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나라에 단 둘 뿐이던 공작 중 하나가 철저하게 몰락했다. 그의 일가는 물론, 따르던 일파까지 대부분 쓸려나갔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신생 베이고르 왕국은 제법 평온했다. 숙청 작업이 워낙 은밀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진 터라 백성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는 경우가 드문 탓이었다. 자신들에게 피해만 오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높으신 분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치 않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백성의 본질이 아니겠는가.”막시밀리언이 말했다. 그에 위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라고는 할 수 있겠지요.”
왕과 귀족들이 아샤즈 테오모렌과 그 일파를 쳐내듯, 막시밀리언은 제임스 크루거를 제거했다. 철저한 준비 끝에 시작한 일은 끝마무리까지 깔끔했다. 크루기스의 수도를 신속하게 포위하고 영주 일가와 측근들까지 모두 제거한 덕에 별다른 저항 없이 영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영주라고는 하지만,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영지민들이 영주에 대한 충성심을 기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지요.”
“옳은 말이다.”
한 번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선 베이고르는 신생 국가다. 희미하게 이어진 왕가와 그들을 따른 귀족들은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세상이 보는 베이고르는 새롭게 선 나라다. 백성들은 아직 베이고르보다는 제국에 익숙하다. 심지어는 영지가 뭔지, 영주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도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겠지.”
물론 영주인 그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는다. 마을들을 돌면서 영주의 이름을 알리고, 세금을 거두는 등의 일은 관리들과 병사들이 다 한다.
백성들은 단순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적당한 수준의 통제다. 통제를 받으며 그들은 스스로 높고 강한 존재에게 관리 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통해 안정을 얻는 것이다.
“브록스에서의 공작은 어찌 하오리까.”
“그건 관두는 편이 좋겠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예민해 있을 텐데, 자칫하면 꼬리가 밟힐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크루기스에 비해 반드레온이 취한 볼드는 다소 시끄러운 상태였다. 듣자하니 케일리스 볼드를 따르던 일부 무리가 수도를 탈출하여 저항군을 조직했다던가.
“그런 실수를 할 자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 내가 그 자를 너무 과대평가했는가.”
막시밀리언이 중얼거리자 위벨이 즉각 반론했다.
“모렌스 남작은 범상치 않은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행한 일이 틀어졌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요.”
“저항세력 중에 인물이 있다는 뜻인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충심 또한 대단한 자가 아닌가. 초장에 영주의 목이 달아났는데도 구태여 가시밭길을 걸으니. 케일리스 볼드가 그래도 인복은 있었나 보군.”
기습을 가한 정복자의 입장이기는 해도, 반드레온은 기존 볼드의 인사들 중에서 영주의 친족이 아닌 이상에야 다 받아들이려 했을 것이다. 순순히 투항했다면 큰 대접은 못 받더라도 어느 정도는 자리보전을 꾀할 수도 있었을 터. 그런데 볼드의 저항세력은 굳이 승산도 없는 싸움에 몸을 던졌다. 사리분별조차 제대로 못할 만큼 어리석거나, 목이 달아난 영주에 대한 충심이 어지간히 깊지 않고서야 하지 않을 일이다.
“이쪽도 혹 모르는 일이니, 꾸준히 순찰대를 돌리도록.”
“예.”
군병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되면 백성들이 기뻐하지는 않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 통제는 존경과 친근함으로도 이룰 수 있지만, 두려움으로도 가능하다. 어떤 면에서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효과적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아깝군요.”
미트라스가 푸념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자에게 힘들여 얻은 땅을 나눠줘야 한다는 게 말입니다.”
두 영지가 주인을 잃으면서 베이고르 동부에는 세 명의 영주만이 남았다. 막시밀리언과 반드레온. 그리고 센트리올의 영주 아르테가 센트리온 남작이 그 세 명이다. 이번 숙청작업을 진행하며 직접 군사를 일으킨 막시밀리언과 반드레온에 비해, 센트리온 남작은 그저 숨만 쉬면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언과 반드레온은 그들이 거둔 과실 일부를 그와 나눠야만 한다.
