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아니.”
“음?”
각오로 굳었던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순간, 칼집을 벗어난 칼날 같았던 기세가 다시금 칼집 속으로 들어갔다.
미겔은 그를 보며 픽 웃었다.
“보아하니 여기서 우리가 붙으면 누가 이긴다고 해도 온전히 끝나지는 못할 것 같은데, 굳이 그럴 필요 있겠소? 앞서 말했듯, 흐른 피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지금부터는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지금 당장 여길 떠나 돌아오지 마시오. 코누다이안……. 아니, 위글로우 밖에서 모렌스 남작을 노리건, 말건 신경 쓰지 않겠소. 하지만 이곳에서는 안 돼. 우리 영주님의 위신이 걸린 문제니까.”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우리를 반드레온에게 바치려는 함정이 아닌가.”
“그러니 지금 당장 떠나라는 거지. 우리가 모렌스 남작에게 일러바칠 일은 없겠지만, 설혹 그렇다 해도 그대들이 먼저 떠나버리면 될 일이 아닌가? 어차피 그대들이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는 건, 여차하면 빠져나갈 구멍 정도는 마련해두었다는 뜻일 테니. 안 그렇소?”
“…어째서 우리를 살려 보내주는 거지?”
“말했지 않소. 괜한 피를 흘리기 싫기 때문이지.”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납득이 되지 않아.”
“납득이 되지 않으면 어쩔 텐가.”
미겔이 웃음을 지웠다. 서늘하게 식은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며, 군데군데 붉은 얼룩이 진 검을 들어올렸다.
“착각하지 마시오. 난 지금 그쪽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야. 어차피 여기서 싸운다면 너희들은 어찌 되었든 다 죽는다. 단지 말했듯, 우리도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기에 이렇게 제안하는 것뿐. 나는 제안을 했고, 이제 그쪽은 택하면 된다. 싸우고 죽을 것인지, 싸우지 않고 살 것인지.”
“…….”
사내와 미겔의 시선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
“그래서, 녀석들을 그대로 보내주었다?”
“예. 너무 급박하게 일어난 일이라 영주님께 고하지 못하고 제 독자적으로 판단을 내렸습니다.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여우같은 놈.”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미겔. 그런 그를 보며 막시밀리언은 피식 웃었다.
“판단의 근거는?”
“수는 적으나 하나하나가 정예였습니다. 특히 그들을 이끄는 자는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붙었다면 이겼다한들 감찰대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 그렇게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겠지.”
막시밀리언이 대꾸했다. 그러자 미겔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네 생각을 다 안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막시밀리언과 시선을 마주치고, 그 역시 덩달아 흐릿하게 웃었다.
“예. 모렌스 남작에게 조그마한 골칫거리라도 된다면 놔두는 편이 이득이 아니겠습니까.”
“놈들이 위글로우를 빠져나간 것은 확인했나?”
“예. 추가로 눈들을 더 뿌려놓았으니 만에 하나라도 놈들이 다시 도시로 들어온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웃다니. 죄를 청하러 왔다는 자의 태도가 아니로군.”
“송구합니다.”
미겔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그의 두 무릎은 땅에 닿아 있었다.
“사사로이 재물을 모으든, 세를 규합하든…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책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든, 나를 기만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충성에 관련된 문제니까. 내게 충성하지 않는 자를 밑에 둘 이유는 없지.”
“…실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네가 미트라스와 섞이지 못함을 알고 있다. 군터와 뜻을 모아 무언가를 해보겠다면,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설령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한들, 이번 같은 일은 한 번뿐이다. 알겠느냐?”
쿵!
미겔이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완전한 굴종의 자세를 취한 그는 끓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목을 걸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임을 맹세하겠나이다.”
“그래. 내 믿지.”
이마 한가운데가 벌겋게 달아오른 미겔이 공손한 자세로 물러났다. 그러자 장식처럼 가만히 서 있던 코르넬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영주님. 이번에는 감찰대장에게 유독 엄하셨던 것 같사옵니다.”
