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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44화 (244/1,064)

<-- 2부 -->

솔직히, 광대 노릇을 하는 것은 탐탁지 않았다. 그것도 면식조차 없는 무수한 이들의 앞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군터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이 자리는 막시밀리언을 위한 자리이며, 따라서 이 무대가 반드레온의 웃음소리에 묻혀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기꺼이 나섰다. 또, 막시밀리언에게 한 말처럼 몸이 근질거리기도 했다. 간만에 보는, 호승심을 자극하는 상대 때문에 말이다.

슈욱!

눈으로는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른 검. 보고 판단하면 늦다. 다가오는 기척을 감지하는 순간 대응한다.

‘가볍다.’

너무나 가벼운 검의 무게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실전에서 사용해왔던 무기는 언제나 검창, 칸젤이었다. 몇 번의 전장에서 수십 번이 넘는 전투를 치르는 동안, 대개 검은 허리춤에 차고만 있었다. 때문에 익숙하다고 한들 그것은 손에 익었다는 이야기일 뿐, 실전에서의 사용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카앙!

하지만 처음의 1합에서 약간의 어색함을 느낀 이후, 군터는 능숙하게 검을 다뤘다. 이는 그의 애병 칸젤이 검창(劍槍)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이지만 동시에 검이기도 한 칸젤은 짧게 잡으면 검처럼 다룰 수 있고, 길게 잡으면 창처럼 다룰 수도 있는 기병(奇兵)이었다.

칸젤에 비하면 검은 단조로웠다. 짧고, 가볍지만 그만큼 다루기가 어렵지 않았다. 물론 깊이 파고들어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지금 눈에 빤히 보이는 수법들만 걸어오는 죄수를 상대할 정도는 됐다.

퍼억!찔러오는 검을 검신으로 부딪쳐 빗겨내면서 팔꿈치로 옆머리를 후려쳤다. 죄수가 비틀거리며 물러난다. 예상했던 대로라, 즉시 따라붙으며 횡으로 크게 내리 그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아래로 떨어졌던 검이 매섭게 솟아올랐다. 그에 군터는 쫓아가던 것을 멈추고 한 걸음 크게 물러났다. 검풍(劍風)이 앞머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목을 내놓더라도 피를 보겠다…살벌하군.’

공격 외에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방어도, 회피도 없다. 무조건 공격이다. 그 대가로 팔이 날아가든, 목이 날아가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위에서 지켜볼 때도 느꼈지만, 실로 까다로운 상대다.

채채챙!

너덧 번의 공방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죄수의 힘은 상당했다. 맨손으로 사람의 뼈마디를 분지를 수 있는 괴력을 보유한 군터로서도 정면에서 공격을 막아내니 손이 저릿할 정도였다. 생명을 갉아먹으면서 내는 힘인 만큼, 확실히 범인의 수준은 월등히 뛰어넘었다.

“흡!”

빨리 끝내겠다고는 했지만, 그를 위해 피를 흘려줄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군터는 차분하게 죄수의 공격을 받아치며 빈틈이 생길 때마다 쾌속하게 공격을 집어넣었다. 열 번 검이 부딪쳤을 때, 죄수의 몸은 대부분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몰골이 되고서도 죄수의 몸은 조금도 둔해지지 않았다. 다만 두 눈에서 흐르는 검은 핏물이 더 굵어져 한층 더 흉험한 몰골이 되었다.

콰앙!

힘껏 휘두른 검에 죄수가 붕 떠서 나가 떨어졌다. 괴력을 갖고 있다지만, 그것은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힘 대 힘이라면 밀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앞선다. 그것이 이번의 충돌로 증명 되었다.

“흐으으…….”

몇 바퀴 땅을 구른 죄수는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검은 핏물에 젖은 섬뜩한 눈은 군터에게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군터는 혀를 찼다.

‘비참하군.’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다. 이지가 완전히 날아간 죄수는 망자나 다름없다. 다만 그들과 다른 것은, 움직이는 몸뚱이는 멀쩡하다는 것과 수없이 피와 땀을 흘리며 연마했을 무술이 그 몸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 정도.

휘익!뻗어오는 검은 정직하다. 그야말로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찌르기다. 오랜 시간을 들여 제대로 연마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석은 정석일 뿐. 정직하기만 한 검은 실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실전에서 필요한 것은 정석에 더해지는 임기응변. 그렇지만 그 임기응변을 발해야 할 두뇌가 깔끔하게 비어버렸으니, 무조건적인 공격밖에 할 줄 모른다는 것보다 더 큰 결점이다.

까앙!둔탁한 소리가 터지고, 검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군터는 검신의 옆면을 밟아 검의 회수를 늦췄다. 그리고 어깨에 붙이다시피 몸 가까이 든 검을 그대로 찍어 내렸다.

서걱!

붉은 핏물이 허공에 선을 긋는다. 잘린 팔뚝이 검과 함께 떨어지고, 번개처럼 나간 발이 죄수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

군터는 나가떨어진 죄수를 쫓지 않았다. 대신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와아아아아!

숨죽이고 있던 관중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환호한다. 무술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그들조차, 이제 끝났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흐으으…….”

죄수는 금방 일어섰다. 잘린 팔도 팔이지만, 가슴을 두드린 발길질이 뼈 한 두 개 정도는 박살냈을 텐데 멀쩡하게 일어섰다. 어디까지나 행동으로는, 말이다.

검은 피는 이제 눈에서만 흐르지 않았다. 이전의 죄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코와 입, 심지어는 귀에서까지 흘렀다. 온갖 못 볼꼴을 다 본 군터로서도 흉측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담한 몰골이었다.

‘아쉽군.’

