르가이 베르겐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타칸 연합의 땅에서 살아갈 수 없소.”

“…너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타칸 연합은 이미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군. 연합이라는 말이 무색해.”

“그렇소.”

“하지만 의아하군. 그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겉으로 보기에 타칸 연합은 그리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타르가이 베르겐의 힘이 그만큼 엄청나기 때문이오.”

“음?”

“그 자…아니, 그 놈은 미쳤소. 연합의 젊은 전사들을 대거 징발해 ‘우리’에 밀어 넣고 있소. 웃기는 건, 처음 ‘우리’에 무분별하게 전사들을 투입하는 것을 강하게 금지시킨 것이 바로 타르가이 베르겐이라는 것이오. 놈은 자기가 행한 일을 이제와 뒤집고 있는 거요.”

“잠깐. ‘우리’라고 했나? 그게 뭐지?”

“편의상 줄인 말이오. ‘신의 우리’라고 하지. 진짜 이름은 따로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 대해 아는 자는 없소. 그나마 ‘신의 우리’라는 이름을 아는 것도 족장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연합 내의 고위 인사들과 타르가이 베르겐의 수하들 정도요.”

사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 우리는…고대 신의 유물이오. 존재조차 아는 자가 없었는데, 타르가이 베르겐에 의해 발견 되었다고 하지. 그 우리에 들어간 자는 신의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그 시험을 통과하면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소. 그 축복이란…….”

“바르바피로군.”

“맞소. 바르바피요.”

그저 이야기나 듣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만든 자리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군터는 이, 족장의 아들이라는 사내와 좀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되도록 조용히.

“일행이 있나?”

“살아남은 일족들을 이끌고 있소.”

“일족이라? 얼마나 되지?”

“모두 이백이 조금 넘어가오.”

군터는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꺾었다.

“이백이라고?”

“대부분 도시 바깥에 숨어 있소. 나와 몇 명의 전사들이 도시 내의 상황을 살피러 먼저 들어온 거요.”

상황을 살피러 들어왔다 에둘러 말했지만, 실은 나머지 인원들이 어떻게 은밀히 들어올 구멍이라도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중개인을 통한다면 경비병들의 검문을 피할 방도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

“좋아. 당분간은 내가 책임지고 그들을 돌봐주겠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 몸에는 너희와 같은 피가 흐른다. 내 사정이 여유로우니 갈 곳 없는 너희에게 자그마한 도움을 주겠다는 뜻이다. 의심할 것 없다. 들을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그러지 말라고 해도 너희를 보낼 것이니.”

의심스럽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는 그들에게 군터는 픽 웃어 보였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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