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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37화 (237/1,064)

<-- 2부 -->

막시밀리언의 생일이 다가오면서 위글로우는 물론, 코누다이안 전역이 떠들썩해졌다.

“떠들썩했던 영지전 이후 처음 있는 행사가 아닙니까.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어떻게든 권력자들의 눈도장을 따내기 위해 대거 몰려들 겁니다. 사실, 영주께서도 그것을 어느 정도는 의도하고 계시겠지요. 덩달아 정식으로 이웃들과 인사도 나누시고 말입니다.”

먼젓번의 연회는 겉으로 웃으면서 뒤로는 칼을 숨긴 채 상대를 떠보는 자리였다면, 이번에는 어느 정도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이야기가 오갈 것이다. 싸움은 끝났고, 서로가 원하던 것을 대부분 얻었기 때문이다. 이 이상 혼란이 일 가능성이 근시일 내에는 없다고 봐도 좋으니 전보다는 진정으로 화기애애하게 자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 위글로우로 모여드는 자들 중에서는 끈을 잡으려 하는 자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크루기스의 유력가들 같은 경우가 그렇겠지요.”

“끈이라.”

크루기스의 유력가들은 한 순간에 주인을 잃었다. 막시밀리언은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들이 불안에 떨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안 좋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들 중에서는 장주님께 도움이 될 만한 자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굳이 전처럼 밀어내시기보다는 한 둘 정도 적당히 맞아들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모페이브가 넌지시 말했다. 그는 이번에 군터가 소들을 구입하며 막대한 재물을 소비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군터가 이전과는 달리 재물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군터는 변했다. 그리고 지금도 변하는 중이다. 모페이브는 그 변화가 긍정적이라 생각했다. 많은 이들을 이끄는 자는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가 보기에, 지금 군터는 그것을 자각해 가고 있는 듯했다.

“무언가를 받으면, 그만큼 줘야 한다.”

“맞습니다. 모든 사람 관계라는 것이 다 그렇지요.”

“하지만 난 더러운 일에는 엮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 사람을 가리셔야지요. 군졸들을 수하로 들이실 때와 같습니다. 두 손으로도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들이 장주님에게로 몰려올 겁니다. 장주님께서는 그 중에서 괜찮다 싶은 자를 택하시면 됩니다.”

군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탁자를 두드렸다. 검지가 나무와 부딪치며 톡톡 소리를 낼 때마다 그의 마음은 조금씩 움직였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인정할 건 인정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처럼 수하들을 거느리기 위해서는 재물이 필요하다.

영지에서 나오는 정해진 봉급만 지급된다고 해도 그의 병사들은 공식적으로 그의 지휘 하에 계속해서 머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그들의 복종은 누릴 수 있을지언정, 충성은 살 수 없다. 그 차이를 군터는 제국의 애송이 십인장이었던 시절에 깨달은 바 있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그는 다르다. 명성도 명성이거니와, 지금 군터 천인대의 병사들은 모두 그의 밑에서 실전을 몇 번씩이나 겪은 용병(勇兵)들이다. 그 단결력과 충성심은 의심할 바 없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강철보다 단단한 것 같아도 사실 진흙보다도 무른 것.

그저 상관으로 남고 싶다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들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욕심이지.’

군터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관병을 사병처럼 부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이럴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인상을 찌푸린 채 내키지 않는 일을 하려 하는 것이다.

변명하자면, 그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다른 자들 때문이었다. 미트라스, 미겔, 그 외의 고위 무관들이 하는 행동들에서 껄끄러움과 동시에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거느린 수하들에게 마치 제후가 된 듯이 행동했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권세를 누렸다. 선을 대기 위해 선물을 알음알음 싸들고 오는 객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를 통해 더 큰 권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막시밀리언은 그런 행동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빤히 알고 있음에도 그런 행태를 제지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런 부패를 용인한 것이다.

이러니 미적거리던 군터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수하 군졸들 사이에서 조금씩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았다. 그래도 이제까지는 알아서들 쉬쉬하는 것 같았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하여 불만이 쌓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군터 천인대의 병사들은 위글로우 최고전력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런데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어지간한 정병이라도 꼬인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그래.”

현명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바보가 되고픈 생각은 더더욱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을 외면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하물며 내색하지는 않는다 해도, 가슴속에 뜨끈한 불 한 덩이를 지피고 있다면야.

“바빠지겠군.”

마음은 굳혔다지만 그와는 별개로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듯했다. 앞으로의 일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가린다고 해도, 뭘 알아야 가릴 것이 아닌가. 그러자면 부지런히 정보를 캐야 할 것이다.

‘감찰대 녀석들이라면 이미 다 알아두었겠지만.’

군터는 회의 자리에서 매번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던 감찰대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곧 감찰대에게 손을 내민다는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런 꺼림직스런 놈에게 빚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직접 발품을 파는 수밖에.’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그의 수하들이 발품을 팔게 되겠지만, 어쨌든 그 수밖에는 없다.

“그나저나, 요즘 하고 있는 연구는 잘 되어 가나?”

“아직은 미진합니다. 장주님께는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내게 미안해 할 필요 없다. 연구에 대한 지원은 네 삯이니.”

영성을 지닌 귀물, 칸젤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다시피 끝마친 모페이브는 몇 달 전부터 새로운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인형술(人形術)에 대한 연구라고 했는데, 군터가 말레이드에서 대적한 바 있던 시체거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시도는 옛적 영생의 구도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불멸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갔지요. 부여(附與術)이 바로 그 갈래 중 하나입니다.”

인형술을 연구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 흥미를 보인 군터에게 모페이브가 장황하게 설명한 내용 중 하나였다. 작은 호기심으로 뱉은 물음 한 마디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답변으로 돌아왔고, 군터는 후회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가 이해한 것은 단 하나였다. 모페이브가 굉장히 의미 있고 대단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

“성과가 있기를 바라지.”

