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240화 (240/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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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글로우 시내 북쪽에는 군사들의 훈련에 쓰이는 대연병장이 있다. 한 번에 수백 명의 병사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크게 지어진 연병장이었는데, 열흘에 여드레 정도가 쓰이는 만큼 평소에 잘 정비가 되곤 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 뜬금없이 목조 구조물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연병장 외각을 둘러싸는 목책이 단 하루 만에 세워지고, 백 명이 넘는 병사와 인부들이 동원되어 연병장 바깥쪽에 시설물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몰라. 영주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이래.”

흥겨운 축제 중에 난데없이 소집령을 맞은 병사 및 인부들은 투덜대면서도 부지런히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나흘이 지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무슨 공연장 같이 생겼는데.”

커다란 연병장을 중심으로 그를 에워싸는 목책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밖에는 계단형식으로 뻗어나가는 목조 좌석이 펼쳐진다. 3교대로 밤낮을 잊어가며 작업에 매진할 때는 몰랐는데, 다 끝나고 나서 보니 흡사 공연장과 같았다. 물론 규모 면에서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차이가 나지만, 모든 구조물들이 세워진 것이 딱 연병장을 바라보는 모양새가 아닌가.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알 게 뭐야. 우리가 할 일은 끝났어. 젠장. 축제도 제대로 못 즐기고 땀만 신나게 뺐네.”

“그래도 삯은 두둑하게 받았잖아? 오늘부터 요 며칠 못 즐긴 것까지 몰아서 즐겨보자고.”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지 못하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잘 것 같아.”

그렇게 인부들의 머릿속에 짧게 스쳐지나간 의문은 다음날이 되자마자 풀렸다.

*

“이거…이 사람 때문에 괜히 부담을 드리는 건 아닌가 했습니다만, 불과 나흘 만에 이런 물건을 마련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완성된 ‘경기장’을 보고 반드레온이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막시밀리언은 별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들은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귀빈석에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는 ‘무대’는 물론이요, 주변의 ‘관람석’들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모두들 공사다망하신 분들이 아닙니까. 제 욕심으로 여러분을 길게 붙들 수는 없었기에, 급한 대로 이렇게 허술히 급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디 부족하다 탓하지는 말아주시오.”

“탓하다니요. 그 무슨 말씀을.”

“코누디스 남작께서는 너무 겸손하십니다.”

“그럼, 내일입니까?”

막시밀리언은 대답 대신 반드레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반드레온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최고의 여흥이 될 것이오.”

“모렌스 남작께서 이리도 자신 있게 말씀하시니,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이미 이야기를 들어 반드레온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반드레온이 내비치는 자신감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과한 감이 없지 않았다.

‘말을 가벼이 하는 자는 아닐 터인데. 필시 다 드러내지 않은 뭔가가 있는 게로군.’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막시밀리언은 싱긋 웃었다. 반드레온이 감추고 있는 게 무엇이든,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것이다. ‘선물’에 대한 감상은 내일 받아보고 나서 떠올려도 늦지 않다.

*

“와아아아아!”

내성과 외성이 성벽과 성문으로 분리되어 있듯, 본래 영주의 연회장에서 열리는 연회와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 평민들의 축제는 같은 시간에 위글로우라는 같은 공간 안에서 열리고 있음에도 조금도 섞이지 않는, 전혀 별개의 행사였다.

그러나 오늘, 그 전혀 별개였던 두 개의 행사가 한 자리에서 어우러졌다. 철통 같이 경계를 서는 병사들을 바로 근처에 두고서도 관람석을 꽉 채운 시민들은 중앙의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붉은 공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싸운다. 사람과 사람이, 혹은 사람과 짐승이. 피를 튀기며 싸운다.

처음에는 끔찍한 광경에 눈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리던 이들이 제법 있었으나, 몇 번 ‘공연자’들이 바뀌자 시민들은 차차 잔혹함에 익숙해져갔다. 그들은 곧 어디선가 들리는 함성에 동조했고, 두려움을 흥분으로 덮었다. 이제는 어디서도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린다한들 그것은 의미 없는 탄성과 다르지 않았다. 두려움과 꺼림칙함은 어디에도 묻어 있지 않았다.

“저질스러운 공연이군.”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군터가 나직이 뱉은 말을 미겔은 용케도 들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군터에게 말했다.

“천박하지 않은가.”

멀리서 보는 것은 어지간하면 즐겁다. 당장 저 아래서 혈전을 벌이는 노예나 죄수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지만, 목책 너머에서 구경하는 이들에게는 놀이가 아닌가.

그러나 군터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런 싸구려 놀이는 투사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겼다. 피 흘리는 노예에 대한 연민이 아니다. 그저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대하듯, 재미없고 짜증스러울 뿐이다.

“군중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투라는 것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하니까요. 저들 중 누가 직접 자신의 목숨을 걸고 칼을 들어봤겠습니까. 보십시오. 그들은 그저 피의 마력에 취할 뿐입니다. 누구의 피가 어떻게 흐르든,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지요.”

“쯧!”

함성이 귀가 따갑도록 쉬지도 않고 이어진다. 미겔의 말을 부정할 수 없으니 군터는 그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인정은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없다.

투기(鬪技)를 감상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대체 무슨 재미가 있단 말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표정 관리는 좀 하십시오. 어쨌거나 영주님들께서 계획하신 자리가 아닙니까.”

“음.”

군터와 미겔을 비롯한 신하들은 영주들이 앉은 곳에서 제법 떨어진 자리에 있었다. 지위에 따른 좌석 배정이었다. 가장 상석에는 영주들이, 그 밑으로는 귀족들이. 또 그 밑으로는 군터와 미겔 같은 고위 관료들이 자리하는 식이다.

