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저를 따로 찾으시다니. 하실 말씀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미트라스 경?”
“급할 거 뭐 있소? 경과 내가 이렇게 자리를 갖는 것도 간만이 아니오? 시간도 늦었는데 느긋하게 차나 마시며 이야기 해봅시다.”
무언가 속셈이 있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지만, 위벨은 짧은 한숨만 내쉬었을 뿐 자리를 뜨거나 미트라스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들은 피차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먼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영지에 셋 뿐인 기사로서 서로의 영역을 존중했고, 때때로 협력이 필요한 일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손을 잡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미트라스가 이렇게 따로 자리까지 마련해 그를 청했으니 여기서는 순순히 그의 바람에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세월 참 빠르지 않소?”
“예?”
“아아. 아직 경에게는 그리 와 닿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구려. 경이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서른 둘? 셋?”
“셋입니다.”
“후후. 좋구려. 정열이 넘치는 시기지. 뭘 해도 의욕이 넘치고, 하루 이틀 정도는 밤을 잊어도 거뜬하지. 나 역시 그랬던 시절이 있다오.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밖에 떠올릴 수 없지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우습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마흔 둘도 많은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여전히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때이지요.”
“물론 그렇소. 나 역시 내가 늙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 하지만 역시 기억 속에 남은 시절에 비하면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소.”
“…경. 경께서 하실 말씀이란 혹, 영주님의 후계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
미트라스는 대답 대신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위벨은 그러기 전, 미트라스의 입술이 일순 떨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예측이 들어맞은 것이다.
‘하아. 이런.’
하마터면 한숨이 입 밖까지 흐를 뻔했다. 위벨은 답답해지려는 속을 뜨끈한 찻물로 적시며 미트라스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역시 경 앞에서는 마음을 숨기는 게 의미가 없구려. 그래. 경의 짐작이 맞소. 나는 영주님의 후계에 대해 논하고자 그대를 청했소이다.”
“…….”
“물론 아직까지 영주님께서는 정정하시지. 하지만 지금까지 영주님께서는 자식을 보지 못하고 계시오. 이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야. 그렇지 않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막시밀리언의 나이가 올해로 마흔 하나다. 보통의 경우, 이 나이가 되면 슬하에 자식 몇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막시밀리언은 결혼을 늦게 했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조금 위험한 상황이었다. 영주부인이 아이를 못 갖는다느니, 영주가 불임이라느니 하는 망측하고 참람한 소문들까지 이미 알음알음 사교계에 퍼져 있는 상황. 미트라스의 우려를 괜한 걱정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이유다.
“내가 경의 속을 들여다볼 능력은 없지만, 이 사람만 속을 태우고 있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어떻소?”
“후우.”
사람의 생을 나무로 비유하자면 후계는 뿌리다. 선대가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으며 높이 뻗어 올라간다면 후대는 이어지는 몸통을 땅 속에서 지탱한다. 후대가 있음으로 인해 선대는 마음 놓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관계는 다르지만, 이러한 논리는 세도가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당장 코누다이안을 예로 들면, 영주인 막시밀리언을 따르는 가신 및 수하들은 막시밀리언 하나만 보고 그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막시밀리언이라는 사람 하나가 아니라 그가 지닌 힘, 즉 권력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막시밀리언 이후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혹여 막시밀리언이 갑작스레 중병에 걸려 보름 뒤에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의 권력을 이어받을 자식이 없는 이상 코누다이안은 필연적으로 분열될 수밖에 없다. 안정된 권력 밑으로 모여든 이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재앙이다. 불투명한 미래를 우려 하는 것은 섬기는 이에 대한 충성심과는 상관없다.
“난처한 상황이라 생각하오. 불가피한 일이라고는 해도 영주께서 후처를 들이시기에는 아무래도 리에론 가문의 눈치가 보이니까 말이오.”
타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후처를 들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리에론 가문이 민감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만약 적당한 나이의 여인이 리에론 가문에 또 있다면 문제가 쉽게 풀리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리에론 가문에 혼인 적령기의 여인은 없다. 코누다이안에서 골치를 앓는 이유다.
“영주님께서 드러내놓고 말씀은 안 하고 계시지만, 역시 같은 생각이시지 않겠소? 그렇기에 소문이 나도는 것도 그냥 두시는 것이겠지.”
