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죽이고 죽였다. 폴사도의 무관들과 반드레온의 죄수들, 둘 중 어느 하나 우세를 점하는 쪽이 없었다.
그야말로 살육전. 때문에 관중들은 열광했다.
와아아아아아!
“하하하하핫!”
반드레온은 간간이 박수까지 치며 시합을 즐겼다. 반면에 링고드 남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기는 했지만 폴사도의 무관들이 쓰러질 때마다 조금씩 들썩거렸다. 그의 얼굴은 누구라도 그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눈 꼬리가 간헐적으로 떨리고, 입술은 얼마나 씹어댔는지 피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붉었다.
“이런! 정말 아쉽군.”
동시에 뻗은 두 개의 검. 아슬아슬하게 먼저 목이 베인 폴사도의 무관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반드레온은 탄식하며 링고드 남작을 보았다. 눈을 질끈 감은 그는 반드레온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거칠어지는 호흡을 진정시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 링고드 남작의 반응에 반드레온은 소리 없이 픽 웃고는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넷씩 남았군. 끝이 보이는 것 같소이다.”
“보는 입장에서야 즐겁습니다만…….”
한 귀족의 눈길이 조심스럽게 링고드 남작 쪽을 향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다른 관중들처럼 마음껏 환호할 수 없었다. 처음 한, 두 명이 죽어나갈 때에야 놀랍다 정도였지만 그 이상이 되니 뭔가 상황이 잘못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들은 홀로 껄껄 웃는 반드레온과 링고드 남작의 틈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흥미롭게 경기를 관전하는 중이었다.
“다들, 이 사람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 목숨을 맡기고 저 투기장 안으로 들어간 자들입니다. 실력이 부족해 죽는다면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병사들이 패했을 때는…솔직히 말해 속이 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뿐입니다. 즐기기 위해 마련한 자리가 아닙니까? 저 역시 즐기고 있으니 여러분도 그리 하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오호. 호탕하시오. 과연 커닐레이 백작님의 대리라 할 만한 배포. 그대의 말이 옳소이다. 즐기기 위한 자리가 아니오? 모두들 즐기십시다. 그렇지 않으면 뿌려진 피도, 뿌려질 피도 모두 의미가 없어지는 게 아니겠소?”
“그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마음 좀 놓고 편히 즐겨보도록 하지요.”
“하하핫!”
막시밀리언은 반드레온과 링고드 남작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아마도,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판을 벌린 것은 반드레온이다. 선물이라고 포장하기는 했지만, 아마도 과시를 하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사교라. 대체 어느새 손을 잡았단 말인가.’
제국군이었던 막시밀리이다. 이제는 베이고르의 영주가 되었다지만, 과거 사교라 부른 이들에 대한 거부감은 아직도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 박혀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명칭이 주는 껄끄러움은 둘째 치고, 그들이 다루는 힘의 음험함 때문에라도 크게 경계심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이들과 반드레온이 손을 잡았다. 그와 손을 잡은 사교의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 저 경기장에서 피를 뿌리고 있는 죄수들만 봐도 그 힘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
‘명예회복을 노린 거겠지.’
볼드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반드레온이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은 일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이 자리에 없는 이들도 다 안다. 그것은 반드레온의 입장에서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상처 입은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그로 인해 그를 얕잡아보는 이들이 생기는 것이 더 골치였을 터. 따라서 그는 이 자리를 빌려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다만, 그 과정에서 폴사도와 마찰이 생길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드레온은 그 마찰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피한다는 것은 적당히 져준다는 것인데, 그랬다가는 기껏 벌린 자리의 의미가 사라진다. 아니.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기민한 곰이 경박한 여우를 만나 곤란을 겪는구나.’
문제는 링고드 남작이다. 반드레온이 짜놓은 판에 그가 뭣도 모르고 발을 들이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딴에는 백작의 대리인이랍시고 거들먹거리고 싶었던 것이겠지만…낄 곳을 잘못 찾았다. 다른 때였다면 반드레온도 순순히 물러났겠지만, 이 자리는 아니다. 여기서는 반드레온도 도저히 발을 뺄 수가 없다.
