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조금…이상한데.”미겔이 혼자 중얼거린 말이 군터의 마음과 똑같았다.
감옥과 같은 수레에서 걸어 나온 십 수 명의 사내들은 확실히 뭔가 이상해 보였다. 지나치게 경직된 것 같은 걸음걸이나, 완벽히 죄수 같은 추레한 몰골과는 달리 잘 훈련된 군사들처럼 간격을 맞춰 이동하는 것도 그랬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죄수인데 행동은 미리 짜맞춰도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계적이었다.
‘과연. 뭔지는 몰라도 범상치 않아 보이기는 하는군.’
군터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귀청을 따갑게 하는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그는 영주들의 말소리를 포착할 수 있었다. 거기서 더 집중을 하니 반드레온의 웃음소리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날카로우시군요 코누디스 남작님. 예. 추측하신 바가 맞습니다. 저놈들이 바로 역적의 잔당들입니다.”
‘역적의 잔당이라.’
듣자마자 감이 왔다. 전 볼드 영주, 케일르스 볼드 휘하의 저항세력을 말함이리라. 반드레온이 군대를 이끌고 볼드의 수도를 포위했을 당시, 끝까지 항전하던 그들이 용케도 탈출하여 볼드 각지에서 말썽을 피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저 아래에 무기를 받아들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는 자들이 바로 그들인 모양이었다.
“저놈들을 잡았을 때, 그냥 광장에 효수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그건 너무 싱겁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요. ‘그늘에 기댄 사슴’의 신도들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군터는 잠시 ‘그늘에 기댄 사슴’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곧 그것이 제국에서 ‘사신’이라 부르는 신들 중 하나, 하가록의 본래 이름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놈들의 머리를 텅텅 비워냈지요. 역시 신을 섬기는 자들의 힘은 대단하더군요. 그렇게 독기 넘치던 놈들이 저렇게 고분고분한 인형으로 바뀌었습니다.”반드레온의 웃음이 이어졌다. 예의 그 호탕한 웃음이었다.
“저렇게 놔두고 보는 것도 좋지만, 어디에 쓸 곳이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이렇게 적절한 자리에서 쓰임새를 찾는군. 여러분 모두, 기대하셔도 좋소이다. 저놈들이 머리가 비면서 이성은 날아갔지만, 대신 얻은 게 있지요. 이 사람이 장담컨대,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겁니다.”
‘독하군.’
머리가 비었다는 것이 정확히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군터는 반드레온의 독심(毒心)이 보통이 아니라 생각했다. 죽이는 것보다 더 비참한 꼴을 만들어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치욕을 주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갖기 어려운 마음이다.
‘그저 분풀이를 위함인 것인가. 아니면…본보기인가?’
살짝 그런 의심이 들었다. 누구도 바라지 않은 것을 선물이랍시고 가져와, 계획에도 없는 이런 투기장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귀빈석에 자리한, 영주들을 필두로 하는 귀족들 외에도 각지에서 온 유력자들이 대거 존재했다.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어, 그들의 앞에서 저런 ‘전리품’을 풀어놓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색다른 선물로 막시밀리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럴 리가.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하나다. 반드레온은 자신의 전리품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길 원한 거다. 자신에게 대항한 자들의 끔찍한 말로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거칠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다. 자고로 위엄을 세우는 데 있어 가장 빠른 방법은 힘을 보이는 것이다. 거기에 적절한 위협이 섞인다면 더할 나위 없다.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상했는가.’
군터는 브록스의 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저 저항군들이 얼마나 반드레온의 속을 썩였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반드레온이 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정말 어지간히도 골머리를 앓았던 모양이다. 필시 그는 저 저항세력 때문에 자신의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자극적인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테니.
‘재미있군.’
