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235화 (235/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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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에 있는 200개가 넘는 건물들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건물. 성인 키 정도 되는 돌담까지 쳐진 건물은 장주인 군터의 저택이었다. 1년의 대부분을 위글로우에 머물고, 머물게 될 텐데 굳이 장원에까지 이런 거창한 저택을 둬야 하는가에 대해 군터 스스로도 의문이었지만 수하들은 그래도 필요하다 입을 모아 말했다. 설령 1년 내내 고용인들만 머물게 될지라도, 장주의 저택이 큼지막하게 들어서 있는 것만으로써 장원의 주민들은 그들이 섬기는 주인이 누구인지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 주요 논지였다.

“장주님을 뵙습니다.”

저택 입구에 하인들과 병사들, 그리고 장원의 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또 다른 집사 힐든이 군터 일행을 맞이했다. 힐든은 본래 위글로우의 저택에서 부리던 하인이었는데, 모페이브가 추천하여 장원의 저택에 머물며 업무를 보게 했다. 이제껏 장원에서 그가 한 일처리를 보면, 총기가 있다는 모페이브의 말은 현재까지는 틀리지 않은 듯했다.

“이번에 밀을 수확 하면서 세를 거뒀습니다. 총 서른 두 포대입니다. 수레에 실어 곧 위글로우로 보낼 예정이었으나, 장주님께서 돌아가실 때 가져가시겠다면 따로 준비해놓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그의 장원에서 거둘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밀 정도다. 간간이 산에서 채집한 과일 같은 것도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 양이 너무 적어 신경 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나마 밀은 위글로우로 가져가 상인들에게 팔면 그럭저럭 돈이 되지만, 그마저도 대단한 것은 아니다. 만약 갖다 파는 밀이 크게 돈이 될 만한 것이었으면 굳이 위글로우까지 실어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돈 냄새를 맡은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장원에 찾아왔을 테니.

“오면서 봤다. 마장이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춰가는 것 같더군.”군터가 운을 떼자 힐든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예. 울타리를 만드는 작업은 거의 다 끝났습니다. 장원 사람들 중 지원자를 받아 교육도 하고 있으니, 조만간 본격적으로 운영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군터는 처음 마장에 대해 말을 꺼냈을 때 100마리 정도는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이야기 했다.

그런데 계획대로 100마리 이상의 말을 키우려 하자니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많았다.

초지야 충분하고, 말이야 돈을 써서 들여오면 된다지만 말들을 돌볼 인력이 부족했다. 아무리 그의 수하 병사들 중 아쿼러즈들이 있다지만, 그들을 대놓고 사병처럼 부릴 수는 없다. 실상이야 그의 사병 이상일지라도, 어쨌거나 공식적으로 군적에 이름을 올린 관병이 아닌가. 그런 그들을 단순히 상관이라 하여 사적으로 부린다면 좋은 소리를 듣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군터는 병사들에게 언제까지고 말을 돌보게 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군인이 들어야 할 것은 여물통이 아니라 창칼이니까 말이다.

“순조롭군. 조만간 스무 필이 더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백은 넘기게 되겠군.”

군터가 흡족함을 드러내며 보고서를 읽어내려 갈 때, 힐든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장주님. 소인, 장주님께 건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건의? 말해보아라.”

“마장을 세우고 목축을 시작하는 김에, 말들이 아닌 다른 가축들도 길러보는 것이 어떨지요.”

“다른 가축?”

“장주님께서 마장의 말을 어찌 쓰실 계획이신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마장의 규모를 키우고 인력이 그곳에 투입되게 된다면 장원의 세수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사람 몇 쓰는 것뿐이다. 너무 유난을 떠는 것이 아닌가?”

“음…장주님. 사실 현재 장원의 재정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수입을 소규모의 농사에 의존하다보니 크게 수익이 뛸 확률이 없고, 반면 날이라도 안 좋아 수확이 줄게 되면 세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주민들이 먹고 살기도 퍽퍽해질 것입니다. 장원에는 지금과는 다른 수입원이 필요합니다.”

“…….”

힐든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이런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확실히 힐든의 말은 타당한 구석이 있었다. 분명 그러한 내용들이 지금까지 읽은 보고서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런 장원의 문제점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 무신경함에서 비롯된 안이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문제가 없으니, 앞으로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것은 비단 그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평범한 이들이 똑같이 범하는 실수이리라.

“병사들의 가족이 이주해오면서 갑작스럽게 가호와 인구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에 맞춰 농지를 개간한다 해도, 결국은 같습니다. 이렇다 할 특산물 하나 없는 이 장원은 미래를 바라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축이라도 키워보자는 건가. 뭘 키울 생각이지? 양? 소?”

“양을 키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장원 주변에는 양을 키울 수 있을 만한 고원이 없습니다. 하여 소를 키워볼까 합니다. 다행히 장원 주변에는 맹수들도 좀처럼 보이지 않고, 목초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소를 키우기에는 안성맞춤입니다. 장주님께서 허락해주시기만 한다면 한 번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아니, 좋은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의를 하는 힐든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운 것은, 소라는 놈의 몸값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군터가 상냥한 윗사람도 아닐뿐더러, 설혹 그렇다 해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돈 좀 쓰십시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좋다. 해봐라.”

적지 않은 부담이다. 그간 받은 녹봉과, 전공을 세우고 받은 포상을 거의 건드리지 않은 군터로서도 다소 주머니가 허전해질 정도다.