‘나중에 적당히 달래줘야겠군.’
반드레온은 저 죄수들을 선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선물다운 선물은 그가 빚어낸 이 희극 그 자체인 듯하다. 폴사도와 반드레온이 갈등의 불씨를 피어올린다면 기꺼이 바람을 불어주리라.
“여기까지는 낭패를 봤습니다만…이제부터는 다를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링고드 남작이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한 마디를 했다. 다른 이들은 으레 하는 말인 줄 알고 가볍게 넘겼지만, 오직 막시밀리언과 반드레온만이 그 말에 담긴 진중함을 읽고 마음을 달리 먹었다.
“그거 참…기대가 됩니다.”
반드레온의 말이 끝나고, 새로이 경기장에 올라온 폴사도의 무관이 검을 들었다.
*
“다르군.”
처음 갈색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무관이 경기장에 올라왔을 때, 군터는 저도 중얼거렸다. 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무심코 속으로 떠올린 생각이 입밖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때문에 미겔이 무엇이 다르냐고 물었을 때, 군터는 답하지 않고 경기가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와아아아!
그리고 치열하게 흘러가던 경기는, 역설적이게도 한 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폴사도의 무관은 자잘한 상처 두 개만을 입고 깔끔하게 죄수의 목을 베었다.
“어떻게 짐작하셨습니까?”
“눈이 침착했다.”
“눈? 눈빛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지.”
“이전의 녀석들과는 다르게, 노기(怒氣)가 보이지 않더군. 마음을 다스릴 줄 안다는 뜻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쉽게 이길 줄은 몰랐다.”
육신의 힘. 그리고 전투의 기술은 시간을 들여 단련함으로써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의 성취는 시간만으로는 얻을 수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이 마음의 성취야말로 무인의 경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을 터.
그런 면에서 지금 경기장에 선 무관은 진정으로 경지를 이루었다 할 수 있다. 당장 저 자와 붙어서 승부를 장담할 수 있는 자는 군터의 휘하 중에 살라스와 할렌뿐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백작령이라는 건가. 인재가 많군.’
커닐레이 백작의 친위대라고 했다. 원행을 나가는, 그것도 자신의 대리로 움직이는 링고드 남작이니 만큼 친위대에서도 쓸 만한 자들로 붙여주었을 터.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저 정도의 실력자라니. 저런 것이 바로 고위 귀족의 저력이라는 것일까.
무관은 그 뒤로도 연달아 두 명의 죄수를 더 베었다. 그 과정에서 입은 상처는 다섯이 넘지 않았고, 그마저도 중상이라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소 숨이 거칠어졌을 뿐, 그의 상태는 처음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와 별 다르지 않아 보였다.
“오오! 훌륭하군!”
“보기 드문 맹자(猛者)로군. 링고드 남작님. 저런 자까지 내려 보내셨습니까? 너무 과한 게 아닌지…….”
“모렌스 남작님의 죄수들이 워낙 흉맹해 보여서 말입니다. 무술을 잘 모르는 이 몸이 과한 걱정을 부렸다 하여 탓하지는 말아주시길.”
링고드 남작은 이제 조금 풀어진 얼굴이었다. 한동안 잃어버렸던 여유도 다시 찾은 듯했다.
“하하하.”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상하게 꼬이는 듯했던 상황이 다시 원래 가야 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훌륭하군. 훌륭해.”
그런데, 반드레온은 이제껏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것이 링고드 남작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아직도 남은 수가 있는 건가?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예상 외였다. 여기서 더 무언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
의심과 부정이 몇 번이나 서로를 물어뜯는 와중에, 드디어 마지막 죄수가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특별히 뭔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무술에 대해 잘 모른다는 말은 반쯤은 빈 말이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커닐레이 백작이 유약하기만 한 문관을 보낼 리는 없는 것이다. 링고드 남작은 무인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보는 눈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보기에, 지금 올라온 마지막 죄수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
그는 불안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는 싸움의 시작을 기다렸다.
*
채챙!
둘은 곧 맞붙었다.
“으읍!”
