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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38화 (238/1,064)

<-- 2부 -->

막시밀리언의 생일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 시일은 여유가 있지만, 이미 올 만한 이들은 대부분 위글로우에 들어온 상태였다.

그에 따라 군터는 그와 만나고자 하는 이들과의 접견을 시작했다. 나름대로 추리고 추렸음에도 그 수가 수십에 달하는지라 부지런히 시간을 쪼개고 쪼개야 했다.

“이름 높으신 군터 경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

“다름이 아니라…….”

“군터 경께서 제게 힘을 실어주신다면……!”

“제가 군터 경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어쩌면 이렇게 하는 말이 다 똑같을 수 있을까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같은 말을 하면서 짓는 표정, 몸짓도 무엇 하나 다른 점이 없다. 간이든 쓸개든 다 빼줄 수 있을 것처럼 굴면서 뒤를 봐달라는 말을 몇 바퀴 씩 빙 돌려서 한다. 그런 자들을 하루에 몇 명씩 만나고 있자니 전장에서 며칠 씩 고투를 치렀을 때나 느꼈던 진한 피로감이 엄습해왔다.

그런 피로가 절정에 달았던 것은 인자한 웃음을 흘리던, 향신료를 주로 취급한다는 상단의 단주를 만나던 때였다.

“하하. 군터 경께서는 걱정이 없으시겠습니다. 영주님께 가장 총애 받는 기사이시지 않습니까. 코누다이안은 물론, 크루기스의 그 누구도 경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 던지는 공치사는 평범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 이전에는 들은 적 없던 색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게다가, 훌륭하신 아드님까지 두셨다지요.”

“……?”

이제 7살인 보리스의 소문이 크루기스까지 퍼졌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군터는 이 중늙은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아들은 아니지만, 제게도 또래의 여식이 있지요. 요즘에는 그 녀석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삶의 낙입니다.”

“…….”

뒷목이 뻐근해져왔다. 군터는 그 뒤로 12살에 불과한 아이가 벌써부터 미색으로 소문이 났느니, 마음씨가 그리도 곱다느니 별별 소리를 다 지껄여대는 중늙은이를 최대한 완곡한 말로 물리쳤다. 길게 끌 필요도 없었다. 억누르던 불편한 심기를 풀어놓으며 이만 하자는 한 마디면 족했다. 과욕을 부리던 중늙은이는 금세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서는 몇 번씩 사죄하며 물러갔다.

“미친놈 같으니.”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무르던 중, 모페이브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나쁜 의도는 없었을 겁니다.”

“뭐라?”

“슬하에 아들 하나 없이 딸만 열 하나라더군요. 그나마도 정실부인에게서 본 자식은 장주님께 이야기를 꺼냈던 막내딸 하나뿐이지요.”

“그래서?”

“아마 그 자의 의도는, 사돈을 맺는 대신 가업을 바치겠다는 것이었을 겁니다. 어차피 후계도 없는 상황이니만큼 데릴사위를 들여 뒤를 잇게 하느니, 차라리 살아있을 때 든든한 뒷배나 챙기겠다는 생각이었겠지요.”

“…….”

“그 나름대로는…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해서 꺼낸 말이었을 겁니다.”

그를 우습게 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모페이브의 설명에 군터의 노기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것은 여전했다.

“고작 7살짜리 아이다.”

“장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조금 심한 곳에서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끼리의 혼사를 약속하기도 합니다.”

속이 더부룩해졌다. 동시에 군터는 정략혼이라는 것의 대상이 될 정도로 자신이(정확히 말하자면 당사자는 보리스였지만) 높이 올라섰음을 새삼 자각했다.

“완전히 사색이 되어 도망치듯이 뛰쳐나가더군요. 적당히 달래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주님께서 보시기에는 보잘 것 없는 자이지만, 그래도 굳이 서로 나쁜 인상을 가질 필요는…….”

다시 뒷목이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따로 다시 만나지는 않겠다. 살라스. 네가…적당히 알아서 섭섭해 하지 않게 말해주겠느냐.”

“예. 제가 잘 말하겠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그래.”

