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반드레온과의 회담이 끝났지만 막시밀리언과 군터는 여전히 그가 떠나간 자리에 남아있었다.
막시밀리언이 다 식은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찌 생각하는가?”
“말씀하신대로 다소 급한 느낌입니다. 다만…….”
“다만?”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일을 벌일 것이라면 빠르게 해치우는 것이 낫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어차피 나나 반드레온이 아니더라도 움직일 자들이 있을 테니.”
아샤즈 테오모렌과 그 일파를 쳐내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들이 일소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이고, 그 효시를 누가 쏘느냐의 문제일 뿐.
“반드레온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야심이 큰 자였군.”
지금의 상황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과도 같다. 피 튀기는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앞서서 나가기는 꺼려지는 형국이다. 앞서 나가는 자에게 창칼과 화살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선봉이라는 자리는 늘 전장에서의 영광과 위험을 동반한다.
그러나 반드레온은 위험 보다는 영광에 눈이 먼 듯했다. 이제 막 말직의 영주 자리를 얻은 사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패기만만이다. 단순히 욕심에 눈이 먼 거라면 적당히 이용해버리면 끝이지만 반드레온이 그렇게 단순한 자는 또 아니다. 그래서 도무지 얕볼 수가 없다.
‘일단은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반드레온의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막시밀리언은 마냥 그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줄 생각은 없었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그는 은밀히 수하들을 소집했다.
*
크루기스의 영주, 제임스 크루거 자작은 기분이 좋았다.
코누다이아에서 열린 성대한 연회 내내, 연회가 아예 끝나지 않았으면 싶을 정도로 아주 좋았다. 그 연회에서 그는 당초 계획했던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현 베이고르에는 크게 네 개의 당파가 있다.
하나는 국왕인 주앙 칼 고르를 따르는 왕당파다. 베이고르 출신의 귀족들 중에 왕을 중심으로 뭉친 자들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베이고르 출신 귀족이나 왕을 따르기보다는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 뭉친 귀족파가 있다. 공작 유그 칸디시아렌을 중심으로 뭉친 그들은 왕당파 귀족들보다 수에서 월등하다.
그리고 나머지 둘이 각기 제국에서 귀의한 파비우스 리에론과 아샤즈 테오모렌의 당파들이다.
그리고 동부의 다섯 영지에는 왕당파 귀족이 하나, 파비우스 리에론의 일파가 둘. 그리고 아샤즈 테오모렌의 일파가 둘이 있었다. 숫자로만 보면 유일한 자작이라고는 해도 그가 맹주 자리에 오르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때문에 그는 어느 정도 타협할 생각도 갖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와 당파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작이라는 작위와 영주자리를 받기는 했지만, 제임스 크루거는 내심 아샤즈 테오모렌에게 불만이 있었다. 그는 허울만 좋은 이런 영지보다는 차라리 왕도의 고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의견을 어느 정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아샤즈 테오모렌은 끝내 그를 이곳의 영주로 꽂아 넣었다. 그리고서는 아이에게 하듯 좋은 말로 살살 달랬다. 그 나름대로는 용인술을 발휘한다고 한 것이겠으나 안타깝게도 제임스 크루거의 입장에서는 콧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처사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차라리 이 동부의 맹주가 되어 큰소리 한 번 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본래는 없었던 야심이라는 놈이 그의 안에서 꿈틀대며 몸집을 키웠다. 그의 영지 주변에 변변한 실력자가 없다는 것이 그의 자신감과 야망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그나마 파비우스 리에론의 당여인 막시밀리언 코누디스와 반드레온 모렌스가 걸림돌이었지만, 그들이야 어차피 경험도 적은 애송이들에 불과했다. 특히 막시밀리언 같은 경우는 전장에서 공을 세우며 입지를 다진 자라, 칼보다 혀끝이 주효하게 활약하는 판에서는 만만하게 느껴졌다.
때문에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것은 반드레온이었는데, 그를 상대로 제임스 크루거는 어느 정도 내어줄 각오도 하고 있었다. 바로 이제 혼기가 무르익은 그의 장녀를 시집보내는 것이었다. 그가 알기로 반드레온의 처는 귀족가의 여식도 아니었다. 듣기로는 무슨 상가(商家)의 여식이라던가? 아무튼 그 정도라면 문제없다 싶었다.
‘브록스를 내 아래에 두면 동부에서 하지 못할 행사가 없어지겠지.’
볼드의 영주는 그와 비슷한 처지다. 이끌면 이끄는 대로 따라올 자에 불과하다. 거기에 반드레온까지 사위로 얻는다면 다섯 영지 중 셋이 하나가 되는 셈이니, 나머지 둘도 대세에 거스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동부를 하나로 모아 입지를 다진다면 왕도에도 떳떳이 목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
그런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첫 단추는 잘 끼워진 것 같았다. 이제 시기를 보아 반드레온에게 넌지시 혼담에 대해 운을 띄우면 되리라.
그렇게 좋은 기분으로 영지에 돌아온 제임스 크루거였다. 그러나 그의 그런 좋은 기분은 불과 열흘도 가지 못했다.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정보가 들어온 것이다.
“코누다이안에서 적지 않은 병력이 훈련을 하고 있다 합니다.”
“적지 않은 병력? 훈련? 그게 무슨 소리냐.”