덕분에 군터가 작게 속삭이는 말이나 살짝 찡그리는 표정 따위는 영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런 구시렁거림은 바로 옆에 앉은 미겔 정도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나저나 급조한 것치고는 괜찮지 않습니까? 경께서는 마음에 안 드실지 몰라도, 시민들은 이렇게나 좋아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곳에 온 자들은 지금의 경험을 한동안 잊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즐거웠던 만큼 영주님을 찬양하겠지요.”

“…….”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중간에 연병장(오늘만큼은 경기장이라고 부르는)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걸릴 때 시민들이 몇 번이나 “영주님 만세!”를 외치는 것을 들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이번엔 바람잡이들을 동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자발적인 함성이었다.

와아아아아아!

결판이 났다. 철퇴를 든 사형수가 창을 들었던 노예 두 명을 쓰러뜨렸다. 개중 한 명은 머리가 터져서 절명했고, 다른 한 명은 어깨가 으스러진 채 한 손으로 땅을 밀며 도망쳤다. 철퇴를 든 사형수는 느긋한 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죽여! 죽여!

우습다. 시민, 아니 관중들은 마치 원수의 최후를 바라듯 격렬하게 죽음을 외쳤다. 이미 반쯤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노예의 숨통이 끊기면 무슨 대단한 보물이라도 얻는 것처럼.

“재미있지 않습니까.”

“…….”

“사람이라는 것이 본시 이런 것일지 모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어리석지요. 그들은 즐길 거리만 있다면 모든 게 다 좋은 겁니다.”

“자네는 뭐가 다르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아닙니다. 저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저들과 제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그저 인식의 차이일 뿐이겠지요.”

“인식?”

“저 역시 저들과 같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작은 것을 탐하고, 그것에 환호하던 시절이지요.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것에는 만족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가지고 누리다보니 어느 순간 그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진 게지요. 그때부터 저는 더 큰 것을 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만족하고 즐거워했던 것들을 하찮게 여기게 되었지요.”

“도적질을 할 때인가? 그런 이야기를 잘도 하는군.”

“하하! 아무튼 요는 그렇다는 겁니다. 혹시 경께서는 개를 어찌 다뤄야 하는지 아십니까?”

“무슨 말이지?”

“개라는 놈은 말입니다. 적당히 굶주린 상태가 가장 좋습니다. 너무 굶기려 하면 주인을 물고, 너무 배를 채워주면 퍼져서 사냥을 나가려 하지 않지요. 그렇기에 적당히 굶기는 겁니다. 작은 고기 한 점에도 잘 따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글쎄.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군.”

“아하하! 그럴지도 모르지요. 사실 이건 제가 방금 지어낸 이야기니까 말입니다. 음…경께 농을 던지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저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도적질을 하던 시절의 제가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자네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아.”

“그러시겠지요. 경과 저는 참 많이 다르니까 말입니다. 하하.”

기어이 떨어진 철퇴가 울부짖는 노예의 머리를 부쉈다. 수백이 넘는 관중들의 환호성이 절정에 달했다.

“그나저나…잠잠하군요. 딱 좋은 무대가 마련됐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잘못 짚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지. 인파에 밀려서 들어오지 못했는지도.”

“흐흐. 정말 그런 거라면 우습겠군요.”

간간이 잡담을 주고받는 와중에 몇 개의 ‘경기’가 더 끝이 났다. 늑대 무리에 둘러싸여 격렬히 저항하다가 끝내 살점이 뜯긴 노예들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경기장을 청소하기 위한 인부들이 들어섰다.

“이제 곧인가?”

“예. 드디어 이 소란의 원인이 등장하겠군요.”

정확히 따지자면 원인은 브록스 영주, 반드레온 모렌스 남작일 것이다. 그가 가져온 ‘선물’이라는 것 때문에 이런 거창한 무대가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듣는 귀가 없을 거라지만, 어찌 감히 한 영지의 영주를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저 이렇게 그가 가져왔다는 ‘선물’에 대해 논할 뿐이다.

웅성웅성

그때, 관중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정리가 끝난 경기장에 갑자기 수십 명이 대거 올라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 경기장으로 올라온 이들은 바로 조금 전에 상대의 머리를 깨부수고 경기장에서 내려갔던 사형수를 포함해, 이제껏 벌어진 ‘경기들’에서 승리하여 살아남았던 자들이었다.

당황하는 것은 관중들뿐이 아니었다. 경기장으로 올라온 ‘승자’들 역시 왜 자신들이 다시 경기장에 올라왔는지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한 번의 승리로 목숨을 건졌다고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들의 시선은 곧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상석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코누다이안의 영주에게로.

“들으라!”

막시밀리언은 웃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일순 떠들썩하던 관중석이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먼저 너희 모두가 거둔 승리를 치하하마! 동시에 축하의 말도 내리겠노라! 이제 너희는 삶과 자유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시련을 넘어선다면, 코누다이안의 영주 막시밀리언 코누디스의 이름을 걸고 너희에게 자유를 선물하겠다!”

막시밀리언은 연달아 외쳤다. 이번에는 경기장이 아닌, 빼곡하게 가득 찬 관중석을 둘러보면서였다.

“코누다이안의 백성들이여! 여흥의 끝이 다가왔노라! 내 너희를 위해 준비한 마지막 즐거움을 원 없이 누리도록 하라!”

와아아아아아!

영주님 만세!

코누디스 남작님 만세!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레와 같이 터져 나오는 환성. 막시밀리언은 웃으며 슬쩍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경기장 외각, 목책 밖에서 대기하던 무관이 그 신호를 읽고 휘하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철창이 박힌 몇 대의 수레가 경기장 옆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철창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연 병사들이 물러나고, 무관은 자그마한 피리 같은 것을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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