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그냥 친목도모를 위한 연회가 아니다. 영주의 생일이다. 그것도 동부 3영지(곧 그리 될)의 주인 중 하나로서, 말하자면 나름대로 명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생일에는 동부 영지들에서만이 아니라 더 멀리서 찾아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직접적으로 그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거나, 얽힐 가능성이 있는 이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 중에 지금 막시밀리언이 접견하고 있는 이는 전자에 속했다.
“백작님께서는 직접 오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전해달라 하셨습니다.”“하하.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말이오. 폴사도에서 이 코누다이안까지가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무엇보다 커닐레이 백작님께서 공사다망하심을 내 알고 있거늘.”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드릴 뿐입니다. 마음의 부담을 덜었습니다.”
“즐기기 위해 마련한 자리요. 링고드 남작께서도 마음에 진 짐은 다 내려놓으시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시기 바라오.”“감사한 말씀입니다.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
링고드 남작이 물러가고, 막시밀리언은 웃는 낯을 지웠다. 그는 옆에 놔둔 과실주를 들이키며 뒤편에 서 있는 코르넬에게 말했다.
“저 자에게서 눈을 떼지 말게나.”
“예.”
“비루먹은 개를 사냥했더니 이제는 늑대가 어슬렁거리는군.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단 한 시도.”
군터가 물었다.
“당분간 중앙조정에서 더 이상의 영지전은 허락지 않을 거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꼭 병력을 동원해 부딪쳐야 전쟁이 아니야. 이해관계가 부딪치고 수를 쓰기 시작하면 그 또한 전쟁이지.”
“폴사도 영주가 수작을 부려올 거라 생각하십니까.”
“이고르 커닐레이는 사자다. 설령 사냥할 마음이 없더라도, 사자가 주변을 지나가면 다른 짐승들은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지.”
“그를 너무 크게 보시는 것이 아닙니까.”
왕국에 단 일곱뿐인 백작이다. 작위만 해도 그렇고, 지닌 영지의 규모를 봐도 차이가 크다. 막시밀리언이 크루기스를 반 이상 먹어치우게 된다고 해도 그 차이는 여전히 현격하다. 단순히 전력 면에서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측면부터 시작해 온갖 부분에서 열세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차피 그를 확실히 재단할 수 없다면, 낮게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높게 보는 것이 낫다.”
막시밀리언이 픽 웃으며 말하니, 군터도 반쯤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이고르 커닐레이가 신경 쓰이는 이웃임은 분명했다. 신경을 써서 나쁠 것은 없다는 거다.
“반드레온 남작께서 드십니다.”막시밀리언이 다시 과실주를 한 모금 삼켰을 때,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모습의 장한이 들어섰다.
“하하! 코누디스 남작님. 간만에 뵙습니다.”
“간만입니까?”“그 사이 이런저런 일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이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남작님께서는 제가 그리 반갑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흐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리 찾아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자, 앉으시지요.”
하나가 지나가니 또 다음 하나가 시작된다.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쉼 없이 상대를 살핀다. 웃으며 던지는 말들에는 진심이 없고, 흘리듯 던지는 말에는 의도가 가득하다.
‘지독하군.’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데도 더운 느낌이다. 그저 뒤에 서서 지켜보는 입장인데도 숨이 턱 막혀온다. 군터는 문득 막시밀리언의 얼굴에 주름이 늘고, 흰 머리가 번져가는 이유가 단지 세월이 흘러서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실례합니다 군터 경. 소인, 비세스라 하옵니다.”
“군터 경. 긴히 드릴 말씀이…….”
막시밀리언의 접견이 끝나고 연회장으로 나온 군터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몇몇 인사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소문이 퍼졌군.’
한 번 시간을 내어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요 며칠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간 것이리라. 그간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려는 인사들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군터 경. 즐거운 자리에서 기분이 언짢아 보이시는군요.”
사나운 기세를 풀풀 풍기며 날파리들을 쫓아내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나오는데,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무슨 볼일인가.”
“따로 용무는 없습니다. 경과 제가 가는 길이 겹쳤을 뿐.”
감찰대장 미겔이 멋쩍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군터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 코누다이안에서 속이 가장 음흉한 인물을 뽑으라 한다면 군터는 어떤 고민과 주저도 없이 미겔을 뽑을 것이다. 그것은 미겔의 전직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장난은 그만두게.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미겔과, 그 휘하의 감찰대는 코누다이안의 그림자다. 그들은 오직 영주인 막시밀리언의 명령에만 따른다. 드러난 그들의 업무는 관리들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감찰이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 그렇다는 것이고 그들이 실제 하는 일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다. 그 은밀함은 막시밀리언의 최측근인 군터조차 다 알지 못할 정도였다.
결코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런 흥겨운 연회장에서 따로 몸을 빼서 따라올 정도라면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인 것일 리 없다.
“제가 경께 어지간히도 신용을 사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감찰대의 수장으로서는 좋은 일이 아닌가. 이제 슬슬 본론을 이야기하게.”
“그도 그렇군요.”
미겔이 웃으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실은…경께 협조를 구하고자 합니다.”
“협조?”
“수상한 놈들이 도시로 들어왔습니다. 제 수하들 몇이 따라붙었습니다만…어느 순간 소식이 끊겨버렸습니다.”
