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247화 (247/1,064)

<-- 2부 -->

“장주님. 감찰대장과 함께하기로 하신 겁니까?”

살라스가 물었다.

“그래. 일단은 그리하기로 했다.”

“미트라스 경과 위벨 경이 자주 만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때문입니까?”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다. 그런 것도 있지. 본래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만, 아무래도 챙길 것이 많아지니 그럴 수가 없게 됐다.”

다른 수하들은 아무도 없다. 할렌조차도. 오직 살라스와 대작하는 자리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도 있다. 홀가분하게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살라스가 먼저 거론해주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해 살라스가 불편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살라스는 상당히 고지식한 면이 있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군터 자신보다도 더 철저한 군인이 살라스였다. 정치 알력 같은 것과는 담을 쌓아도 몇 겹을 쌓은 성격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살라스는 별 말 없이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달리 할 말은 없느냐?”

“장주님께서 숙고하시어 결정한 일에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네가 평소 감찰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강직한 군인의 모범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살라스와 대장을 닮아 껄렁거리는 기질이 다분한 감찰대는 성격이 정반대라 할 수 있다. 평소 마주칠 일이 좀처럼 없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살라스가 감찰대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는 것은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랬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그 때문에 제가 문제를 일으킬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그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난 그저 네 마음을 묻는 것이다.”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장주님마저도 그러시지 못하는데, 제가 어찌 심술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에 대해서는 심려치 마십시오. 장주님께서 무엇을 하시든, 저는 전심으로 따를 것입니다.”

“…….”

그 말을 들은 군터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살라스의 잔을 채워주었다. 살라스가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았다.

“그때,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느냐?”

“부질없이 잃을 뻔했던 목숨을 구한 날이 아닙니까.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난 그때, 그저 군인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한다면 기구한 자들에게 자그마한 은혜 정도를 베풀었다 여겼지.”

“…….”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때 운이 따른 것은 너 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구나.”

“예?”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소리다. 내 주제에, 이처럼 충직하고 실력까지 있는 수하를 어디서 얻을 수 있었겠느냐.”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거두어주시지요.”

“아니. 난 빈 말은 하지 않는다. 그날 나와 마주친 것이 네게 행운이었다면, 너의 마음을 얻은 것 역시 내게 있어 행운이었다.”

군터는 씩 웃었다. 간만에 짓는 진심어린 큰 미소였다.

“들자. 분발하거라. 오늘은 나도 좀 취하고 싶으니.”

“어려운 명을 내리시는군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색하게 웃은 살라스는 그의 말처럼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끝내 군터의 얼굴에 홍조를 끌어내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군터는 휘하 병사를 시켜 살라스를 귀가하게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자작을 이어갔다.

‘이제는 마음대로 취하지도 못하는군.’

신체 전반의 능력이 인간을 넘어선(超人) 뒤부터는 독한 술을 마셔도 좀처럼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계속 마시다보면 몸이 뜨끈해지는 느낌까지는 들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정말로 주점 하나를 문 닫게 할 정도로 마시면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지경까지 마시는 것은 어지간한 대식가인 그로서도 고통이 될 것이기에 굳이 시도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 난 틀리지 않았다.’

의미 없이 잔을 채우고 들이키기를 반복하던 와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은 녀석들이 나를 따른다. 난 그 녀석들을 책임져야 한다. 그 또한 책무가 아니겠는가.’

눈여겨 본 이포레테스 외에 몇몇 상인들이 그의 그늘 아래 들어왔다. 음흉한 감찰대장 미겔과도 어찌 되었든 손을 잡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단언컨대, 그 모든 것들은 일신의 영화만을 위한 결정은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라면, 나 또한 그리 해야 하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겠지.’

탁!

빈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잔도 비었고, 병도 비었다. 더 마시고자 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마실 수 있지만 무엇 하러 그런단 말인가. 마셔도 취하지 않고 대작할 상대도 없다. 자리가 길어지면 덩달아 생각이 길어지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애꿎은 마음만 흐릴 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장주님.”

“벨리사는?”