미겔이 소상하게 올린 보고에 따르면 그가 독단적으로 급히 움직였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분명했다. 약간의 경고 정도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조금 전처럼 살벌하게 대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하는 것이 코르넬의 생각이었다.
“위험한 녀석이니까. 평소에 고삐를 잘 쥐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감찰대장이 위험한 자라고 보십니까.”
“미트라스는 뻔해. 녀석이 뭘 원하는지는 분명하지. 때문에 녀석의 움직임에는 항상 예측 가능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미겔 녀석은 달라. 처음에는 그저 제 몸 하나 보신하고, 적당히 욕심 있는 녀석인 줄로만 알았는데…조금씩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지.”
사람을 보는 눈에는 어느 정도 자부심이 있는 막시밀리언이다. 그런 그였기에 완전히 파악이 되지 않아 미겔에 대해서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감찰대장이 군터 경에게 손을 내밀었으니.”
“글쎄. 자네도 알다시피 군터는 수가 좋은 편은 아니지 않나.”
“복잡한 수는 없지만, 대신 우직함과 힘이 있지요. 감찰대장이 혹여 엇나갈 기미를 보인다면 단호하게 제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래. 옳은 말이네. 그나저나 복잡하군. 밖으로든 안으로든 신경 써야할 일이 이리도 많으니. 무엇하나 시원한 것이 없어.”
“윗사람으로서의 고충입니까?”
“음. 아래에 둔 것이 늘어날수록 고려해야 할 것들도 덩달아 늘어나지.”
“영주님의 심려에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막시밀리언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가. 그저 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네. 아는가 코르넬? 이 출세라는 것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네. 높이 올라갈수록 가팔라지지. 다섯 사람이 서도 충분했던 것이 계속 올라가다 보면 세 사람이 서기에도 협소해져. 거기서 더 올라가면 나 한 사람 말고는 누구도 옆에 둘 수가 없어. 그 고독이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괴로움이지.”
아무도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설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즐거움임과 동시에 괴로움이고 힘겨움이다. 사람은 본시 고독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힘겨워하면서도 끊임없이 견뎌낸다. 권력의 달콤한 맛에 취해서 말이다.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그러니 자네는 은퇴한다는 말일랑 접어두고 계속 내 곁에 있어주게나.”
“…받잡기 버거운 말씀을.”
“한평생 무인으로서 살아온 자네에게 이런 말이 가혹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굳이 검을 쥐지 않아도 괜찮네. 난 무인으로서의 자네도 좋지만, 내 곁에 있어주는 자네가 더 좋으니.”
“…….”
“감상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두지. 그건 그렇고, 어찌 생각하는가? 볼드의 잔당들에 대해서.”
“모렌스 남작은 저항군의 수장을 참했다고 공표했습니다. 체면을 살리겠다고 있지도 않은 일을 떠들어댈 자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같은 생각이다. 그렇지만 의아하지 않은가? 미겔의 말을 들어보면…머리가 잘려나간 패잔병들 같지는 않아 보인다는 말이지. 모든 것을 다 잃은 자들에게 그만한 독기가 남아있다는 것은…솔직히 믿겨지지 않아.”
“다른 무언가가 있으리라 보십니까?”
“적어도 그들을 똘똘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안 돼. 아마도 미겔이 말했던, 범상치 않아 보인다는 자가 그 구심점으로 보이는데……. 정체를 알아냈으면 좋으련만.”
“지금이라도 추격대를 꾸리심은 어떠할지.”
“아니. 이제와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아쉬움이 남지만, 지금으로서는 반드레온에게 자그마한 골칫거리 하나를 남겨준 것만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말을 마친 막시밀리언이 픽 웃었다.
“어찌 웃으시는지.”
“문득 든 생각이 있어서 그렇다네.”
“생각이라시면 어떤?”
