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제임스 크루거는 코누다이안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징후를 알아차린 뒤부터 뒤숭숭한 잠자리를 보내야 했다. 좀처럼 편히 잠에 들 수가 없어 술기운에 의지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호위 병력을 배로 늘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침상에 들 때도 반드시 가까운 거리에다 검 한 자루를 두었다. 평생에 몇 번 잡아본 적도 없는, 따라서 당연히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검을 말이다.
남들의 눈에는 비루한 겁쟁이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두근거리는 가슴이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려웠다. 코누다이안이, 막시밀리언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런 살벌한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이제껏 살아온 세상은 점잖은 분위기에서 말이 오가는 곳이었지 창칼과 죽음이 오가는 전장이 아니었다.
이성적으로는 막시밀리언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 시점에서 무력행사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은밀히 병력을 조련한단 말인가?
대놓고, 다 아는 양 대담하게 사람을 보내 저의가 무엇인지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벌어질 수 있는, 이후의 일이 두려웠다.
“오늘도 아무런 소식이 없느냐?”
“예. 아직…….”
왕도 베나시드(구 살마드)로 사람을 보낸 지도 벌써 시일이 꽤나 지났다. 물론 꽤나 지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초조한 그의 마음으로 인한 느낌일 뿐이다. 보낸 전령이 크루기스로 돌아오려면, 말이 거품을 물 정도로 길을 재촉한다 해도 아직 사흘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하리라.
‘참으로 길구나. 길어.’
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면목 없다는 듯 고개 숙이는 수하다. 제임스 크루거는 그런 수하를 물러가게 한 뒤 길게 탄식을 흘렸다.
‘이렇게 되면 반드레온과의 일 역시 틀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정녕 막시밀리언 그 놈이 흉심을 품고 있다면 그것이 어찌 그놈 혼자만의 생각일 수 있겠는가.’
막시밀리언도, 반드레온도 모두 파비우스 리에론의 수하나 다름없다. 그리고 막시밀리언은 영주라고는 해도 일개 남작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병사까지 동원하여 명분 없는 수작질을 벌이려 한다는 건…그 뒷감당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너무 나간 것이다. 파비우스 리에론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야. 전쟁이 이제 막 끝난 참에 무모한 짓을 벌일 리 없다.’
제임스 크루거가 따르는 아샤즈 테오모렌과 마찬가지로 파비우스 리에론 역시 제국에서 귀의한, 말하자면 굴러들어온 돌이다. 물론 공신으로 인정받아 작위에 영지까지 다 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베이고르의 주류로서 완전히 안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제국의 귀족이었고, 따지고 보면 제국을 배신하고 베이고르에 붙은 배신자였다. 그리고 한 번 배신자는 영원히 배신자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수 없는 법. 그들은 당분간만이라도 몸을 낮추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베이고르왕의 비위를 맞춰주어야 했다. 제임스 크루거는 그리 생각했다.
‘파비우스 리에론은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의 재가 없이 막시밀리언 놈이 독단적으로? 아니면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닌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그토록 은밀하게 병사들을 조련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가에게 속 시원히 터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라 그의 가슴은 나날이 타들어만 갔다. 왕도에서 소식이 돌아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지만, 정작 그가 기다리던 소식은 오지 않고 전혀 다른 곳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져왔다.
“주공. 볼드의 소영주가…죽었다고 합니다.”
“뭐라? 뜬금없이 대관절 대체 그게 무슨…….”
“그쪽에서는 어떻게든 쉬쉬하려는 모양입니다만, 이미 암살이라는 소문이 흘러나오는 중인 것 같습니다. 흉수가 브록스로 달아났고, 볼드 남작이 직접 추격대를 편성하여 흉수들을 쫓고 있다 합니다.”
“…….”
순간 제임스 크루거는 뒷머리가 서늘하게 당겨오는 것을 느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렇지만 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 불길함.
‘우연인가?’
소영주가 암살을 당했다. 호위병들만 열 명 이상 달고 다니는 소영주를 암살했다면 실력 좋은 살수가 여럿 투입되었을 것이고, 그만큼 본격적으로 손을 쓸 수 있는 이들은 꽤나 적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소영주를 암살함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는 자들을 추리면 후보군은 더욱 좁혀진다.
‘심상치 않다.’
볼드의 소영주가 죽은 것을 코누다이안의 움직임과 엮는 것은 억측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위기가 영 좋지 않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바로 얼마 전,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던 코누다이안에서의 연회가 모두 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영주님! 급보입니다!”
‘또 무슨 일이란 말이냐!’
제임스 크루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면서도 문 밖에 기다리는 수하를 즉각 안으로 들였다.
*
“얼굴을 보아하니 많이 궁금한 모양일세.”
“사실 그렇습니다. 뭐…부족한 소인이 어찌 영주님의 셈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야 한 두 번이 아닙니다마는, 이번 일은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막시밀리언은 코르넬과 나란히 말을 몰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영주와 나란히 말을 탄다는 것은 코르넬이 막시밀리언에게 얼마나 신뢰를 받는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엄연히 호위를 위해 근접 경호를 하는 중이었다.
“간단하게 생각하게. 한 번 겁을 주고 나면 그 뒤에는 별 것 아닌 일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법이야.”
“그가 움직일 것이라 확신하시는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거창하게 움직였겠는가.”
말을 하며 막시밀리언이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나도 나이를 먹기는 먹는 모양이야. 그리 오래 움직인 것도 아닌데 전보다 몸이 빨리 지치는 느낌이군.”
