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우리가 왜 이런 광대 짓을 해야 하는 겁니까?”
“링고드 남작께서 명을 내리셨으니까. 명이 떨어진 이상 따를 뿐이다. 불만스러운 건 알겠지만, 그쯤 해두도록.”
열 세 명의 사내들이 경기장 앞에서 멈춰 섰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함성에 귀가 다 멍할 지경이었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볼 때와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소리도 소리지만, 무수한 시선들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시선들 앞에 그들은 마치 벌거벗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폴사도의 영주, 이고르 커닐레이 백작의 친위대는 말할 것도 없는 폴사도 최정예 부대다. 그 집단의 소속인 그들은 무인으로서도, 군인으로서도 폴사도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구경거리가 되어 본 적이 있을 리 없다. 경험한 적 없는 수치스런 경험은 그들을 분노와 더불어 모멸감에 사로잡히게 했다.
“빨리 끝내도록.”
“그럴 생각입니다. 수치를 당하는 것은 하나면 족하지요. 제가 모두 끝내겠습니다.”
“무리 하지 마라. 자네도 보았겠지만, 저놈들은 보통이 아니다.”
“얕보지 않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무관은 입으로는 그리 말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술수로 얻은 힘일 뿐이다. 이성이 날아간 짐승 같은 놈들 따위…우습지.’
경기장 중앙에 선 죄수가 보인다. 한쪽 팔에서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얼굴은 감정 없는 인형처럼 멍하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습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든다.
‘숨만 쉰다고 해서 살아있는 게 아니지.’
모렌스 남작에게 대항하던, 구 볼드의 저항군이라고 했던가. 나름대로는 주인에 대한 충의를 지키다가 이런 꼴이 된 것이니, 멍청하게 선 꼴이 조금은 안쓰럽게도 보인다.
“금방 편하게 해주마.”
어차피 알아들을 수도 없겠지만, 무관은 정면의 죄수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최선을 다해 최대한 빠르게 끝을 내리라. 그것이야말로 가련한 자를 위해 그가 해줄 수 있는 전부일 테니.
*
“오오! 대단한 실력이로군.”
링고드 남작은 주변의 귀족들이 내지르는 탄성을 들으며 슬쩍 입 꼬리를 올렸다.
경기장에 들어선 친위대 병사는 지금 막 네 번째 죄수를 쓰러뜨렸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솜씨였다. 그는 짐승처럼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죄수를 상대로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며 차분하게 대응했다.
“과연! 링고드 남작께서 자신하실 만합니다 그려.”
“저 자 한 명만 나가도 충분할 뻔했을 것 같군요. 네 명을 상대하면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지 않습니까.”
탄성이 흘러나올수록, 치켜세우는 말들이 늘어갈수록 링고드 남작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눌러 앉히고 어깨에 들어가는 힘을 빼는데 집중해야 했다.
경탄의 대상은 그가 아니라 경기장에 서 있는 무관이고, 그 무관은 링고드 남작 본인이 아니라 커닐레이 백작의 부하였음에도 링고드 남작은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처럼 들뜨는 기분이었다.
‘자아. 어떠신가?’
그는 옆에서 말을 거는 귀족에게 대답을 하면서도 눈을 슬쩍 옆으로 움직여 세 영주를 살폈다.
센트리온 남작은 감탄한 기색이었다. 코누디스 남작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별로 마음에 드는 반응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렌스 남작은.
‘웃어?’
그는 웃고 있었다. 그를 확인한 순간, 링고드 남작은 자칫 웃는 얼굴에 금이 갈 뻔했다.
물론 웃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모렌스 남작의 웃음이 거슬린 이유는 그의 웃음이 뭔가…보통의 웃음과는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왠지 껄끄럽다고 해야 할까.
“과연 커닐레이 백작님의 친위대인가. 죄수들이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군.”
반드레온이 껄껄 웃었다.
“이보시오. 링고드 남작.”
“예. 모렌스 남작님.”
“이대로라면 너무 싱거울 것 같은데, 남작의 생각은 어떻소.”
“제게 물으셔도…….”
링고드 남작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해보나마나 한 싸움이오. 그렇다고 한 번에 여럿을 붙이자니 무대의 격이 떨어지지. 그래서 말인데, 내 제안이 있소이다.”
“제안이라면 어떤?”