“내키지 않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왕도에 계시는 국왕께서는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거든.”
아샤즈 테오모렌이 무너지면서 이제 베이고르에는 세 개의 기둥만이 남았다. 하나는 유그 칸디시아렌을 따르는 귀족파. 또 하나는 파비우스 리에론을 우두머리로 한 귀의 귀족파.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왕 주앙 칼 고르를 따르는 왕당파.
하지만 세 기둥이라고 해도 세력의 차이는 있다. 귀족파와 귀의 귀족파가 비등한 덩치를 가진 두 개의 큰 기둥이라면, 왕당파는 기껏해야 무릎 언저리에나 닿을까 싶은 작은 돌 정도에 불과하다.
얼핏 보면 의아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한 나라의 지존인 국왕의 세력이 어찌 이리 작은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베이고르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베이고르는 한 번 망했던 나라다. 그것도 그냥 망한 게 아니라 철저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비참한 몰락을 겪고도 베이고르가 다시 설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귀족들의 힘 덕분이었다. 일개 방계 왕족에 불과했던 주앙 칼 고르가 베이고르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 또한 귀족들의 힘 덕분이었다. 그들이 지닌 힘은 차치하고서라도, 지금의 베이고르 왕은 귀족들에게 큰 빚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이 어찌 처음 모습, 성격대로 영원하겠는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도망자 신세였을 때에야 그를 왕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귀족들이 그저 고마웠을지 몰라도, 왕이 된 다음에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그들만의 권력을 행사하려는 귀족들은 이제 왕의 잠재적인 정적일 뿐이다.
피를 나눈 형제 자식 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 권력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일국의 지존인 왕이 절대 권력을 꿈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왕이 원한다고 해서 귀족들이 자신들의 힘을 순순히 내놓을 리는 없다. 그들이 주앙 칼 고르에게 원했던 것은 그저 왕으로서 존재해주는 것. 그럼으로 인해 베이고르라는 나라를 유지해주는 것까지다.
‘아무리 고상한 말로 포장한들, 결국은 밥그릇싸움이 아닌가.’
군터는 얼굴도 모르는 왕과 귀족들을 비웃었다. 들리는 이야기들을 가만 보고 있으면 왕도에 있는 왕과 귀족들에게 있어 군신간의 충성이나 신뢰 같은 것은 질 나쁜 농담거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싶었다. 당장 국외에 불안요소가 산적해 있기에 드러내지 못할 뿐, 타칸 연합국이나 제국이 없었다면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정쟁을 벌였을 것이다.
“코누다이안과 브록스가 있다. 센트리올 혼자서는 버겁지만 남쪽의 강 너머에는 카드마임이 있지.”
카드마임은 귀족파에 속하는 카드마 백작의 영지다. 백작령답게 영지의 규모도 크고 밀이 대량으로 자라는 곡창지대도 보유하고 있다. 제법 거리가 있다지만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웃이다.
“중앙의 판세와는 무관하게 이웃들과는 친선을 도모하면서 내치에 집중하고 암상들의 관리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바로 그렇다. 어차피 주앙에서도 당분간은 자리 나누기에 여념이 없겠지만, 그게 다 끝나고 다시 으르렁댄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면 된다. 아샤즈 테오모렌만 목 빼고 바라보던 제임스 크루거가 어찌 되었는지 잘 알지 않는가.”
파비우스 리에론이 들었다면 꽤나 섭섭해 할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내어놓으니 막시밀리언을 바라보는 수하들의 눈길이 굳건하다.
“결국 칼도 쓰임새 있는 칼이 버림 받지 않는 법이다. 내 말뜻, 모두가 알아들었으리라 믿네.”
스스로를 칼에 비유하는 막시밀리언은 파비우스 리에론의 그늘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없음을 알렸다. 하지만 군터는 알 수 있었다.