“마님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또 영주 부인을 만나러 갔나.”

“예.”

“…그래. 알겠다.”

일찍부터 시작한 술자리라 아직 시간이 늦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벨리사가 영주 부인을 만나러 간 것은 해가 중천에 걸렸을 무렵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니. 여인들끼리 어지간히도 나눌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둘이 상당히 잘 맞나 보군.’

처음에 벨리사가 사귀었던 친구(?)는 미트라스 부인이었다. 이름은…기억이 나지 않지만 상당히 입이 싸 보였던 여자였다. 그 후에 영주 부인이 위글로우로 오고 나서는 셋이서 어울려 다니는 듯싶더니, 언젠가 부터는 미트라스 부인이 떨어져나가고 둘이서 어울리는 것 같았다. 아마 영주 부인이 불임이라는 소문이 점점 나돌기 시작할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벨리사로부터 직접 들었다. 그때 벨리사가 미트라스 부인을 이야기하며 너무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다. 좀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특히나 험담 같은 것은 입에 담지 않았던 벨리사였기에 미트라스 부인에 대해 토로(?)하던 것을 분명하게 기억했다.

‘재미있군.’

미겔이 대놓고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와 미트라스의 관계가 그리 매끄럽지 않다는 것은 군터 역시 알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 미트라스가 건의할 양자 건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대립하게 되리라.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에서 기 싸움을 벌이게 되겠지.

‘양자라. 그 여자도 참 기구하군.’

정략혼의 희생자라 할 수 있는 여인이다. 그런데 그렇게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이런 궁벽한 곳까지 와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다니. 곱게 자란 권세가의 여인으로서 상상도 할 수 없던 삶이리라.

‘벨리사가 연민을 느낄 만도 해.’

영주 부인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벨리사가 입버릇처럼 했던 ‘불쌍하신 분’이라는 말이 이해가 갔다. 처음 그녀의 곁에 개미처럼 모여들었던 이들은 이제 대부분 떠나갔다. 그나마 남은 자들조차 불안해한다. 그럴 만도 하다. 영주가 새로운 부인을 들일 것이네, 리에론 가문에 사람을 보낼 것이네 하는 마구잡이 소문들이 매일 같이 설득력 있게 퍼져나가는 상황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영주 부인의 곁에 붙어있는 자들은 둘 중 하나이리라.

영주 부인을 떠나서 달리 붙을 곳이 없거나, 아니면 영주 부인이 기사회생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저버리지 못했거나.

대부분의 경우가 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벨리사는 그렇지가 않다. 그녀는 저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영주 부인을 연민하고 있을 뿐이다. 순진하게도 말이다.

*

길었던 연회의 나날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간만에 관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미트라스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주님. 영주님의 선정 아래 위글로우와 코누다이안이 나날이 번성해가고 있습니다. 곧 크루기스 일부까지 영지에 병합될 터이니 영주님의 선정 아래 놓일 땅과 백성들은 더욱 늘어나겠지요. 소신은 영지의 기사로서, 영주님의 신하로서 맞는 매일이 보람차고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단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이 있사옵니다.”

“기탄없이 말하라.”

“예. 다름이 아니오라 아직까지 영주님께서 후사를 가지지 못하셨다는 점이 걱정이 되옵니다. 물론 영주님께서는 아직 정정하시고, 향후 수십 년 이상을 코누다이안의 주인으로서 굳건히 서 계실 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후사의 공백은 여러 우려를 낳을 수밖에 없음을 영주님께서도 헤아리고 계실 줄 아옵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는 일이던가.”

“신하된 자로서 어찌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사옵니까. 다만 소신은……”

“말씀하시는 중에 미안하지만, 내 한 마디 하겠소.”

미트라스의 말이 끊겼다. 여유롭게 말을 이어가던 그는 당황하여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다른 이들의 것보다 확연히 더 커 보이는 큰 의자에 기대어 앉은 군터가 있었다.

