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233화 (233/1,064)

<-- 2부 -->

군터는 막시밀리언이 보내 온 서신을 읽었다. 대승을 알리는 승전보였다. 동시에 향후 그가 취할 움직임에 대한 것도 일부 적혀 있었다.

“대승이다. 영주께서는 당초 계획대로 움직인다 하시는군.”

“다행이군요.”

‘계획대로’라는 말처럼 안심이 되는 말은 없다. 특히나 불안한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일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왕도에서는 피의 숙청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합니다. 아샤즈 테오모렌의 목이 날아가고, 그 심복들이 대부분 쓸려나갔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쓸려나갔을 뿐. 모두 정리가 된 것은 아니지.”

“금방입니다. 시간문제일 뿐이지요.”

위벨은 단언했다. 그는 이미 이번 숙청을 끝난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아직까지는 조용하지만, 당장 며칠 뒤부터는 왕국 전역이 제법 시끄러워질 겁니다. 어떻게든 살려고 버둥대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런 자들을 먹어치우려고 이빨을 들이미는 자들도 있겠지요.”

“우리나…모렌스 남작처럼 말인가.”

“예.”

바로 어제. 반드레온은 볼드 남작의 목을 쳤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볼드 영지로 쳐들어갔다. 막시밀리언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 크루기스 자작은 살아있지만, 그의 붙어 있는 목이 떨어지는 것이야말로 시간문제일 뿐이다.

“‘입’들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고. 신경 쓸 것은 전혀 없군.”

반드레온과 막시밀리언 두 영주 모두 타 영지에 침입해 들어가는 것은 같다. 하지만 세간에 퍼지는 이야기는 둘 중 한쪽에만 쏠리게 될 것이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이런 것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이미 경께서도 수차례 그 위력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작은 도시 안에서 시민들이 숙덕거리는 것과는 규모가 다르지 않은가.”

“다르지 않습니다. 왕도에 있든, 위글로우에 있든 결국 다 같은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여전히 난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영주님이나 자네가 그렇다니 그런 것이겠지.”

군터는 위벨과 말꼬리 붙들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군터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목소리를 내든, 결국 그 끝은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몸이 근질거리십니까?”

“아니라고는 못하겠군.”

“그렇더라도 참으십시오. 경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영지를 지키는 것은 밖에 나가 싸우는 것보다 더 중한 일입니다.”

“애 다루듯 할 필요 없네. 솔직한 마음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지, 지금 내 하는 일이 못마땅하다는 것은 아니니.”

“이런. 제가 경께 실례를 범했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무튼…센트리올은 이대로 얌전히 있을 것이라 보는가?”

“예. 그 쪽은 문제없을 겁니다.”

왕도에서 이루어진 최고 권력자들의 회의 결과로, 동부는 파비우스 리에론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물론 단일 영지로 합병이 되는 것은 아니고, 왕당파 귀족인 센트리올 남작이 자리를 지키겠지만 본래 다섯이었던 영지가 세 개로 줄어드는데다 그 셋 중 두 개 영지의 영주가 파비우스 리에론의 수하이니 동부는 거의 온전히 파비우스 리에론의 영향력 하에 놓인다고 봐야 했다.

“한 달 안에 모든 게 다 끝나겠군.”

“같은 생각입니다. 길게 봐도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정리가 되겠지요.”

군터와 위벨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그날 이후. 모든 일들이 급박하게 흘러갔다.

막시밀리언은 2천 병력을 이끌고 크루기스의 영주성을 포위했다. 제임스 크루거 자작이 미처 몸을 빼기도 전에 이루어진 쾌속한 진군이었다. 무단으로 영지를 침범하고, 그것도 모자라 영주의 목을 노린 간악한 크루기스 영주에 대한 대대적인 성토가 있고서 채 나흘이 지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

“이놈! 막시밀리언! 이런 짓을 벌이고도 네놈이 무사할 줄 아느냐! 온 왕국이 네놈의 흉행을 알고 있느니라!”