“경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대안이란…혹, 양자입니까?”
“정말이지, 위벨 경 앞에서는 솔직해질 수밖에 없구려.”
얼굴도, 목소리도 웃고 있지만 둘 사이의 공기는 미적지근하게 식었다.“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알게 되더군요.”막시밀리언은 본래 상가의 자제다. 그의 부친과 모친이 이미 오래 전부터 위글로우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고, 가업을 이은 그의 친형 역시 ‘재건전쟁(베이고르에서 부르는)’ 당시의 혼란을 피해 위글로우로 들러온 상태.
그리고 미트라스는 언젠가부터 제이린 가문에 눈도장을 찍고 있었다. 항상 선물을 안고 제이린 가문을 찾았고, 특히 막시밀리언의 친형이자 제이린 가문의 당대 가주인 하이델과 친분을 쌓았다.
“제이린 가주께서 슬하에 아들을 둘 두신 것으로 압니다. 장남이 열 셋. 차남이 열 하나였던가요.”
“잘 알고 계시는구려.”
“경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영주님께서 그리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물론 짐작하고 있소.”
자식 없는 권세가에서 양자를 들이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핏줄을 따라 형제의 자식을 들이기도 하고,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방계의 방계까지 내려가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그런 면에서 막시밀리언이 형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문제는, 막시밀리언이 그의 형과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그의 부친을 비롯한 제이린 가문과.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저는 회의적입니다. 영주님께서 원치 않으시고, 허락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간단하고, 명분상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분명하오.”
위벨은 내심 혀를 찼다. 그는 미트라스가 하이델과 제이린 가문에 생각보다 더 깊게 선을 댔음을 짐작했다.
‘생각보다 야심가였던가?’
미트라스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안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글로우의 유지 가문 출신이었고, 위글로우가 제국의 영토였던 시절에도 제국군 천인장으로서 3대 가문에 눌려 지내긴 했지만 나름대로 위세를 부리고 다녔다. 때문에 미트라스라는 인물은 위글로우에 관료로 있는 이상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유명인사라 할 수 있었다.
‘적당히 자리 욕심 있고, 적당히 몸을 낮출 줄도 아는 평범한 인사라 생각했었건만.’
자리가 사람을 변하게 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누구나 눈치를 보는 높은 자리에 오르니 속에 품은 욕심이라는 놈이 더 덩치를 키웠을 수도 있다.
“곧 영주님의 생신이 다가오지 않소?”
대략 한 달 뒤다. 막시밀리언의 마흔 두 번째 생일이다. 그를 기념하기 위한 성대한 연회가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그날, 우리가 같이 영주님께 한 번 아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오.”
단호하게, 혹은 어물쩍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감을 접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미트라스의 제안은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어쨌건 영주가 후처를 들이는 것도 곤란하고, 이대로 언제 생길지 모르는 후계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나중에야 어찌 될지 몰라도, 당장 후계가 있고 없고는 차이가 크다. 뿌리가 얕게 박힌 나무는 세찬 바람 한 번에 넘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트라스의 제안이 옳다고 해서 덥석 물기에는 꺼려지는 부분이 있다. 위벨은 영지의 미래를 위해 옳은 판단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영주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군터 경께는 이야기를 꺼내보셨습니까?”
“…아직이오.”
미트라스가 영주의 측근이고, 위벨이 영주의 복심이라면 군터는 영주의 검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소.”
검은 사고하지 않는다. 그저 휘두르는 대로 움직일 뿐. 미트라스는 아무리 좋은 자리를 마련해놓고 이야기를 꺼낸다 해도 군터가 흥미를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마 딱 잘라 관심 없다고 하고 일어나지 않을까?
‘멍청한 건지 우직한 건지.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작자란 말이지.’
얕볼 수 없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코누다이안의 무력 그 자체인 사내다. 힌자예프와의 일전에서 그가 쌓은 전공은 아직까지도 호사가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보자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인물이다.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다른 분이지요.”
“일단 한 번 이야기는 해볼 생각이지만, 큰 기대는 않고 있소. 그보다…경께서는 어떻게, 이 사람과 뜻을 모아주시겠소?”
“…….”
미트라스는 이 자리에서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은근한 어조로 재촉했다. 위벨은 얼마 남지 않은 차를 느릿하게 들이키며 생각에 잠겼다.