“감사합니다.”

*

막시밀리언의 생일이 점차 다가옴에 따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만나고 싶다는 정중한 서신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군터는 언제고 그가 원하는 시간에 찾아뵙고 싶다는 이들의 이름을 모두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살라스로 하여금 그들에 대해 알아보게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 위글로우와 크루기스를 오가는 것은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지만, 막상 서신을 보낸 자들에 대해 탐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근거지에서는 행세깨나 하는 자들인 만큼 그들에 대한 정보는 귀만 기울이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알아본 바, 서신을 보낸 자들에 대한 정보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의외로군.”

살라스가 올린 보고서를 보며 군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고 있는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그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 중 대다수는 상인들이었다.

“돈을 다루는 자들은 정보에 민감하다 들었습니다. 아직까지 돈으로 장주님을 후원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지요.”

“…….”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특별히 감추려고 한 적은 없다지만, 이리도 많은 자들이 자신의 사정을 꿰뚫어보듯 알고 있다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장주님과 같은 분의 일거수일투족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좋게 생각하시지요.”

살라스가 옆에서 거들었다.

“소관 역시 모페이브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장주님께서는 영지에 셋 뿐인 기사이십니다. 이 영지에 관심을 두는 이들 중 장주님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둘의 말에 군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옮겼다.

“고리대, 노예장사를 하는 자들은 제외하겠다.”

“후보가 많이 줄어들겠군요.”

모페이브와 살라스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군터가 제시한 기준은 타당한 부분이 있었다. 고리대로 돈벌이를 하는 자치고 뒷말이 무성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노예장사에 손을 대는 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노예장사꾼이라는 자들이 노예사냥에도 한 다리 걸치거나, 아니면 아예 대놓고 겸업을 한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둘 모두 악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부류인 만큼, 그런 자들과 얽히는 것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이면 몰라도, 그게 아니지 않은가.

“그럼. 말씀하신 대로 준비해두겠습니다.”

“음. 고생해다오.”

살라스는 군터가 제시한 기준에서 살아남은 명단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터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이 줄을 서면서 가장 바빠진 사람이 바로 그였다. 군터의 명을 받아 군졸들을 부려 여기저기 탐문 작업을 시키면서, 들어온 정보를 취합한 후에 모페이브와 머리를 맞대고 나름대로 분석 작업까지 한다. 무관의 업무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일이었지만 군터의 휘하 중에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이가 모페이브를 제외하면 그 한 명 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내가 무인인지조차 헷갈리는군.’

검을 쥐고 휘두르는 시간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시간보다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는 시간이 늘어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다. 불만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속이 답답해질 때가 종종 있다.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이 멍청한 놈들! 그렇게 빈둥대면서 움직이면 화살이 알아서 비켜가 줄 것 같으냐!”

훈련장을 지나는 도중, 사납고 우렁찬 고함소리에 시선을 주었다.

헉헉대는 수십 명의 병사들 앞에서 할렌이 윽박을 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린 태는 벗었지만, 장교 치고는 아직도 어린 나이인 그는 제법 그럴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긴, 나이만 어리다뿐이지 살벌한 전장을 몇 번씩이나 주파한 할렌이다. 이렇다 할 실전 경험도 없이 나이만 먹은 자들보다는 백배 더 지휘관에 어울린다 할 수 있을 터.

‘잘 어울리는군.’

순간적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자신이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나 싶어 자책감이 들었다.

‘내가 지치긴 지친 모양이야.’

어차피 크루기스에서는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보고가 들어올 터. 살라스는 간만에 위글로우의 거리나 한 번 돌아보기로 했다. 연무장에서 땀을 빼는 것도 좋지만, 그거야 어제도 했고 오늘도 한 것이니만큼 평소와는 다르게 바람을 쐬고 싶었다.

‘바쁘군.’

그렇게 나온 도시의 거리는 상당히 부산스러웠다. 영주의 생일이라는 큰 행사는 상인들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대목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고 싶고, 즐기고 싶은 법이다. 영지에서, 이 도시에서 가장 높으신 분인 영주님의 생일은 그런 욕구의 분출을 위한 명분이 된다.

살라스는 눈길을 끌기 싫어 항상 입던 갑옷 대신 평범한 천 옷에 얇은 외투 하나만을 걸치고 나왔다. 검도 외투에 가려 보이지 않는 터라 누구 하나 그에게 시선을 주는 이는 없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날 때면 간간이 지나가는 행인들과 몸을 부딪치기도 할 정도였다. 덕분에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살라스는 마음 편하게 거리와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음?”

그렇게 느긋하게 한 걸음씩 발길을 옮기던 차였다.

살라스는 그와 비슷한 복장을 한, 그야말로 평범한 한 사내에게 눈길이 가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 골목으로 모습을 감추자, 시선이 간 이유를 깨달았다.

‘저 자…분명 영주관저에서 본 적이.’

살라스는 본래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리고 영주관저로 갈 일이 있으면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는 만큼, 거기서 본 얼굴들은 대부분 흐릿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착각인가? 영주님의 친위병이 이런 곳에 있을 이유가.’

물론 영주의 친위병이라고 해도 위글로우에서 거주하는 만큼 근무 외의 시간에 거리를 돌아다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거라고 보기에는 그 자의 행동이 다소 수상쩍음 감이 있었다.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왠지 모르게 껄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살라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 작품 후기 ==========

원스토어 ebook에 이 소설이 올라갔습니다.

향후 연재는 평일 월수금, 주말 이틀 해서 주5일 연재가 됩니다. 향후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그렇게 갈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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