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부드러운 천이 면을 쓴다. 하루 종일 칼집 안에 들어가 있었으니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칼날이지만 그래도 닦는다. 무인으로서의 버릇이나 습관이라기보다는, 미신에 기대는 믿음 때문이었다. 미겔은 이렇게 평소에 애지중지 마음을 쏟은 그의 칼이 언제고 보답을 하리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근래에 들어서 인생이 좀 폈다지만, 그래도 칼날 위에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언제 종을 칠지 모르는 불안한 인생에 이런 얄팍한 미신이 한 두 개쯤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 어떻더냐?”
“어제랑 똑같소. 그냥 잠잠합니다. 이놈 저놈 찾아오는 인간들은 대부분 다 만나주고, 그러면서 볼드 영주와도 계속 붙어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이오. 솔직히 말씀드리면 계속 지켜보는 게 시간낭비처럼 느껴질 정도요.”
“쯧! 그딴 소리는 마음속으로 삼켜라. 까라면 까는 거지 잡소리는…….”
“좀 봐주쇼. 종일 안 걸리려고 똥줄 타면서 훔쳐보다보면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거지 싶다니까요. 그 인간이 또 눈치는 겁나게 좋아서 어중간하게 하지도 못하고 완정 긴장해서 있어야 해요. 벌써 애들이 스무 명도 넘게 나가 떨어졌다니까요?”
“거 봐라.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내 처음부터 이야기했잖느냐.”
사내는 할 말이 없어 입맛만 다셨다. 말마따나 미겔은 처음부터 쉽지 않은 일이 될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우리를 너무 얕잡아 보는 거 아니냐며 코웃음 쳤던 것은 다름 아닌 사내 자신이었다.
“그래요. 이번에도 대장이 옳았소. 대장의 촉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면서도 매번 실수를 하는구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아니라 네놈이 대장질을 하고 있었겠지. 머리 나쁜 건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너무 자책하지는 말거라.”
“…그게 위로요 조롱이요?”
“둘 다 아니다. 어쨌든, 특별한 이상행동은 없다 이거지?”
“예. 틀림없소.”
“그 자가 위글로우를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 마음을 놓지 마라. 마지막까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물론 하라는 대로 따를 테지만, 그래도 너무 유난스럽다는 생각은 어쩔 수가 없소. 아무리 그 작자가 대단한 작자라고 해도, 설마하니 남의 집에 와서 뭔 일을 벌이겠소?”
“아니. 십중팔구…아니, 백중 구십구 그러지는 않겠지.”
“그래. 거 봐요.”
“근데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세상 돌아가는 사정 모르는 너 같은 단순한 놈들은 모르겠지만, 그 작자는 정말로 보통 내기가 아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바로 먼젓번에 그 자가 힌자예프를 어떻게 함락시켰는지 아느냐?”
“뭐…군사를 몰고 들어가서 깃발 꽂았겠지. 아니요?”
“멍청한 놈. 그런 단순한 인간이었으면 이렇게 신경 곤두세울 필요가 있겠느냐? 그 자는 힌자예프로 군사는커녕, 부관 한 명만 달랑 데리고 들어갔다. 너무 공교로운 순간에 당도한 원군을 힌자예프의 관리들이 어찌 의심하지 않았겠느냐? 해서 그는 의심을 피하고자 부관 한 명만 대동하고 힌자예프로 들어섰다.”
“…그리고요?”
“힌자예프의 수뇌들과 가진 회의에서 홀로 그들을 모조리 베어 죽였다. 그리고서는 가장 높은 신분이었던 자의 수급을 한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가 넋이 나간 힌자예프군에게 항복을 권유했지.”
“설마 힌자예프 놈들이 그대로 항복했소?”
“안 했으면 지금 그 작자가 어떻게 멀쩡히 살아 있겠느냐?”
“힌자예프에는 머저리들만 있었던 모양이오. 칼이 백 개면 한 번씩만 베어도 누군들 죽지 않고 배길까. 적장을 베고 튼튼한 성벽을 방패삼으면 성 밖의 군대도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을…….”