막시밀리언의 생일 전까지 군터는 족히 스물이 넘는 인원을 접견했다. 하나같이 만나고 나면 묘하게 진이 빠지는 이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만난 모두가 다 그게 그거 같은 쭉정이였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눈에 띄는 이들도 드물지만 있기는 했다.

“감사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서신을 올리기는 했지만, 정말 뵐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만나자마자 하는 말도 전에 만난 이들과 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보이는 행동에서 차이가 있었다.

“소인, 자그마한 상단을 이끌고 있는 이포레테스라고 합니다.”

똑같이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느끼는 감정에는 차이가 있다. 어떤 것을 보고는 비굴하다 느끼고, 어떤 것을 보고는 예의가 바르다 느낄 것이며, 또 다른 것을 보고는 건방지다 느낄 것이다.

이전까지 만난 자들에게서 모두 비굴함을 느꼈다면, 이 이포레테스라는 자를 보며 군터는 당당함을 느꼈다. 긴장한 목소리를 내며 허리를 반으로 접은 듯 깍듯하게 몸을 숙이지만 그 어디에서도 움츠러듦은 느낄 수 없었다. 묘하게도 말이다.

‘피하지 않는군.’

그가 숙인 몸을 도로 폈을 때, 군터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와 또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사내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법 많은 인간군상을 봐 왔다 자부하는 군터로서도 처음 보는, 희한한 유형이었다. 손이며 발이며, 온갖 것들은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다 떨리는데 정작 시선을 마주하는 눈은 떨리지 않는다.

‘나쁘지 않다.’

군터는 썩 괜찮은 첫인상을 안겨준 사내에 대해 떠올렸다. 살라스를 통해 올라온 정보에 따르면, 이 이포레테스라는 자는 3대째 가업을 잇는 장사꾼이다. 그의 조부가 시작한 장사는 그의 부친 대에 이르러 크게 규모를 키웠고, 또 크게 쪼그라들었다. 몇 차례인가 상행이 도적들에게 약탈을 당한 탓이었다. 때문에 부친은 화병으로 앓다 숨을 거뒀고, 그 뒤를 이어 이포레테스가 스물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부터 상단을 이끌었다던가.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이제까지 다른 이들을 만났을 때는 이렇게 바로 치고 들어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가만히 앉아 어느 정도까지 상대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것이 이제까지의 대화 방식이었다.

하지만 제법 인상적인 첫인상 때문에 기대가 생겼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들이밀었을 때, 이 젊은 상인이 어떻게 반응할지 보고 싶었다.

“…경께 감히 청합니다. 저의 후견인이 되어주십시오.”

한 번 마른침을 삼키고는 즉답한다. 그 내용 역시 조금의 돌아감도 없는, 그야말로 일직선.

“애매한 말이다. 후견인이라 함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말 그대로, 뒤에서 저를 지켜봐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옵니다.”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군. 뒤에서 지켜 봐달라?”

“해가 비추는 곳에는 그림자가 생길 수 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뿐이옵니다.”

“그러니까…불이익을 당하는 일만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군.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예. 정확하시옵니다.”

“…….”

흥미롭지 않은가. 어렵게 만든 자리에서 청하는 내용치고는 굉장히 소소하다. 모르긴 몰라도, 무언가 얽힌 사연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해두지. 난 그저 관리로서의 의무에만 충실할 것이다. 너를 위해 그 어떤 사사로운 행동도 하지 않을 거란 말이다.”

“저로 인해 군터 경께서 지저분한 곳에 발을 담그시는 일은 없을 것임을 이 목을 걸고 약조 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너를 지켜봄으로써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제가 마련할 수 있는 자그마한 사례입니다.”

“뇌물인가?”

“가당치 않습니다. 공명정대한 관인을 위한 후원이지요.”

“흥.”

마음을 굳히고 시작한 접견이었지만, 역시 낯간지럽다. 부정한 일을 해주고 받는 대가는 아니라지만, 이 역시 뇌물이라면 뇌물이다.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네 이름을 기억하겠다.”

“…감사하옵니다.”