“영지의 미래를 걱정하는 미트라스 경의 마음은 내 충분히 이해하겠소. 지금 하는 말도 영주님에 대한 충심에서 우러난 충언이라고 믿고. 하지만 이 몸은 조금 과하다고 생각하오.”

“과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인지.”

“경이 헤아리는 것을 설마하니 영주님께서 모르시겠소? 후계에 대한 걱정은 누구보다 영주님께서 더 크실 거요. 그런데도 이제껏 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함은, 영주님께서 살피시는 다른 부분이 있어서가 아니겠소.”

“…….”

덤덤하게 말하지만 그 내용은 면박에 가까웠다. 그를 느꼈는지, 느닷없는 개입에 약간의 당혹스러움만이 있었던 미트라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릇 신하된 자라면, 충심으로 따르는 것만큼이나 주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그래서 경의 충언이 과하다 말한 거요.”

“자, 자.”

미트라스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막시밀리언이 목소리를 내어 달아오르는 분위기를 식혔다.

“나를 위하고 영지를 위하는 경들의 마음을 어찌 내 모르겠나. 미트라스 경의 말도 일리가 있고, 군터 경의 말도 일리가 있다. 다만 후계에 대해서는 나 역시 따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맞는 자리에서 다시 논하도록 하지.”

“…예.”

“옛.”

막시밀리언의 선언으로 두 기사의 대립은 끝이 났다. 하지만 묘하게 변한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미트라스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위벨은 은근한 눈으로 군터를, 그리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표정한 미겔을 슬쩍 번갈아 보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가.’

미트라스가 후계 운운할 때부터 우려는 있었다. 아니, 우려라고는 했지만 결국 이는 언젠가는 자연스레 벌어질 일이었다.

위글로우부터 시작해, 그간 코누다이안의 권력은 오직 영주인 막시밀리언에게 몰려 있었다. 그는 제국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던 시절부터 힘으로 모든 것을 일궈낸 무장이었다. 그의 뒤에는 리에론 가문이라는 든든한 배경도 있었고, 그런 힘을 바탕으로 막시밀리언은 이제껏 그에게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쳐내왔다.

덕분에 이제 그에게 적은 없다. 적어도 코누다이안 안에는 말이다.

하지만 적은 없을지라도, 자그마한 소요를 일으킬 만한 요소들은 얼마든지 산재해 있다. 이는 필연적인 것이다.

사람이 어느 정도 모이면 그 안에서 파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은 영주에게 반심을 갖느냐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인간이라는 것이 본래 그리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재물과 권력을 탐하는 것은 본능이고, 이런 본능은 막시밀리언이 아니라 그 할아비라고 할지라도 통제할 수 없다.

그 본능적인 욕심을 가장 먼저 드러낸 것이 미트라스였을 뿐이다. 이번 양자 건 역시 따지고 그 일환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 적절한 명분이 아닌가? 그의 제안을 막시밀리언이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고, 설혹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공개적으로 그런 건의를 올린 것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음이다.

그런데 거기에 같은 기사인 군터가 나서서 찬물을 뿌렸다. 이유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 역시 같은 의도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이리 나설 자가 아니다. 부추긴 자가 있겠지.’

심증일 뿐이지만, 거의 확신이다. 위벨은 자신은 전혀 상관없는 척 빠져 있는 미겔을 눈여겨보았다.

‘영주님께서는 기꺼우시겠군.’

아래로 흐르는 물이라 할지라도 한 곳에 쏠린다면 부담이다. 그러나 두 곳으로 나뉜다면 보기에도 좋고, 흘러넘칠 염려도 덜 수 있다.

‘아니. 어쩌면…영주님께서 직접?’

그런 생각도 떠올려봤으나 곧 거뒀다. 그런 지시를 내리려 했거든 군터가 아니라 자신을 불렀으리라. 이는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적격의 문제다.

‘아무튼 이리 되면 미트라스 경은 속이 타겠군.’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있지만 종종 가시가 선 분위기가 느껴진다. 위벨은 오늘부터, 그간 심심할 정도로 평화로웠던 코누다이안의 정계에 한바탕 변혁이 일 것임을 확신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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