*
군터는 보리스와 함께 느긋이 장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위글로우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온 그는 곧장 그를 찾아온 미트라스와 마주해야 했다.
의외였다. 그와 미트라스는 서먹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 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데면데면한 사이랄까? 그런데 대뜸,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오니 군터는 그가 무언가 중한 용건이 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관심 없네.”
미트라스는 영주의 후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심각한 이야기라는 듯 표정까지 굳히고 설득하려 들었지만 군터는 늘어지려는 그의 말을 일언지하에 잘랐다. 그리고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짐작은 했지만, 정말로 단호하시구려.”
군터가 이리 나오자 미트라스도 더 설득하기를 포기한 듯 허탈하게 웃었다.
“이것이 얼마나 중한 사안인지 알고는 있는 거요?”
“중요한 일임은 안다. 하지만 그것은 영주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라고 생각하네.”
“때때로 군주가 망설임을 가질 때, 등을 밀어주는 것도 신하의 역할이오.”
“그럴지도. 하지만 내 역할은 아니야.”
“답답하군. 어찌 되었든 경의 뜻을 알았으니 내 더 이상은 말하지 않으리다.”
그렇게 미트라스의 방문이 있고 이틀 뒤. 이번에는 코르넬이 부리는 자가 은밀히 찾아와 막시밀리언의 부름을 전했다.
‘정신없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군터는 영주관저로 향했다. 그가 찾아갔을 때, 막시밀리언은 이미 술자리를 차려놓고 자작을 하고 있었다.
“왔는가.”
“예. 어인 부름이신지.”
“별 일 아닐세. 그저 마음이 조금 싱숭생숭해서 말이야. 한 잔 하고 싶어서 불렀네. 내 마음을 터놓고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상대가 얼마나 되겠는가. 마침 자네와 따로 자리를 가진지도 오래 된 것 같아 불러보았네.”
너털웃음을 흘리는 막시밀리언과 마주 앉아 몇 잔의 술을 연거푸 마셨다. 그의 말처럼, 막시밀리언은 그저 술을 마시고 싶었던 것인지 평소보다 풀어진 모습으로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푸념처럼 늘어놓았다.
“어느덧 내 나이가 40이 넘었다네. 믿어지는가? 자네와 처음 만났을 때……. 그래. 그 때의 내 나이가 딱 지금 자네와 같았지. 기억하는가?”
“예.”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작 1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야. 길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네.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어. 그렇지 않은가? 잘난 것 하나 없는 일개 백부장이 귀족이 되고, 영지를 가진 영주가 되지 않았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 그리 생각했어. 헌데 요 며칠 동안 드는 생각은…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하는 것이야. 오늘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는데, 언제 이렇게 얼굴에 주름이 찼나 싶더구만. 흰 머리는 또 언제 이리 늘었는지 모르겠어. 하하.”
“…….”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군터는 가만히 빈 잔을 채워주고,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자리를 지켰다. 이 자리는 들어주기 위한 자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러 이야기가 지나갔다. 적당히 침묵하고, 맞장구를 치며 술잔만 비워가던 와중에 막시밀리언이 툭 하고 한 마디를 던졌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예?”
“자네도 미트라스와 같은 생각인가?”
“…….”
모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막시밀리언은 일찍부터 위글로우 전체에 그의 눈과 귀를 심어두었었으니까.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 그물이 더 촘촘해졌으면 촘촘해졌지, 느슨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막시밀리언이 미트라스의 동향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은 당연했다.
“관심 없습니다.”
“음?”
“제가 마음을 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하핫!”
무엇이 그리 재미있었는지 막시밀리언은 그야말로 박장대소했다.
“그래. 자네답군. 자네다워. 내가 이래서 자네에게만은 마음을 터놓을 수가 있는 것이야. 자네는 정말이지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야. 물론 그때보다 더 험상궂어지기는 했지만, 그 속만큼은 그때의 그 천덕꾸러기 십장 그대로라는 말이지.”
막시밀리언은 대취할 때까지 자리를 끝내지 않았다. 자리가 파할 즈음에 이르러서 그는 뭔지 모를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흘러내린 몇 가닥 흰 머리카락을 보며 군터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 작품 후기 ==========
수정으로 인해 벨리사의 캐릭터가 다소 달라지기는 했습니다만, 굳이 다시 읽으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