“어쩌면 말이야. 반드레온이 저항군 출신 죄수들을 여기로 끌고 온 것이…잔당들을 유인하려던 수작이 아닐까 싶어.”
“예엣?”
“괜찮은 생각이 아닌가? 잔당들을 격동도 시키고, 그들이 들이칠 마음이 생기게끔 적당히 틈도 보여주는 게지. 그들을 처리하면서 적당히 실력행사도 해주면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나.”
“설마 그럴까 싶습니다만…확실히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이거 더욱 궁금해지는군.”
일거양득이기는 하지만, 사실 이것은 조금 극단적인 수다. 왜냐하면 이번 투기 시합은 잔당들을 격동시키기 위한 미끼를 내놓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명분도 있었고, 가장 큰 미끼라고 할 수 있는 반드레온 본인이 브록스에서 나오기까지 했다. 잔당들에게 있어 이번은 그야말로 놓칠 수 없는 기회. 모르긴 몰라도, 반드레온은 이번에 잔당들이 움직이리라 확신했으리라.
‘그렇게 해서라도 끌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겠지.’
단순히 뒷머리가 가려워서였을까? 추측일 뿐이지만, 막시밀리언은 그게 다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등 뒤의 칼은커녕, 막대기 정도 밖에 안 되는 무리를 걱정해서 마무리를 하려 했다 보기에는 이번에 벌린 일이 너무 거창했다.
‘필시 드러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미겔이 말했던 그 범상치 않은 사내가 걸렸다.
‘이미 놓친 물고기를 떠올려 무엇 하겠는가.’
계속 붙들고 생각한다 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다. 막시밀리언은 깔끔하게 미련을 접었다.
*
“기세 좋게 나서더니…실망스럽군.”
“경께서는 늘 솔직하셔서 좋습니다. 하지만 그 솔직함이 때로는 아픔이 되기도 하는군요.”
미겔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군터는 못마땅한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방금 말한 그대로였다. 고작해야 도시 내로 숨어든 쥐새끼들에 불과할진대, 그것을 놓쳐버렸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고 못마땅했다.
“상당한 놈들이었습니다. 모렌스 남작의 질긴 추격에도 끝내 살아남은 볼드의 잔당들이었으니까 말입니다.”
“볼드의 잔당?”
“경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말은 잔당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잔당 정도가 아니지요. 관청을 습격하고, 토벌대를 격파한 적도 있으니까 말입니다.”“한때는 그랬지. 하지만 그들은 토벌됐다고 들었는데?”
“무너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더군요.”
설명을 듣고서야 어느 정도 납득했다. 물론 미겔의 설명이 변명처럼 들리는 것은 여전했다.
“음. 그렇다면 놈들은 모렌스 남작을 노린 것인가?”
“그것도 있겠고, 어쩌면 동료들을 구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동료? 아아…….”
투기장에 올라왔던 죄수들을 이름이다. 그제야 군터는 투기장에서 느꼈던 살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동료들이 비참한 몰골로 죽어나가니 순간적으로 감정의 통제에 실패한 것이리라.
“아쉽군.”
“아쉽다니, 뭐가 말씀입니까?”
“그 잔당의 우두머리라는 녀석. 상당한 실력자라고 하지 않았나. 필시 경기장에서 내가 느낀 살기 역시 놈의 것이었겠지.”
“하하. 그 자와 한 번 붙어보고 싶으신 겁니까?”
“하는 일 없이 몸이 녹스는 것 같아. 내가 다시 실전을 치를 날이 올지도 의문이군.”
흘리듯 하는 말이나 진심이다. 근래에 들어 군터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전의 대대적인 숙청 이후 빠르게 안정기로 접어드는 베이고르를 보며 든 생각은 점점 깊어져 갔다.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베이고르는 또 한 번 크게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저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라 더 말씀드리기는 좀 뭣합니다만, 다시 일어선 베이고르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미겔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뜻 모를 소리를 했다. 군터는 의뭉을 떠는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