막시밀리언은 제임스 크루거와는 다르다. 제국에서 베이고르로 옮겨왔듯, 그는 여차하면 얼마든지 말을 바꿔 탈 수 있다. 그 말은 왕이 될 수도 있고, 칸디시아렌 공작이 될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군터는 장원의 관리에 신경을 기울였다. 어차피 그에게 주어진 일은 기껏해야 순찰대 파견 정도였고, 그 정도 일은 살라스에게 위임해도 무방했다. 시간이 남은 김에 그는 보리스를 데리고 그의 장원으로 향했다.
“너무 무리시키는 거 아니에요?”
벨리사가 우려를 표했지만 군터는 고개를 저었다.
“초원에서는 이 정도 나이 때부터 말을 타고 반나절을 움직여.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천천히 움직일 테니 괜찮아. 슬슬 보리스도 말 타는 법을 배울 때가 됐어.”
이제 갓 7살이 된 보리스는 아비를 닮았는지 9살, 10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군터는 그런 아들을 위해 순한 말 한 마리를 선물했다. 군용으로는 적절치 않아도 가볍게 타고 다니기에는 딱 좋은 작은 크기의 갈색 말이었다.
“이게 제 말인가요?”
생에 첫 번째로 가진 말 앞에서 보리스는 은근히 실망감을 드러냈다. 아비가 타고 있는 흑색 거마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자신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어느 것에건 과한 욕심은 부리지 마라. 욕심은 무리를, 무리는 화를 부르는 법이다.”
“…예.”
완전히 납득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곧 뼈저린 교훈을 얻게 될 테니까.
“으으으! 아버지. 조금만 쉬었다 가면…….”
“출발한지 얼마나 됐다고 우는 소리냐. 이러다가는 열흘이 지나도 도착하지 못한다. 우는 소리 하지 말고 참아라.”
보리스가 애원하는 데는 딱 하루면 충분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인내하던 7살 소년은 나중에 가서는 쓰리고 저린 허벅지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아비에게 휴식을 애걸했다.
“어쩔 수 없지. 잠시 쉬다 가겠다!”
보리스는 오십에 달하는 인원이 자신 때문에 발이 묶인 것을 알았다. 곱게 자랐지만 버릇없게 자라지는 않은 탓에, 보리스는 욱신거리는 다리를 떨면서도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괜찮다. 처음에는 다 그런 법이다.”
“…아버지도 이러셨나요?”
“물론이다. 아비라고 어찌 처음이 없었겠느냐.”
대답이 위로가 되었던 것일까. 자그마한 얼굴에 가득하던 수치심이 조금 가라앉았다.
위글로우를 나선지 사흘째가 되어서야 군터 일행은 장원에 도착했다. 보리스가 없었다면 그 반이면 충분할 거리였지만 지루할 정도로 늘어지는 이동에 대해 당연하지만 감히 그 누구도, 가벼운 한숨으로라도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와아!”
장원을 처음 보자마자 보리스는 힘든 것도 잊고 탄성을 토했다.
“여기가 전부 아버지의 땅인가요?”
“그래.”
아들에게 존경스런 시선을 받는 것은 아비로서 꽤나 뿌듯한 일이었다. 군터는 예전에 봤을 때와는 달리, 제법 그럴듯하게 변한 장원을 보며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기존의 주민들에 더해 휘하 군졸들의 가족들까지 이주를 마쳤기에 가호가 전의 배 정도로 늘어났다. 마장(馬場)을 갖고 싶다는 그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목장의 울타리를 만들고 종마도 몇 마리 들여왔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본격적으로 마장의 운영이 가능해질 것이다.
“장주님.”
장원에 가까이 가니 그를 본 주민들이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상주시켜놓은 휘하 병사들은 절도 있게 군례를 올렸다. 군터의 옆에서 덩달아 인사를 받은 보리스는 어색해하면서도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 작품 후기 ==========
늦은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