성벽 위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는 제임스 크루거. 그의 끓는 것 같은 목소리에 막시밀리언은 비웃음으로 대응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 말은 그대가 아니라 내 입에서 나와야 마땅한 말이 아니던가! 대관절 처음에 병력을 보내 내 목을 노린 자가 누구인가! 국왕 전하로부터 작위와 영지를 수여받은 내게 아무런 명분도 없이 창칼을 겨눴다는 것은 나를 임명하신 국왕 전하께 창칼을 겨눈 것과 다르지 않다! 역적 제임스 크루거! 그대는 마땅히 자리에서 내려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국왕 전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할 것이거늘 성문을 닫아걸고 사특한 궤변으로 나를 겁박하려 드는가! 그대는 그대가 역적임을 행동으로써 증명하는 것인가?!”

아무 의미 없는 짧은 언쟁이 벌어졌다. 제임스 크루거는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막시밀리언은 그와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득도 없는 일을 그가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도시 안에 있는 베이고르의 군민들은 들어라! 지금 그대들이 섬기고 지키는 저 자는 이제 더 이상 크루기스의 영주도, 자작도 아니다! 한낱 역적에 불과하다! 저 자를 위해 싸우는 것은 아무런 대의도 명분도 없는, 그저 역적질일 뿐이다! 누가 역적을 위해 싸우겠는가! 누가 역적을 위해 죽겠는가! 나, 코누다이안의 영주 막시밀리언 코누디스 남작이 말하노니 지금 그대들이 저 자의 목을 베고 성문을 연다면 그대들은 베이고르의 군민으로서 살아갈 것이요,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저 역적과 함께 한다면 도시 안의 그대들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역적으로서 죽을 것이다!”

“들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다! 군졸들은 동요하지 마라!”

“하루를 주겠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성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내 약속하건대 도시 안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죽여 없애고 말겠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제임스 크루거를 뒤로 하고 막시밀리언은 말머리를 돌렸다.

“나야말로 국왕 전하께 인장을 하사받은 크루기스의 영주다! 나는…….”

“아! 그렇지!”

얼마 안 가 막시밀리언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반대로 돌았다.

“제임스 크루거! 아니, 이제는 크루거라는 성도 쓰지 못하겠군! 역적 제임스! 네놈이 믿고 따르던 아샤즈 테오모렌의 목이 왕도에 효수되었음을 알고 있는가?! 역당의 수괴와 그 일파들이 모두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으니, 네놈 역시 동지들과 같은 길을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네놈의 운명은 정해졌으니, 더 이상 추하게 발버둥치지 말고 스스로 내려오는 것이 어떠한가! 네놈에게 지킬 명예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말이다! 하하하하핫!”

입을 쩍 벌리고 말을 잇지 못하는 제임스 크루거. 망연자실한 그의 귀로 점점 작아지는 웃음소리만이 사형선고처럼 절망스럽게 다가왔다.

그로부터 반나절이 흐르기도 전에 닫혔던 성문이 열렸다. 그리고 피에 젖은 갑옷을 걸친 일단의 무관들이 코누다이안의 군영 앞까지 걸어왔다.

“코누디스 남작 각하! 저희들은 역적이 아닙니다! 그 증거로 역적의 수급을 베어 바치니, 부디 저희의 결백을 믿어주십시오!”

그들이 내놓은 것은 제임스 크루거의 수급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를 따르던 측근들로 보이는 이들의 수급 역시 함께였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증명하니, 내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의 결백을 믿는다.”

막시밀리언은 껄껄 웃으며 투항자들을 받아들였다. 크루기스를 그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

막시밀리언이 제임스 크루거의 수급을 손에 넣을 즈음, 볼드의 영주성에서는 시뻘건 불길과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항하는 놈들은 모조리 참하라!”

브록스의 정병들이 눈에 불을 켠 채 거리를 휩쓸었다. 겁에 질린 시민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문을 닫아걸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운하게 그러지 못했던 이들은 도망치다가 잡히거나, 끝내 쫓기다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주공. 괜찮겠습니까?”

한 무관이 반드레온에게 물었다. 체구가 큰 반드레온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야말로 거한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미 일을 그르쳤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거늘.”

반드레온이 못마땅해 하며 혀를 찼다.

수하에게 한 말처럼, 지금의 이 상황은 절대로 그가 원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되도록 적은 피를 흘리며 볼드를 손에 넣고 싶었다. 실제로 케일리스 볼드를 끌어내어 참살했을 때만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계획대로 풀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주인 잃은 영지에는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끝내 놓쳐버리다니.”