인간을 넘은 근력과 고통을 모르는 몸을 얻었다지만, 이성이 날아간 것은 그에 못지않게 크다. 차라리 사교의 술수가 없었더라면, 힘이 약해지더라도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더 좋은 승부를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만난 것을.

‘끝내주마.’

팔을 잃고, 검도 잃은 죄수는 이제 어찌 싸워야할지 모르는 탓인지 가만히 서 있었다. 군터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음?’

그러던 한 순간, 군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멀뚱히 서 있던 죄수가 달려들었다. 주먹을 쥐고, 물어뜯을 듯이 입을 벌린 채로.

서걱!

잘려나간 목이 높이 떠올랐다. 달려들던 몸은 그 기세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쏟아지는 환호성을 들으며, 군터는 또 한 번 허공을 베어 검신을 적신 피를 털어냈다.

와아아아아!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군터의 시선은 그들의 얼굴을 빠르게 훑어 지나갔고, 막시밀리언을 비롯한 귀족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도로 자리를 찾아갔다.

*

“내 오늘 정말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감탄했네.”

“별 말씀을.”

시끌벅적했던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패사하기 전까지 위용을 떨쳤던 마지막 죄수를 꺾은 탓이었을까. 군터는 쏟아지는 귀족들의 치사를 들으며 말을 아껴야 했다.

막시밀리언이 귀족들을 이끌고 자리를 뜨고 나서야, 군터는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됐지?”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미겔이 답했다.

“의심 가는 쪽에 각기 꼬리를 붙였습니다.”

“저번처럼 문제가 생긴다면…….”

“제 아랫놈들 중에서는 나름대로 고르고 고른 놈들입니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것보다…확실하신 겁니까?”

군터의 눈길이 미겔에게 돌아갔다. 서늘한 시선에도 미겔은 평온한 낯이었다.

“날 믿지 못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경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인파 속에서 어찌 확신을 하시는지 의아했을 뿐입니다.”

“살기를 느꼈다. 범인은 발할 수 없는, 혹독한 실전 후에야 얻을 수 있을 법한 기세였지.”

마지막 순간이었다. 쓰러진 죄수에게 다가갔을 때, 죄수가 달려들기 직전에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었다. 위치는 특정할 수 없었지만, 군터는 그 살기가 관중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확신했다.

“저도 꽤나 예민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만, 경께서는 저보다도 더하신 것 같군요.”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멀리서 지켜보는 입장이었다면 나 역시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그 정도로 갑작스러우면서도 은밀한 살기였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기에 어지간한 자가 아니었다면 착각이라고 여기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나저나 묘하군요. 들어온 놈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정도지, 전부는 아니었지 않은가. 그래서 신호는?”

“아직입니다. 곧 오겠지요. 그런데, 설마 직접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면?”

“경께서는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끄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이런 은밀한 일처리에는 나서실 수 없고, 나서셔도 안 됩니다.”

옳은 말이다. 게다가 당장 조금 후에는 귀족들에게 불려갈지도 모른다. 방금 전만 해도 몇몇 귀족들은 곧 다시 보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가지 않았나.

군터가 멈칫하자 미겔이 말을 이었다.

“이쪽 일은 제게 맡기시고 경께서는 느긋하게 쉬고 계십시오.”

“직접 움직일 셈인가?”

“실수는 한 번 뿐이면 족하니까 말입니다.”

미겔이 허리춤의 검을 툭 두드렸다. 그에 군터는 두 말 없이 몸을 돌렸다.

*

무르익은 연회의 분위기가 다시 식어갈 즈음, 반드레온은 슬쩍 자리에서 나왔다. 자리가 파하는 분위기였기에 반드레온이 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도 의아해하거나 붙드는 이는 없었다.

반드레온은 그의 숙소로 돌아와, 테라스로 나갔다. 밤바람을 맞는 그의 표정은 지극히 무미건조했다.

“찾았느냐?”

그의 뒤편에 선 건장한 무관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다른 놈들이 움직이는 바람에…….”

“다른 놈들?”

“코누다이안 놈들인 것 같았습니다. 제거할까 했으나 혹 소란이 일게 되면 곤란해질까 싶어…….”

“그건 잘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얻은 게 하나도 없지 않느냐.”

“면목 없습니다. 현재 놈들을 피해 다른 경로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움직인 것이 코누다이안 녀석들이라면, 무언가 낌새를 챘기에 나선 것이 아니겠느냐. 실속도 챙기지 못할 일에 무리할 필요는 없다. 모두 불러들여라.”

“하오나 주공.”

“아니다 싶을 때는 쓸데없이 미련을 가지기 보다는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낫다.”

반드레온이 입 꼬리를 비틀었다. 씁쓸함이 배어나오는 웃음이었다.

“둘을 노렸으나 하나도 건지질 못했군. 이건 내가 코누다이안을 너무 얕보았기에 생긴 일인가?”

반드레온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에 있어 누군가 실책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뒤에서 죄를 청하는 수하가 아니라 그 자신일 것이다. 이제와 차분히 되돌아보니, 계획을 세움에 있어 너무 방만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초조해 했던 것인지도 모르지.’

이제 시작인데, 너무 늦게 출발했다는 생각 때문에 조급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되었다. 보여줄 만큼 보여줬고, 숨어있는 놈들이야 어차피 머리까지 잃은 잔당에 불과하니.’

생각을 다 정리하니 답답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반드레온은 들고 있던 잔을 입에 가져갔다.

붉은 포도주가 입술을 적시는데, 적당히 운치 있게 깔린 구름 사이로 밝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 아름다운 밤이 아닌가.

찌그러졌던 입술이 미끈한 호선을 그렸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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