탐색을 위한 1합. 손목을 울리는 묵직한 힘을 느낀 폴사도의 무관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죄수는 그런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물러서는 한 걸음에 정확히 맞춰 한 걸음을 따라붙었다. 쾌속하게 찔러오는 공격은 덤.
카앙!
검첨이 검신을 때린다. 일격을 막은 검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떠나려 몸부림쳤다. 정신없이 뒷걸음질을 치는데 검을 쥔 손아귀에서 가느다란 핏물이 흘렀다.
“……!”
죄수가 몸을 낮추고 달려왔다. 무관은 이를 악물고 검을 내질렀다.
하나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다른 하나의 검이 목을 베었다.
와아아아아!
어렴풋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환호성을 들려온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흐릿한 하늘에 머리가 닿은 듯 거대한 거인의 형상이었다.
*
연달아 세 명의 죄수를 쓰러뜨렸던 무관이 허망하게 쓰러졌을 때, 관중들은 환호했다.
두 번째 무관이 이십 합 정도를 버티다가 다리가 잘리고, 목이 꿰뚫려 죽었을 때도 관중들은 비명과 함께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세 번째 무관이 죄수의 얼굴에 가느다란 혈선을 긋는 대신 목을 내주었을 때는, 관중들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환호대신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리고 네 번째.
털썩!
마지막 무관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관중들은 침묵했고, 그 위의 귀족들 역시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잠깐의 침묵 뒤에, 반드레온이 나직한 박수로써 적막을 깨뜨렸다.
“역시 대단하군. 저 놈을 잡는데 내 수하 열 넷이 죽어나갔었지. 그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나는군.”
반드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유감이오. 링고드 남작.”
“…….”
링고드 남작은 쉬이 말을 내지 못했다. 그는 애써 표정관리까지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코누디스 남작. 원치 않던 결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끝이 났군요.”
관중들은 바보가 아니다. 이 자리가 본래 어떤 식으로 끝나야 하는지는 죄수와 무관들의 대결이라는 구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의 결과는, 본래 나오면 안 됐을 결과라는 것을 무지한 시민들도 잘 알았다. 마무리를 짓는다면 그들이 더 동요하기 전에 해야 하리라.
“이 사람의 불찰입니다. 적당한 때에 좋게 마무리를 지었어야 하는데.”
“이미 지나간 일. 더구나 모두가 즐기는 와중이었으니 손을 쓰기는 어려웠소. 모렌스 남작께서 자책 하실 일은 아니외다.”
“음. 허면…이대로 마무리를?”
“아니. 그건 조금 아쉽지 않소이까.”
막시밀리언이 시선을 더 멀리, 아래쪽으로 옮겼다.
“군터 경!”
커다란 외침. 좌중의 시선이 쏠리고, 아래쪽 자리에서 무장한 거구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지금껏 객들께서 과분한 성의를 보이셨으니, 나 역시 보답을 해야겠다!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전장에서 외치는 것처럼 쩌렁쩌렁한 말소리에 군터가 군례를 취하며 답했다.
“몸이 근질거리던 차입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실망시켜드리지 않겠나이다!”
“좋다! 기대하지!”
허락을 득한 군터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쿠웅!
마치 새처럼 높게 뛰어오른 그는, 경기장 안으로 둔중한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내렸다.
“…….”
몸을 일으키는 그와, 바라보는 죄수의 시선이 얽혔다.
죄수의 눈에서는 예의 그 섬뜩한, 눈물처럼 보이는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죄수의 몸이 붕괴하고 있다는 뜻.
“오래 끌지는 않으마.”
알아들을 리 없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하며 검을 뽑았다. 칸젤이 아니라 허전하지만, 검 역시 익숙하다. 사실, 어지간한 병기라면 모두 익숙하다.
와아아아아아아!
침묵하던 관중들이 다시금 환호를 시작했다. 잘못된 끝이 아니라는 안도와, 또 다른 싸움에 대한 기대가 그들을 다시금 뜨겁게 덥힌 것이리라.
“으…으으…….”
한 순간, 흐리멍덩하던 죄수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쾌속한 돌진.
군터는 한 손에 쥔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다가오는 상대를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