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11개의 현이 춤을 춘다. 쭉 뻗은 손가락이 부드럽게 쓸어내릴 때마다 아름다운 운율이 퍼져 나온다. 네 명의 어린 사내아이들, 다섯 명의 여자아이들이 저마다 눈을 감거나 입을 벌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통적으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디리링, 마지막으로 울린 가느다란 운율을 끝으로 연주가 끝이 났다. 행복한 꿈에 젖어 있던 아이들은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전하. 한 곡만 더 연주해주시면 안 되나요?”
한 아이가 말했다. 밝은 주황색 머리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전하라 불린 사내, 군주 키리스트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웃었다. 머리카락에 가려 있던 얼굴이 다 드러나니 주변이 빛나는 듯했다. 마침 창밖으로 들어온 오후의 고즈넉한 햇살마저 그 빛을 덮지 못했다.
“마음에 남기는 아쉬움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마침표지.”
“그게 무슨 뜻인가요 전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 거라는 뜻이란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들을 보며 키리스트는 자상하게 웃었다.
“자. 이제 집에 갈 시간이구나.”
아쉬움을 삼킨 아이들이 물러갔다.
“주군. 16황자가…….”
“미련하게 군것치고는 오래 버텼지.”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이들은 시작이야. 이제 막 문을 연 시기. 언제까지 갈 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나아갈 일만 남았지. 녀석들이 웃는 걸 보고 있노라면 덩달아 웃음이 나온다.”
“…….”
“동경이고, 질투다. 나 역시 저런 시절이 있었겠지.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 일이지만.”
미소가 비틀린다. 내팽개치듯 던진 리라는 방 한 편의 쿠션 위로 떨어졌다.
“이제 몇이나 남았느냐?”
“아직까지 황도 안에 남은 황자들은 모두 열 명입니다.”
“딱 좋군.”
“하오나 근 시일 내로 아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5황자가 13황자를 벼르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흐흐. 사나운 녀석이지. 눈에 보이는 대로 물어뜯는군. 여기서 더 줄어들면 곤란하다. 드러나지 않게 적당히 개입해서 황도 밖으로 도망칠 수 있게 해라.”
“예.”
“무뢰배 놈은?”
“휘하 용아들을 모두 거느리고 영지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갔는가. 제법 조용히 움직였군.”
“동이 트기도 전에 빠져나간 걸로 보입니다.”
리비암은 이름이 바뀌고 제국의 중심이 되기 전에도 이미 왕도였다. 그 뒤로도 무수한 역사가 덧씌워졌고, 그 기나긴 흐름 속에 온갖 은밀함이 내려앉았다. 이 세계 제일의 도시에 얼마나 많은 비밀이 숨어있는지는 이곳에서 백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보낸 키리스트마저도 다 알지 못했다.
“다른 놈들의 동태는?”
“별 달리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쿠엘단인가.”
“예. 북쪽으로 종복을 보낸 것 같습니다.”
“바로 움직일 줄 알았더니, 조금 늦었군. 뭐, 또 무슨 괴상한 것에 집착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조치를 취하오리까.”
“필요 없다. 놈은 그저 북쪽에 나타났다는 화신(化身)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화신…바크렌을 침공했다는 그 야만인 말씀이십니까.”
“그래. 볼 것 없는 사멸한 땅이라 생각했는데, 그곳에도 신비는 있었던 모양이지.”
“고대의 잔재일까요.”
“그렇겠지. 어쩌면 쿠엘단 녀석은 뭔가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걸지도 모른다.”
“허면…제지는 아니더라도 주시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쿠엘단을 모르느냐. 황제가 사라진 지금, 녀석은 건드리지 않으면 나서지 않을 녀석이다. 자신만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놈을 굳이 나서서 건들 필요는 없지.”
“소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언약비는?”
“…송구합니다. 가용 인원을 모두 투입하였으나 단서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애초부터 별로 기대치 않았다. 황제가 그리 호락호락한 놈은 아니었으니.”