“송구합니다만, 제 앞에서 그런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이런. 내가 자네의 심란함을 부채질한 것인가?”
“제가 주공의 곁을 지킬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쯧쯧. 내 미안하네, 미안해. 그러니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말게나.”
“칼잡이의 명은 짧다고들 하지요. 그 말은 비단 목이 베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람이 헝클어뜨린 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코르넬이 씁쓸히 웃었다. 작은 흉터 몇 개가 자리한 그의 거친 손에는 주름이 많았다. 이 주름이 더 깊어지고 많아질수록 검을 쥐는 그이 손은 힘을 잃어간다. 평범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노화이고, 그 노화는 몸을 쓰는 이들에게는 저주와도 같다.
“알았네. 알았어. 딱 10년만 어떻게든 버티게나. 10년이 지나면 내 자네를 자유로이 풀어주겠네.”
“10년이라…자신은 없습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대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막시밀리언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이제 슬슬 보이는군.”
굴곡진 지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제법 널찍하게 펼쳐지는 구릉지대다.
“양들을 키우기에 좋아 보여.”
불어오는 바람도 선선하고 풀들도 빽빽하게 땅을 뒤덮으니 가축을 기르기에 적당하다. 이 땅을 다스리는 영주로서 막시밀리언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삼백 병사를 이끌고 순회를 나온 입장에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떤가. 척 보기에도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예. 확실히 그렇습니다.”
“바로 들이치지는 않을 것이야. 틈을 보겠지. 허나 긴장할 필요는 없네. 저쪽도 이쪽을 살피고 있을 테니, 혹 의심 갈만한 모습을 보이면 저들이 일을 벌이기도 전에 물러날 우려가 있어.”
“예. 미리 주지시켜 놓았습니다.”
“좋아. 자! 그럼 이제 슬슬 쉬어볼까.”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느새’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이 시간에 이곳에 다다른 것은 다분히 계획적인 일이었으니. 웅크린 적들이 튀어나오기에는 오늘 밤이 가장 좋은 기회일 터.
‘빠르다, 빠르다 했지만…결국에는 나 역시도 흐름에 휘말려버린 건가.’
*
야심한 시각. 일단의 무리가 넓게 퍼진 채로 서서히 코누다이안 군의 진지를 조여 왔다. 그들은 굴곡진 경사를 십분 활용하여 몸을 숨겼는데, 그 은밀함이 소리 없이 부는 미풍과 같아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질 때까지 코누다이안 군의 진지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일지 않았다.
“쳐라!”
더 이상 몸을 숨길 수 없을 만큼 거리를 좁혔을 때, 한 사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신호를 보냈다. 그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력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코누다이안 군의 진지로 내달렸다.
처음에는 소리 없이 달려가던 그들은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부터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뜬금없는 습격에 진지의 코누다이안 군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번을 서고 있던 병사들이 당황하며 진지 안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거기서 습격을 지휘하던 지휘관은 그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여기서 코누디스 남작의 목을 벤다! 그리하면 제1공은 당연히 내 것이 아니겠는가!’
부푼 가슴의 고동에 동조하며, 그는 우렁차게 외쳤다.
“코누디스 남작을 찾아라! 그의 목을 베거나, 생포하는 자에게 금화 열 닢을 약속하겠다!”
“와아아아아아!”
두둑한 포상은, 특히 번쩍이는 금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 힘이 있다. 가뜩이나 야습의 성공을 직감하며 기세를 탄 병사들은 진지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있을 코누디스 남작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그러나 그들이 기세 좋게 진지 안쪽에 발을 디뎠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당황하여 이리저리 날뛰는 병사들이 아니라 단단하게 진형을 갖춘 채 서늘한 기세를 풍기는 정예 병력이었다.
“뭐, 뭐냐!”
순간적으로 스친 불길한 의심은 비단 지휘를 내리던 사내 한 사람에게만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금화 열 닢을 되뇌며 달려든 병사들 역시 주춤거리며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도한 도적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때마침 진지 바깥쪽에서 살기등등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크루기스 군의 지휘관은 깃발 없이 다가오는 일단의 병력을 보고 기함하여 외쳤다.
“하, 함정이었는가!”
“함정이라니.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도적놈이 누가 할 소리를 대신 내는 게냐.”
굳건한 진형이 슬쩍 갈라지며 그 안에 의자까지 놓고 여유롭게 앉아 있는 막시밀리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상태에서 두 다리를 쫙 벌리고, 검을 다리 사이에 짚은 채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적 지휘관에게 조소를 지었다.
“저 놈은 필히 생포하라. 저놈을 무사히 내 앞에 무릎 꿇리는 자에게 금화 스무 닢을 약속하마.”
“와아아아아아아!”
두둑하다 못해 은혜로운 포상 약속에 이미 사기충천해 있던 코누다이안 군이 더욱 용기백배하여 앞뒤로 가로 막힌 크루기스 군을 사납게 덮쳤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쟁이가 되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변명을 하자면, 빠듯하게 연재와 수정작업을 병행한 탓인지 허리의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본래도 30분을 의자에 앉으면 30분은 눕거나 스트레칭을 해야 할 정도였는데 더 안 좋아진 것 같아 병원을 갔었습니다.
병원을 간 덕분인지 그래도 조금 나아지기는 했는데, 여전히 통증이 있어 오래 의자에 앉을 수도 없었고 앉아도 글이 잘 써지지를 않았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만, 당분간은 연재가 불규칙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리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