초원에서는 부족의 영역을 표시할 때 사나운 짐승, 혹은 전쟁을 치른 적대 부족 사람들의 목을 창에 꽂아 세우곤 한다. 특히 사람의 목을 걸 때는 전사의 목이든, 노인의 목이든 구별 없이 건다. 그들 부족이 그만큼 무자비하다는 것을 침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이는 굉장히 원초적인 방식의 자기보호다. 짐승, 그 중에서도 특히 맹수들의 방식과 흡사하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작정하고 덤벼드는 게 아닌, 어설프게 한 번 기웃대는 상대는 알아서 발을 빼게끔 만든다.
‘내가 잘못 짚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부족한 머리에서 흘러나온 어설픈 추측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군터는 반드레온의 행동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이제껏 조금은 못마땅하고, 조금은 지루하기만 했던 살육전에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저 딱딱한 인형 같은 것들이 반드레온이 그렇게 자신할 만한 것들인지 말이다.
“시작하는군요.”
미겔의 말마따나, 싸움은 곧 시작되었다.
*
“어이! 한 다섯 명씩 흩어져서 싸우는 게 어때?”
“내가 왜 네놈 명령에 따라야 하는데?”
“까칠하게 굴지 말자고. 알잖아? 저놈들만 이기면 우리는 자유야. 좋게들 생각하자고. 그리고 어차피 손발도 안 맞는데 우르르 몰려다녀봐야 등 뒤가 서늘할 걸?”
“쳇!”
명령 같은 말에 발끈했던 사내는 설득력 있는 또 다른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수긍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여기 있는 자들 전부가 서로를 처음 보는 사이다. 당연히 싸울 때 손발이 맞을 리 없다. 그렇다면 널찍하게 벌려서 싸우는 편이 차라리 나으리라.
“어떻게 할 건데?”
“저 자식들 눈을 좀 봐. 흐리멍덩한 게 딱 봐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지 않아?”
“…확실히.”
손에 든 무기는 하나같이 검. 서 있는 자세만 보아도 단련한 무인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그들의 눈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기세 같은 것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힘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흐린 눈을 보고 있자면 저것들이 지금 싸우려고 선 것인지조차 헷갈릴 정도다.
“한 번 해보자고. 우리가 흩어지면 저놈들도 따라오겠지. 하지만 인원은 우리가 더 많아. 놈들이 두 셋씩 흩어져서라도 덤벼든다면 그냥 싸우고, 몰려서 온다면 남은 인원이 놈들의 뒤를 치는…….”
퍼걱!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계획을 읊던 사내. 그가 별안간 땅을 뒹굴었다. 그의 목에는 검 한 자루가 통째로 꽂혀 있었다.
“흩어져!”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열 세 개의 형체가 그들을 덮쳤다. 짐승처럼 빠르고 거친 도약 후에 몇 개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
“어허!”
“저, 저런!”
진한 탄성이 흘러나온다. 평소에는 표정이며 목소리 관리에 여념이 없는 귀족들이 지금은 체통도 잊고 연신 자리에서 들썩거렸다.
반드레온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그는 옆에 앉은 막시밀리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떠십니까?”
“놀랐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이군요.”
“하하. 그렇습니까? 그거 다행입니다. 저놈들을 여기까지 가지고 온 보람이 있군요.”
이제까지 이어졌던 경기들은 치고받는 형식이었다. 승패는 갈릴지언정, 어느 정도 치열함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경기’는 다르다.
인형처럼 딱딱하게 서 있던 죄수들은 갑작스레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학살이 시작됐다.
학살. 그렇다. 학살이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들은 마주한 상대를 무참하게 도륙했다. 단번에 목을 베는 경우도 있었지만 완전히 난도질을 해가며 참살해버리기도 했다.
“이건…상대가 안 되는군.”
“좋아! 하하핫! 통쾌하구만!”
처음에는 웅성대던 관중들도 이제는 하나씩 쓰러져가는, 한때는 승자였던 자들의 모습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환호에 보답하듯, 반드레온의 죄수들은 쉬지 않고 피를 뿌렸다.