“도시까지 들어온 놈들을 놓쳤단 말인가. 실망스럽군.”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명백히 저와 감찰대의 실책이지요. 허나 변명하자면, 숨어든 놈들은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변명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감찰대의 실력은 군터도 잘 알았다. 감찰대가 처음 만들어지고 난 후, 온갖 비밀스러운 일들을 처리해 온 그들은 틀림없는 음지의 실력자. 헌데 그런 이들이 다른 곳도 아니고 집 앞마당에서 낭패를 봤다면, 미겔이 말하는 ‘수상한 놈들’의 실력은 틀림없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내게 할 부탁이란 건?”
“그런 놈들이 하필 이 시기에 위글로우로 올 이유는 하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연회인가.”
“파투를 내려는 놈들일 수도 있고, 귀빈으로 온 자들의 일행일 수도 있겠지요. 물론 지금으로서는 그저 의심일 뿐입니다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주님께는 보고를 드렸는가.”
“놈들의 수는 스물이 넘지 않습니다. 이런 일로 영주님께 제 무능함을 알리고 싶지는 않군요.”
막시밀리언의 실망을 사고 싶지 않으니 은밀하게 처리하고 싶다는 뜻이다. 마음은 알겠지만 그에게 해줄 답은 정해져 있다.
“거절하지. 자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경께 부담을 드리는 일임을 압니다.”
“알면서도 그런 부탁을 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경께서 제게 도움을 주신다면, 저 또한 경께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자네의 도움이 필요할 일이 뭐가 있겠나.”
“글쎄요. 그건 제가 아니라 경께서 아시겠지요. 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제법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돌아섰던 군터는 잠시 멈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 놈들이라고 해도, 위글로우까지 들어왔다면 감찰대가 놈들을 놓칠 리 없다.’
게다가 놓쳤다고 해도, 애초 감찰대의 임무는 치안 관리 같은 것이 아니다. 놈들의 목적을 알고 있으니 연회장 주변만 촘촘하게 살피고 있으면 그만이다. 굳이 별로 친밀하지도 않은 자신을 찾아와 치부라고 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진의가 뭐냐.”
마음속에 의심이 차오르니 말투도 딱딱해졌다. 억누르고 있던 사나운 기세가 실타래처럼 풀어져 나왔다. 여차하면 칼부림이라도 벌일 것만 같은 분위기.
미겔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도움을 원합니다. 경과 제가 주고받는 도움을 말입니다.”
“말이 재미있군.”
이제야 감이 조금 잡혔다. 미겔의 웃음이 조금 진해졌다.
“요 며칠 동안, 경께서 조금 달라지신 것 같다 생각했지요. 그래서 지금이라면 경과 이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기가 차는군. 얄팍한 수작질을 부리다니.”
“신뢰라는 것은 작은 것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뢰라. 말은 좋다만, 어째서 내게?”
군터는 자신을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 하지 않았다.
일신의 무공에는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다.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시기에 그가 내세울 거라고는 영주인 막시밀리언의 총애를 받는다는 점 하나다. 그러나 그 총애가 실질적으로 무언가 득이나 강점이 되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군터는 미겔이 미트라스나 미겔, 그 외에 코누다이안의 다른 실력자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처신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미겔이 택한 처세술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지 않음으로써 누구와도 멀리 지내지 않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줄 알았던 미겔이 이렇게 먼저 다가왔다. 현 시점에서 실세라고는 볼 수 없는 자신에게 말이다. 자연히 그 저의가 의심 될 수밖에 없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군터 경께서 욕심이 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자들은 탐욕스럽다는 이야기인가?”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다시 말장난이군. 아무튼 좋아. 나머지 이야기는 따로 자리를 가진 후에 이어가도록 하지.”
경계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겔의 제안에 흥미가 생겼다. 자신만의 세력을 일구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동시에 한계를 느꼈던 군터다. 다소 껄끄럽기는 하지만 미겔과 손을 잡는다면 그 한계를 단숨에 넘어설 수도 있으리라.
“제 제안.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아니. 이야기를 들어는 보겠다는 뜻이다.”
흥미가 생겼을 뿐이다.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단박에 물리쳐버리리라.
*
연회가 이틀 째 되는 날. 자리가 만들어졌다. 무수하게 몰린 축하객들 중에서도 극히 소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들만이 모인 자리였다.
“하하하! 정말 즐거운 자리입니다. 근자에 이렇게 시원하게 웃은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예요.”
“너무 띄워주시는군.”
“공치사가 아닙니다. 이런 훌륭한 자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다 주인의 격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대놓고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말들이 심심찮게 튀어나왔다. 보통 때였다면 당사자나 듣는 사람이나 겸연쩍어했겠지만 적당하게 들어간 술과 흥겨운 분위기는 자리한 이들의 이성을 흐렸다.
“하하핫! 그 말이 참으로 옳소. 허나 이런 훌륭한 자리에도 부족함이 없지는 않으니, 나는 오직 단 한 가지가 아쉬울 뿐이오.”
“음?”
말을 꺼낸 이는 반드레온이었다. 막시밀리언과 좌중의 시선이 쏠리니, 반드레온은 들고 있던 술을 비워내고 소매로 입술을 훔쳤다.
“귀인들이 있고, 술이 있으며, 음악과 진미가 가득하여 풍미가 있소. 그야말로 풍족한 연회요. 다만…어디까지나 이 사람의 개인적인 감상이오만, 너무 무난하여 도리어 심심하지 않은가 싶소. 여기에 이 가슴을 뛰게 하는 격렬함 하나만 더한다면 그야말로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련만.”
“그렇다면 모렌스 남작께서 말씀하시는 격렬함이란?”
“영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몸이 따로 챙겨온 선물 보따리를 풀어보고 싶구려. 어떻소. 이 몸의 선물, 받아주시겠습니까?”
반드레온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