하지만 당장에 어느 정도 부담이 되더라도, 감수해야만 한다. 길게 봐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재물에 신경 쓰고 싶지는 않지만, 수하들을 거느리려면 좋든 싫든 재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당장 미트라스나 다른 무관들만 해도 각자 돈 나올 구석을 몇 개씩은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 돈으로 인심을 베풀어 수하들의 충성을 산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를 저속하다 욕할 수는 없다. 결국, 베이고르 왕 밑에 수많은 영주들이 제후로서 각자의 힘을 가지듯 제후인 막시밀리언의 수하들 역시 각자의 힘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하고,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군터 역시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떨어지는 것에 상관없이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수하들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수다. 누군가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따르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사람이란 결국 이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

군터는 목장의 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신경 써서 구입한 말들답게 하나 같이 질이 좋았다. 대부분의 말들이 당장 군마로 써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괜찮군.”

“하루에 두 번씩 목장 밖으로 바람도 쐬게 해주고 있습니다.”

말을 하는 병사의 얼굴이 밝다. 말들을 돌보는 일이 적성에 맞는 것인지, 말들을 보는 눈이 따듯하기 그지없다.

히히힝!

“저, 저런!”

자식들을 바라보듯 인자한 표정을 하고 있던 병사가 거센 울음소리에 기겁했다. 건장한 말들에 비해서도 월등히 큰 체구를 지닌 흑색 거마가 콧김을 뿜으며 말들 사이로 뛰어들고 있었다.

“아주 제 세상인 듯 구는구나.”

내쉬는 암말들에게 다가가 씩씩거렸다.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다른 수컷들은 기가 질렸는지 멀찍하게 도망가 눈치만 살폈다. 군터는 그 꼴을 웃으며 지켜보았다.

“괜찮겠습니까?”

“괜찮다. 이틀 정도는 마음대로 굴게 놔둬라.”

사나운 주인을 태우고 험한 전장에서 달려온 녀석이다. 며칠 정도 호사를 누리게 해주는 게 무에 그리 큰 문제겠는가. 게다가 내쉬 정도의 특등마(特等馬)라면 씨수말로서 최고라 할 수 있다.

‘얼마나 더 달릴 수 있겠는가.’

내쉬의 나이는 그리 많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젊은 축에 속한다. 군마로서 보낸 세월도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더없이 험한 전장에서 여러 번 몸이 상했다. 다행히 지금은 강건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사람의 몸이 그러하듯, 말 역시 언제 한 순간에 쇠약해질지 짐작할 수 없다.

“이제껏 수고 많았다. 앞으로도 부탁하마.”

“옛.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장을 관리하는 수하들을 격려하고, 군터는 보리스와 함께 수하 몇 명만을 거느리고 장원 밖으로 나섰다. 장원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아버지. 엄청 넓어요.”

마을 외곽을 따라 한 번 빙 돌았을 때, 보리스는 탄성을 내질렀다. 어린 아이의 눈에 한참을 가도 계속해서 보이는 땅은 넓어 보이기도 할 터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성벽 밖의 세상은 처음이 아닌가.’

보자기에 싸여 있던 시절을 제외하고, 보리스는 위글로우 밖으로 나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군터는 보리스가 조금이라도 더 일찍,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보기를 바랐다. 초원 사람들의 입을 타고 흐르는 오래된 말 중에 ‘지혜는 보는 것만큼 쌓인다’는 말이 있다. 군터는 그 말이 정말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들이 지혜롭기를 바랐다. 그건 자식이 자신보다 낫기를 바라는 전형적인 아비의 마음이었다.

“음?”

앞서 나가는 보리스를 따라 느긋하게 말을 몰던 군터가 일순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그리고는 안장에 걸어둔 활을 집어 들었다. 그를 본 병사들이 어리둥절했으나, 그들이 무슨 일인지 살피기도 전에 화살이 시위에 걸렸다.

“아앗!”

마냥 즐거운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보리스는 문득 그림자가 머리 위를 뒤덮은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거대한 한 쌍의 날개가 활짝 펴져 하늘을 가렸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두 개의 시선이 똑바로 떨어져 내렸다. 그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보리스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오직 그를 태운 말만이 기겁을 하며 앞발을 치켜들 뿐이었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고삐를 놓치지 않은 것이 보리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퍼억!

날카로운 발톱이 보리스의 머리에 닿으려던 찰나. 둔탁한 소리가 터졌다.

보리스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하늘을 가렸던 형체는 사라져 있었다. 두려운 와중에도 어리둥절하여 눈을 크게 뜨니 화살 한 대가 몸에 박힌 맹금이 땅에 떨어져 바들대는 것이 보였다.

“날개수리라고 하는 놈이다.”

“아, 아버지…….”

“일반적인 독수리보다 큰 날개를 지니고 있고, 더 사납지. 어지간한 사람 하나 정도는 통째로 들고 날아오를 수 있는 놈이다. 흔한 놈은 아닌데,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맹금류 중에서도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위치한 녀석이다. 좀처럼 보기 힘든 놈이라 군터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고,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심해라. 마음 놓고 살아도 되는 세상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짐승이건, 사람이건, 다른 무언가건…위험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널려 있다.”

그저 그가 하고픈 말을 했을 뿐이다. 7살짜리 아이가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줌을 지리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은 것만 해도 칭찬해 마땅한 일이다.

“이만 돌아갈까. 아니면 좀 더 둘러보고 싶으냐?”

“…조금 더 둘러봐요.”

눈에서 두려움이 다 가시지 않았다. 그렇지만 목소리는 침착하다. 군터는 소리없이 웃으며 아들과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 작품 후기 ==========

수정분이 전 회차에 적용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편수가 조정이 되었습니다.

수정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벨리사의 과거 및 그와 관계 된 에피소드 일부

2. 성애 묘사

독자분들께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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