“송구합니다. 쥐새끼 같은 놈이 대체 어느새 빠져나가버렸는지…….”

마지막까지 항전을 펼치던 놈이 있었다. 사기를 잃은 군졸들을 결집시키고, 파상공세를 퍼붓는 브록스군에 맞서 필사적으로 수성을 벌였다. 그 한 놈 때문에 일이 이렇게까지 뭉그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을 그르쳐버린 것은 안타깝지만,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어정쩡하게 멈출 수는 없다. 내게 저항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단단히 알려주어라.”

항전을 주도한 것은 빠져나간 ‘쥐새끼’와 그를 따르던 소수의 군졸들이다. 하지만 핵심이야 어쨌건, 이 도시가 그에게 저항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처음부터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방울이라도 피를 흘린 이상 반드레온은 이 도시를 자비롭게 끌어안을 생각은 없었다. 철저하게 짓밟아 본보기를 보이리라. 다시는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덕으로써 끌어안으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면 차라리 공포로 짓누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늘 하루는 약탈을 허용하겠다.”

“하오나 주공. 정말 괜찮겠습니까?”

점령대상에 대한 약탈은 참전한 군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포상이다. 정복자가 되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 아니겠는가.

“괜찮다. 단! 일반 백성들에 대한 약탈은 불허한다.”

“그 말씀은……?”

“새롭게 가꿔야 할 도시가 아닌가. 남이 기르던 돼지들을 내 울타리에 넣을 생각은 없다.”반드레온의 시선이 경사진 고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일반 민가와는 다른,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저택들이 멋들어지게 늘어서 있었다. 성벽으로 분류하지는 않았으나, 다리를 건너야 갈 수 있는 그곳은 타 도시에서 이르는 내성과 같은 곳이었다.

“이해했습니다. 소관, 즉시 주공의 명을 하달하겠습니다.”

흉측한 미소를 머금고, 거한이 말을 몰며 달려 나갔다.

잠시 후.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가 점차 그 크기를 키워갔다.

*

동부에 몰아친 일대 격변이 제법 소란이 되었지만, 그것은 왕도에서 일어난 혈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 곧이어 각지에서 벌어진 비슷한 일들로 인해 동부의 두 영지가 주인을 잃은 일은 동부 내에서만 떠들썩하고 마는 식으로 지나가는 듯했다.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자리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았으니까 말입니다.”

승전 이후 벌어진 회의는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의외로 브록스 쪽에서는 제법 낭패를 봤다더군요.”

“낭패라고 할 것도 없지요. 그냥 한 입에 날름 먹으려다가 그러지 못했을 뿐.”

“아닙니다. 듣기로 제법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다고 하더이다. 그 때문에 노한 모렌스 남작이 도시의 약탈까지 명했다던데.”

수하들이 자유로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던 막시밀리언이 그 즈음에서 끼어들었다.

“세상사가 어찌 생각한 대로만 풀리겠는가. 풀리는 일이 있으면 꼬이는 일도 있고, 다 뭐 그런 것이지. 이번에는 모렌스 남작이 그랬지만, 다음번에 그 경우가 우리가 되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야.”

“영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아무튼, 영지전에서 승리한 것으로 큰 산 하나를 넘었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야.”“혹 일어날지 모르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명하신 대로 크루기스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습니다.”

“좋아.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지만 너무 드러내놓고 행사를 해서는 안 돼. 어찌 되었건 칙사가 오기 전까지는 난 크루기스의 영주가 아니니까 말이네.”

“예.”

========== 작품 후기 ==========

많이 늦었습니다. 저는 허리 통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쇳덩이를 척추에 박아야 한다는 협박(?) 섞인 조언을 듣고, 힘겨운 교정운동에 매진하는 중입니다.

그런 와중에 이틀 전부터는 독감까지 걸려서 영 헤롱헤롱한 상태네요. 연재와 수정작업을 병행하느라 무리를 했었던 것인지, 긴장이 풀리니까 훅 오네요. 틈틈이 써놨던 것을 오늘에서야 부족하게나마 완성하여 올립니다.

조속하게 몸을 추스리고 연재도 정상화 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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