“저놈들의 몸에는 일종의 봉인이 걸려 있소. 놈들이 너무 폭주하여 금방 죽어버리지 않게끔 하는, 일종의 조절 장치지.”
“으음?”
“그것을 풀어버리면 놈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소. 하지만 그 대가로 몸이 금방 망가져버리지. 그 꼴이 조금 끔찍한지라, 많은 이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내보이기가 조금 망설여졌던 거요. 하지만 이래서야 너무 재미가 없으니…….”
반드레온이 막시밀리언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떠십니까. 코누디스 남작님.”
“내게 물어보실 일이 아닌 듯합니다.”
링고드 남작은 자신에게 눈길이 몰리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 보았던 왠지 껄끄러운 웃음부터 시작해, 지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
“좋습니다. 기쁜 자리에 더 좋은 볼거리가 생기는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짝!
반드레온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화통하시군! 아니. 저 폴사도의 용사들을 그만큼 믿고 계신 건가?”
“둘 다면 안 되겠습니까? 하하하.”
링고드 남작은 뒷머리를 간질이는 불안을 떨쳐냈다. 그는 반드레온이 괜한 심술을 부리는 거라 여겼다. 기껏 요란을 떨면서 내보인 선물들이 너무도 쉽게 죽어나가니 열이 오른 것이라고 말이다.
*
그는 네 번째 상대의 목을 베고서 숨을 고르며 다음 상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올라와야할 다섯 번째 상대 대신, 브록스의 무관이 뜬금없이 경기장으로 올라왔다.
“잠깐 멈추겠소.”
“무슨 일이오?”
“죄수들을 조금 손볼 일이 생겼소.”
“손 볼 일?”
“윗분들의 명이오. 그대가 너무 잘 싸운 탓이지.”“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브록스의 무관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래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지만…내 그대에게 조언 하나 해도 되겠소?”
“…….”
“조심하시오. 이제부터 그대가 상대하게 될 놈들은 지금껏 싸운 놈들과는 전혀 다를 거요.”
“충고는 고맙게 받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괜한 오지랖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음 써준 것은 고마운 일이기에, 물러가는 브록스의 무관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다섯 번째 상대는 무관이 물러가고서 바로 올라왔다.
방금 전에 들은 말이 있으니, 그는 차분하게 상대를 살폈다. 그리고 곧바로 이전의 넷과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녀석…눈이?’
충혈 되어 있다. 핏발이 서 있다. 표정은 이전의 녀석들과 다르지 않다. 멍한 얼굴인데 느슨하게 뜬 눈만이 살벌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눈이 흉악하게 변한 것보다 멍청한 얼굴과 그리는 그 지독한 부조화가 신경이 쓰였다.
‘일단…한 번 볼까.’
브록스의 무관이 건넨 경고가 떠올랐다. 검을 드는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졌다.
*
달라졌다. 군터는 반드레온의 죄수가 잽싼 짐승처럼 땅을 차기 전부터 그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뭔지 모를 이질적인 냄새가 코를 찌르듯 자극했기 때문이다.
여인의 분 냄새도 아니고, 시체 썩은 내도 아니다. 종류가 완전히 다른, 전혀 다른 냄새다. 지극히 이질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친숙하기도 하다. 그것은 아마 그의 마음이 이미 저 죄수가 쓰는 힘을 친숙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력이라.’
거리가 있고, 주변에는 온통 시끄러운 함성들뿐이지만 군터는 반드레온이 하는 이야기를 빠지지 않고 모두 들었다.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특히 잠력이라는 것이 그랬다.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들은 바에 따르면 그 잠력이라는 힘은 그가 사용하는 힘과도 유사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어렵사리 익힌 사령술을 응용하여 일종의 강체술과 같은 비술(秘術)을 만들어냈다. 사기로 생기를 자극하여 힘을 끌어내는 방식. 그것은 반드레온이 이야기 한 죄수들의 힘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한계를 넘어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갈시키는 건가.’
물론 그의 방식은 저 무식한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얌전한 편이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흡사하다. 그래서 흥미가 생긴다.
와아아아아아!
관중들의 목청이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변했다. 그들의 눈은 중앙의 경기장에 박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백중세.
경기장에서는 그 한 마디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빠르고 거칠게 밀어붙이는 죄수와 그런 죄수의 맹공을 간결한 움직임으로 받아내는 폴사도의 무관.