감정이 격해졌는지, 이포레테스는 조금 상기된 모습으로 물러갔다.

“이포레테스 상단주가 후원금을 남기고 갔습니다.”

후에 확인한 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이번에 소를 구입하면서 허전해졌던 주머니가 다시 가득 찰 정도였다.

“알려진 바로만 놓고 보면 상당히 능력 있는 자입니다. 선대의 실책으로 세가 기운 상단을 다시금 키워낸 것은 온전히 그의 능력 덕분이라고 합니다. 또한 유약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배짱도 두둑한 자라고 하더군요.”

“능력은 모르겠지만, 배짱은 있어 보이더군.”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이전까지가 너무 시원치 않았으니까.”

단지 그뿐인 것은 아니다. 앞서 만나보았던 자들에 비교하지 않더라도 이포레테스는 확실히 눈이 가는 자였다.

“이제 얼마나 남았지?”

“반 정도입니다.”

“쯧. 연회 중간에도 시간을 내야겠군.”

“좋게 생각하시지요. 그만큼 장주님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너도 참 능글맞아졌군.”

“송구스럽습니다.”

송구하다면서 여전히 웃는 표정이다. 더 말하자니 괜히 속 좁게 트집 잡는 것 같아 혀만 차고 말았다.

“위로가 되실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일정은 이걸로 끝입니다.”

충분히 위로가 됐다. 군터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혔다. 어느새 어둑해진 바깥 풍경이 시원한 바람과 함께 그를 반겼다.

“내일부터는 바빠질 거다. 시간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군.”

“예. 그렇지 않아도 남은 자들에게 미리 일러두었습니다. 그들 모두 여차하면 연회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더군요.”

“어지간히도 급한가보군.”

“그럴 법도 하지요. 크루기스의 인사들은 다급할 겁니다. 이제 곧 크루기스가 코누다이안에 병합이 되면 그들의 기반도 위태롭게 흔들릴 테니까 말입니다.”

“크루기스 전역이 합쳐지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센트리올에 흡수 되겠지.”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치열하게 선을 대는 중일 것입니다. 이쪽으로 온 자들은 크루기스 북부, 혹은 중부에 기반을 둔 자들입니다.”

코누다이안의 상인 및 유력자들은 이미 저마다 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하루빨리 크루기스가 정식으로 코누다이안에 병합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탐스런 먹잇감을 보며 눈을 빛내는 승냥이들 같이 말이다.

이리도 많은 자들이 ‘군터 경’을 찾아온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인 것이다. 주고받는 인간관계와는 담을 쌓았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난 ‘군터 경’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을 만큼.

‘이제…나도 귀찮은 일에 얽히는 일이 많아지겠군.’

그간 군터는 무려 기사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복잡한 이해관계에 휘말리는 일이 없었다. 이는 그가 관리들은 물론, 관 밖에 있는 자들과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트라스나 위벨 같은 경우만 보아도, 이런저런 논쟁에 휘말리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 오직 군터만이 그런 소란과는 관계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켜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인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가질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그에 반해 가지려는 자는 많다. 다툼은 필연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 않은가.’

비단 높은 자, 가진 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껏 그가 보아온 세상은 모두 그러했다. 갖고 싶다면 뺏어야 한다. 뺏으려면, 뺏기지 않으려면 싸워야 한다.

오래 전. 신출내기 애송이 십인장은 지금과 같은 자리를 꿈꿨다. 그때의 그는 출세를 하고 나면 무언가 대단한 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환상 너머에 자리한 실상은 어떤가.

똑같다. 아래나 위나 다를 것은 없다. 아래든, 위든, 살아가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비단옷을 걸쳤든 누더기를 걸쳤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갈증만 심했던 젊은 시절에는 그것을 몰랐다. 뭐, 알았다 해도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애송이 십인장 군터도 그고, 코누다이안의 기사 ‘군터 경’도 그다. 10년 전에 가지고 있던 갈증은 여러 가지 밑에 가라앉았을지언정 여전히 그의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이 지금, 뒷목을 주무르면서도 피곤한 시간을 이어가는 이유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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