말년에 이르러 추해지기는 했지만, 그 전까지는 그야말로 세상 전체를 집어삼킬 것 같은 야욕과 그에 걸맞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행사는 항시 철두철미 했으며,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자그마한 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 황제다. 하물며 제국 제일의 비보라 할 수 있는 언약비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다른 놈들도 슬슬 눈치를 채고 눈에 불을 켜겠지.”
“혹여 언약비가 다른 자들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단언컨대, 5년 안으로는 어림도 없다. 황제는 그리 허술하지 않아. 특히 말년에 이르러서는 의심병이 골수까지 치밀었었지. 어설프게 숨겨놓았을 리 없다.”
키리스트의 단언에 무관은 입을 다물었다.
의심, 걱정 따위는 없다. 그의 말은 그의 휘하들에게 있어 신앙과도 같다. 그가 말을 하면 믿는다, 따른다. 그뿐이다.
“하오면, 이제부터는 황자들을 빼돌리는데 전념해야겠군요.”
“그래. 이제 쭉정이는 다 걸러져 나갔다. 남은 녀석들은 그럭저럭 쓸 만한 인재. 여기서 끝나버리기에는 아쉽다.”
키리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풀어놓았던 검을 쥐었다.
“길었던 소란도 막바지로구나.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오늘의 마지막 태양이 자취를 감추어 간다. 키리스트는 그 마지막을 눈에 담았다. 저물어가는 하늘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
연회가 끝이 났다. 왔던 자들이 돌아가고, 들떴던 거리는 약간의 여운을 간직한 채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잠잠하군. 네 예상과는 다르게 말이다.”
“너무 타박하지 마십시오. 그쪽도 뒤가 없으니 나름대로 신중을 기하는 것이겠지요. 어차피 한 번 뿐입니다. 실패하면 그걸로 끝이 아니겠습니까.”
“흥. 놈들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렌스 남작의 목을 딴다는 건 불가능할 거다.”
“그렇겠지요. 그들도 알 겁니다.”
“알면서도 하는 건가? 용감하다 해야 할지, 무모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군.”
“현명한 자들이었다면 볼드가 넘어갔을 때 순순히 항복했겠지요.”
“충의다. 현명한 것과는 상관없지.”
“충의라……. 멋진 말이지만,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군요. 어차피 충성해야 할 대상이 사라진 상황이지 않습니까. 굳이 멀쩡한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매달릴 필요가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다. 나 역시 자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으니.”
“하하하. 실은 저 역시 그렇습니다. 아참. 그보다 들으셨습니까?”
“음?”
“타칸 연합국 말입니다. 요새 들리는 소문이 영 좋지 않더군요.”
“무슨 말이지?”
타칸 연합국이라는 말에 군터는 관심을 보였다. 지금은 베이고르의 기사가 되었지만, 일찍이 그는 타칸 연합군과 생사를 오가는 혈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아그니스 체스퍼의 공로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 ‘푸른 사자’의 명줄을 끊은 것이 바로 그였다.
“대족장의 폭압적인 정치 때문에 여러모로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듣기로는 근래에 들어 이주자 및 도망자들이 심심찮게 생기고 있다더군요.”
“이주는 그렇다 쳐도, 도망자라고?
“대족장에게 각을 세우다 몰살을 당한 부족들도 있다고 합니다. 당장에 목이 서늘해지면 도망칠 마음이 없다가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몰살이라니. 그 정도라면 도망자가 생길 만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상하군. 내가 그 대족장이란 자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폭군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는데.”
전장에서 적으로 만나 싸웠지만, 이리저리 풍문으로 들은 소문이 있었다. 척박한 삶의 굴레에 묶인 초원민족에게 따뜻한 땅을 선사하기 위해 초원을 일통하고 내륙을 정복하러 온 위대한 족장의 이야기. 다소 과장된 면이야 있겠지만, 실제로 1차 재건전쟁 이후 타칸 연합국을 다스리는 대족장이란 자의 치세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적지 않았다. 적이었지만, 흘러들어오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군터는 대족장이라는 자가 타칸 연합의 훌륭한 성군 정도는 아닐지라도, 열심히 하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랬던 자가 폭정이라? 더 넓은 땅을 얻었으니 마음이 바뀐 것일까?