“완전히 백치처럼 보이는데 용케 칼은 제대로 휘두르는군요.”
“살아있는 한,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지는 않지.”
“비유하신 겁니까? 꽤나 그럴듯했습니다.”
“놀라지 않는군.”
“예?”
미겔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군터는 경기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갑자기 확 변하지 않았나. 먼젓번의 넷과는 다르게 말이야.”
“아아. 그 말씀이셨습니까. 물론 놀랍습니다. 이래 뵈도 충분히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
방금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데 전 재산을 걸 수 있다. 군터는 의문이 들었으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고, 미겔이 뭘 알고 있거나 숨겨진 재주 하나쯤 있다고 해도 놀랄 이유는 없다.
우우!
아아!
관중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탄식했다. 담이 약한 자들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결착이 났다. 죄수의 칼이 무관의 목을 꿰뚫었다. 전신에 자상만 해도 십 수 개였지만 죄수는 멀쩡하게 섰고, 목이 뚫린 무관은 칼을 놓치고 무릎을 꿇었다.
“이런!”
링고드 남작이 벌떡 일어났다.
반드레온이 아쉽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런…아쉽게 됐군. 앞서 네 명이나 상대하느라 체력이 소진되었었나 보오. 설마하니 피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유감이오. 링고드 남작.”
“…….”
링고드 남작의 볼이 미세하게 부들거렸다. 그는 조금 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운이 없었을 뿐이지요. 괜찮습니다.”
운이라.
군터는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옆의 미겔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게 아니지. 운은 상관없다. 질만했으니 졌을 뿐.’
오십 합을 넘게 겨뤘다. 그것만 놓고 보면 치열하게 싸웠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운이 어쩌고 하는 말은 결코 나올 수가 없다.
대등했던 것은 처음뿐이었다. 서너 번 정도 칼이 부딪친 후에는 일방적인 흐름이 이어졌다. 폴사도의 무관은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그에 반해 죄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몸놀림이 둔해지지 않았다. 자상을 입었으나 그것은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죄수는 고통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심지어 베였다는 자각 자체가 없어 보였다.
‘말레이드가 떠오르는군.’
제국군이었던 시절. 군터는 말레이드를 공격해온 베이고르 군에 맞서 싸웠다. 그 당시 이성을 상실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부나방처럼 달려들던 베이고르의 병사들이 딱 저 죄수와 같았다. 고통을 모르고, 두려움을 모르던…….
‘그러고 보니, 그때도 사교가 얽혀있지 않았던가.’
이제는 베이고르에 속한 몸으로서, 사교니 사신이니 하는 말 대신 본래의 장황한 이름을 불려야 한다. 하지만 군터는 그늘 어쩌고 하는 긴 이름보다는 그냥 사신(邪神)이라는 명칭이 더 편하고 익숙했다.
‘어쩌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생각에 잠긴 사이 목이 뚫린 시체가 내려가고, 또 다른 무관이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아무래도 링고드 남작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번에는 어떨 것 같으십니까?”
마주한 죄수와 무관을 보며, 미겔이 물었다.
“글쎄.”
“아무래도 이번엔 폴사도 쪽이 가져가지 않겠습니까? 저 녀석, 딱 보기에도 몸이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치명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지만, 그래도 전신에 자상만 십여 개다. 피가 멎은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난 저 놈이 한 번 정도는 더 해낼 것 같군.”
“호오.”
미겔이 의외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과는 다른, 묘한 공기가 투기장을 적셔가는 가운데, 또 한 번 두 개의 칼이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한 개의 칼이 잘린 목과 함께 땅에 떨어졌다.
우우우우우!
“…경의 말씀대로군요.”
미겔의 중얼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군터는 흐느적 거리며 선 죄수를 보았다.
죄수의 몰골은 실로 처참했다. 전신은 피로 목욕을 한 듯 붉었으며, 팔 한 쪽은 아예 팔꿈치부터 잘려나갔다.
그러나 그런 몰골보다도 더 끔찍한 것은, 죄수의 두 눈에서 흐르는 검은 피였다.
검은 피는 붉은 피 웅덩이 위에 길게 떨어졌다.
그리고 시신을 빼내기 위해 병사들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작게 휘청거리던 죄수는 끝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