“저 죄수들…움직임도 그렇고, 뭔가 특별한 것 같습니다.”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막시밀리언의 물음에 반드레온이 싱긋 웃었다.
“맞습니다. 지금의 저 녀석들은 특별하지요. 몸 안의 제어장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어장치?”
“사람은 자신이 가진 힘을 다 쓰지 못합니다. 누구다 다 그렇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용을 강제하는 것을 제어장치라 부른다면, 저놈들은 지금 그 제어장치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따라서 본래 인간은 쓰지 못하는 잠력(潛力)을 끌어내어 쓸 수가 있지요.”
“신기한 말씀이군요.”
“하하. 신기해하실 것은 없습니다. 사실 코누디스 남작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 말씀은?”
“제국의 광전사들에 대해서…들으신 바가 있지 않으십니까.”
광전사.
어찌 그들을 모르겠는가.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제국인이 아니어도 풍문으로나마 그들의 전설과 같은 무용담을 알고 있다. 백 명의 광전사가 1만의 적을 패퇴시킨 일화 같은 것은 어린 아이들도 전쟁놀이를 하며 종종 써먹는 주제다.
“제국의 신비로운 술법으로 만들어진 일당백의 용사들이라 하지요. 그들이 각인 받은 술법이 바로 저것과 비슷한 부류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들은 것을 토대로 추측해 보았을 뿐. 하지만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광전사들의 풍문에 대해 코누디스 남작께서도 알고 계시지요? 백 명의 광전사가 이틀 밤낮을 싸워 만 명의 적을 패퇴시키고, 적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선 채로 죽었다는 이야기.”
“워낙 유명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잠력은 본래 쓸 수 없는 힘이자, 써서는 안 되는 힘입니다. 인간의 몸이 힘을 감당할 수 없기에 잠력은 잠력인 것이지요. 그런 힘을 억지로 끌어 쓴다면 인간의 몸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몸이 상한다는 말입니까?”
“상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릇에 균열이 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되돌릴 수 없는 손상이지요.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힘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운이 좋다면 폐인이 될 것이고, 운이 없다면…….”
뒷말은 삼켰지만 그 내용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광전사들은 적의 칼에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이 말은 그들의 용맹을 칭송하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힘을 사용하며 자멸하는 그들의 마지막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할 겁니다.”
“……”
“그들의 힘과, 저 놈들이 발휘하고 있는 힘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광전사들의 비술(秘術)이 보다 발전된 것이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짤막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경기는 끝나가고 있었다.
열 세 명의 죄수들은 몸에 이런저런 상처는 입었을지언정 누구 하나 쓰러진 자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 죄수들 역시…….”
“예. 이기든 지든, 어차피 놈들은 여기서 죽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저놈들끼리 붙여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하하하.”
“이런. 그건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링고드 남작. 아쉽다 하심은?”
두 영주의 시선을 받은 링고드 남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귀한 소재가 아닙니까. 이대로 끝내기에는 아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흐음. 다른 생각이라도 있으시오?”
“제가 폴사도를 떠나올 때, 커닐레이 백작님께서 은혜롭게도 제 호위를 위해 그분의 친위 병력 일부를 붙여주셨습니다. 그들 모두가 일당백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용사들이지요.”
“호오.”
반드레온이 흥미를 보였다. 반면 막시밀리언은 담담했다.
“위글로우까지 오는 길이 너무도 평온하여 그들의 몸이 다 굳은 차입니다. 그런 차에 마침 저렇게 진귀한 소재들이 있으니. 어떠십니까? 폴사도의 용사들에게 그들의 용력을 뽐낼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나야 상관없소. 하지만 저것들은 선물이오. 그리고 선물은 이미 주인을 찾았으니, 허락을 해도 주인께서 하셔야겠지.”
둘의 시선이 막시밀리언에게 모였다.
눈을 빛내는 링고드 남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막시밀리언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