“알고 계십니까? 위글로우에도 타칸연합의 부족민들이 몇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타칸 연합의 현 상황이…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구 바크렌을 놓고 보면 중부 일대와 남동부를 베이고르가, 마찬가지로 중부 일대와 서북부를 타칸 연합이 나눠가진 상황이다. 그리고 타칸 연합의 대족장부(府)는 서북부의 갈색 초원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서 갈색초원과 내륙을 동시에 통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타칸 연합의 영토에서부터 도망쳐온 자들이 위글로우까지 왔다면 답은 하나다. 혹시 따라붙을지 모를 추격자들을 피해서 대족장부와는 정반대라 할 수 있는 이곳까지 도망쳐 온 것이다. 멀리 도망은 가야겠고, 그렇다고 바로 얼마 전까지 치고받았던 적국인 제국으로 도망칠 수는 없었을 테니, 현실적인 선택지 중에서는 가장 안전한 선택을 한 것이리라.
“그들이 들어온 게 언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영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들을 불러들여 정보를 얻으신 모양이더군요.”
“흠.”
“이미 왕국 내에서도 알 만큼 다 알고 있겠지요. 당장 무슨 행동을 취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국의 혼란은 가라앉을 생각을 않고 있으니.”
“비약이다. 아무리 혼란에 빠졌다 해도 제국은 제국. 대적을 앞에 두고 갈라서기라도 할 성 싶은가.”
“대국을 움직이는 건 경과 저 같은 범인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높으신 분들이 보는 그림은 저희가 보는 것과는 다를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별 일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
미겔과 이야기를 끝낸 후에 홀로 남은 군터는 생각에 잠겼다. 미겔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타칸 연합이라.’
명분은 있다. 베이고르의 고토는 지금과 같은 반쪽이 아니라 구 바크렌 전역. 만약 제국이 움직이지 않는다는…아니, 움직이지 못한다는 확신만 있다면야 지금처럼 타칸 연합이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한 번 시도를 못해볼 것도 없어 보였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마치 왕이라도 된 양. 큰 국면을 고민하고 있다. 주제 넘는 일이고,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기대하고 있는 건가.’
솔직해지자면, 그는 전쟁을 바라고 있다. 전쟁광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상인이 장사를 하면서 그러하듯, 그는 군인으로서, 무인으로서 성취감을 느끼는 무대가 전장인 것뿐이다. 그 전장은 전쟁이 없으면 만들어질 수 없다. 그렇기에 바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건지 모르겠군.’
아마도,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다.
살기 위해 도망쳤고, 그렇게 닿은 곳에서 얕보이고 싶지 않아 출세를 갈망했다. 그때를 돌아보면 서른을 넘은 지금은 충분히 그때의 꿈을 이루었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한다. 지금은 어린 시절의 갈망을 풀었지만, 그보다 더 큰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왜일까, 라고 자문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언제부터였나, 라고 물어봐도 역시 마찬가지다.
실은 이런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갈망한다. 왜 목이 타는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마실 것을 원하듯이.
*
사흘 뒤.
아침 일찍 훈련을 마치고 집무를 보고 있는데 살라스가 들어와 급보를 전했다.
“브록스로 돌아가던 모렌스 남작 일행이 습격을 받았다 합니다. 습격자들은 구 볼드의 잔당들이라고 합니다.”
“실패했겠지.”
“예. 모렌스 남작은 무사하다고 합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부질없다고 하기에는 무모한 일에 도전한 자들의 용기가 너무 값지다. 그렇다면 불운하다고 해야 할까?
‘나쁘지 않지.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을 게 아닌가.’
군터는 그의 장원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길게 적히지 않은 글이 한동안 잘 읽히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이 추운데 건강 유의하시고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