처음 수하에게서 보고를 들었을 때, 제임스 크루거는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 소식이 지닌 불길함을 정확히 인지했지만, 애써 그럴 리 없다 부정하며 마음속에서 막연함으로 덮어버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수하의 말은 그런 어설픈 현실도피를 처참하게 부숴놓았다.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쓰는 무구들도 모두 당장 실전에 들고 가도 문제 없을 정도이며, 훈련 과정 역시 최대한 감추고 있다 합니다. 위글로우에 가 있는 첩자도 우연한 기회가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라고…….”
“끄응! 저의가 무엇이라 보느냐.”
“병사들은 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들이 지금 칼을 닦고 훈련에 임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확실치 않다. 억측은 삼가라. 다만, 혹시 모르니 준비는 해둬야겠지.”
“예.”
인정하기 싫다고, 받아들이기 싫다고 해서 마냥 눈을 피하는 것은 머저리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제임스 크루거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닥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지만, 만에 하나 막시밀리언이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왕도로 사람을 보내야겠지. 볼드에도 이 사실을 알리고.’
왕도에는 아샤즈 테오모렌이 있다. 그 역시 넓은 영지를 가진 영주였으나, 권력의 핵은 역시 왕이 거하는 왕도에 있는 만큼 영지관리는 가신에게 맡기고 왕도에 머물고 있는 그였다. 비록 제임스 크루거가 동부로 좌천당하다시피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는 아샤즈 테오모렌의 당여였다. 그러므로 만일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가 기댈 수 있는 이는 오직 아샤즈 테오모렌 뿐이었다.
*
“자작님.”
“음? 무슨 일인가.”
“크루기스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크루기스에서……? 들여보내게.”
문이 열리며 전령이 들어섰다. 전령은 그의 앞에 무릎 꿇으며 고개 숙였다.
“하이윈즈 자작님을 뵙습니다. 주공이신 크루기스 자작님께서 보내신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옆에 있던 무관이 전령에게 서신을 받아들고 그것을 그대로 그에게 전했다. 그, 시세로 하이윈즈 자작은 크루기스 자작가의 인장으로 된 봉인을 뜯고 서신을 펼쳤다.
“…….”
서신에 쓰인 글은 구구절절 길기도 했으나 그는 한 번 눈을 위에서 아래로 쓱 내리고서 서신을 접었다.
“그래. 알겠다. 확실히 전해 받았으니 이만 물러가라.”
“예. 저…….”
“음?”
“크루기스 자작께서는 답신을 꼭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허어. 자작께서 급하신가보군. 그래. 알았다. 오늘 내로 내어줄 터이니 너는 잠깐 물러가 쉬고 있거라. 사안이 사안인 만큼, 너 역시 급히 달려왔을 것이 아니냐?”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물러가서 자작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거듭해 고개를 숙인 전령이 물러갔다. 문이 닫히고, 시세로 하이윈즈는 피식 웃으며 서신을 내려놓았다.
“개는 주인을 닮는 법이라던데, 그 말이 꼭 맞군.”
“무슨 말씀이신지?”
서신을 전했던 무관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이리저리 눈치나 살살 보면서 혀에 기름을 두른 꼴이 제임스 크루거나 저 종놈이나 똑같다는 뜻이다. 저놈이 무어라 하였느냐? 내 답을 기다리겠다 하지 않았느냐. 아샤즈 테오모렌이 아니라 내 답을 기다리겠다고.”
“아아. 그렇군요.”
무관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픽 웃으며 수긍했다.
“어찌 할까요?”
“조용히 처리해라.”
짤막하게 명을 내리며, 시세로 하이윈즈는 서신을 탁자 옆에 놓여 타들어가고 있는 양초에 가져다댔다. 자그마한 불꽃은 서신에 달라붙어 금세 크기를 키웠다.
“참으로 길었다. 구역질나는 늙은이 밑에서 너무도 오래 버텼지.”“전하께서도 주공의 노고를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래 주시리라 믿지만,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대가를 바라는 충성에 명예가 따르겠느냐.”
“송구합니다. 소관이 실언을.”
“아니.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단지 일신의 영달을 위했더라면, 십 수 년에 달하는 가시밭길을 걸어오지는 못했을 거라는 거다. 진즉에 포기하거나, 아니면 정말로 제국의 개가 되어 조국을 등졌겠지.”
세인들은 그를 시세로 하이윈즈 자작이라고 부른다. 세인들은 그를 공작 아샤즈 테오모렌의 심복이라고 알고 있다. 권력자의 곁에서 꾀를 부리는 모사라고.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나야말로 베이고르의 누구보다 고귀한 귀족이다.’
그에 대해 떠드는 이들이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들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리라. 베이고르가 당당히 깃발을 내걸기도 전부터 어둠속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왔는지. 그러한 노고는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것이었으나,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 무엇보다 굳건한 자부심으로 남아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실로 길었다만, 그것도 이걸로 끝이다.”
아샤즈 테오모렌은 죽을 것이다. 그의 세력은 송두리째 무너질 것이고, 왕국은 더 단단하게 거듭나리라. 비록 마음에 걸리는 불순분자들은 그 후에도 남아있겠지만, 그들을 쳐내는 건 당장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베이고르에 영광 있으라.”
받아주는 이 없는 독백을 내뱉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좋아하지도 않는 씁쓸한 술이 목을 넘어가니 몸 깊은 곳에서부터 후끈하게 열기가 올랐다. 목이며 혀는 고통스럽고 얼굴은 찌푸려지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상쾌하고 즐거웠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그리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북 계약 관련으로 연재분 중 일부를 수정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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