“말로는 뭘 못하겠느냐. 네가 그 자리에 있었던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날 앞에서 벌벌 떨기만 했을지 어찌 알까? 결국 그 순간, 그 자리에 직접 있지 않고서는 다 소용없는 말일 뿐이다. 의미 없는 가정은 다 집어치우면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반드레온 모렌스라는 작자가 터무니없이 담대하고, 독하며, 치밀한 자라는 것뿐이다. 영주께서도 그걸 알고 계시니 그 자로부터 눈을 떼지 말라 엄명을 내리신 게고.”
미겔은 매끄럽게 광이 나는 칼을 칼집에 넣었다.
“그럼 대장이 보기엔 어떻소?”
“무슨 소리냐?”
“영주님이나, 남들이 하는 이야기 말고 대장이 직접 눈으로 본 그 작자는 어땠냐는 얘기요. 대장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끝내주잖소. 아니, 위험한 인간을 잘 알아보는 건가? 아무튼, 대장이 직접 본 그 작자는 어땠냐고요.”
“위험한 인간이다 싶었다.”
“무서운 기사나리 하고 비교하면 어떻소?”
“…….”
대충 답하고 넘기려다가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이제 보니 이 발칙한 부하 녀석은 이 질문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으음.”
군터와 반드레온이라. 답하기 난처하면서도 재미있는 질문이다.
둘 모두 위험한 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단순히 용력이나 잔혹함 같은 것을 논함이 아니다. 미겔이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은 이성보다는 본능에 크게 기대는 면이 있다. 그의 피에 흐르는, 그를 수호하는 힘이 위험을 판가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어느 쪽이 더 껄끄럽냐 하면…글쎄, 나는 우리 첫 번째 기사나리를 꼽고 싶은데.”“그럴 줄 알았소.”
“그렇지만…브록스의 영주는 조금 달라.”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우리 영지의 기사 나리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참수도(斬首刀)라면, 브록스의 영주는 예리하게 잘 갈린 비수라고나 할까. 껄끄러운 것은 전자지만, 섬뜩하기는 후자가 더 섬뜩하지.”
“그 작자가 비수란 말이오? 전혀 그렇게는 안 보이던데.”
“네 눈엔 그렇게 안 보여도, 내 눈엔 그리 보인다.”
“끄응.”
미겔이 그리 보았다면 그런 것이다. 위험한 인간들을 가려내는 눈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 빼어나다고 믿는 이가 바로 미겔이었으므로.
“당사자도 당사자지만, 같이 다니는 수하들도 보통이 아닌 것 같았소. 단순한 호위 같지는 않던데…….”
“이제 사흘 밖에 안 남았다. 조금만 더 고생해라.”
“예이, 예이.”
*
“어떻게, 연회는 잘 즐기고 계십니까?”
“예. 덕분에. 이 몸이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성대한 연회더군요.”
“하하. 칭찬이 너무 과하십니다.”
넓은 방 안에는 단 네 사람뿐이었다. 큼직한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막시밀리언과 반드레온. 그리고 호위 역으로 막시밀리언과 반드레온의 뒤편에 선 군터와 또 다른 한 명.
“공과 저의 수하들이 주변을 틈새 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의 벽은 충분히 두꺼우니 말이 새어나갈 일도 없지요.”
“호오. 그렇습니까.”
“예. 그러니 우리끼리의 이야기를 해도 문제없을 것입니다.”
반드레온이 껄껄 웃었다.
“그러시다면야…….”
호쾌하게 흘러나온 웃음은 금방 잦아들었다. 호인이며 쾌남처럼만 보였던 반드레온의 눈이 잠잠하게 가라앉으니 절로 서늘함이 풍겼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심심한 유감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뜻이신지?”
“제게 붙여두신 눈들 말입니다.”
대화에는 일체 끼지 않고 가만히 뒷짐을 지고 서 있던 군터의 손가락에 순간 힘이 들어가 꿈틀거렸다.
‘멍청한 놈들. 그런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단 말인가.’
군터는 막시밀리언이 미겔로 하여금 반드레온을 감시하게 한 것을 알고 있었다. 명령을 내리던 그 자리에 그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잘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군터가 내심 실망과 짜증을 느끼며 혀를 차고 있을 때, 막시밀리언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담담히 날 선 말을 받아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주인 된 몸으로서 귀빈을 잘 살피고자 한 것인데, 본의 아니게 공께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호위와 감시의 차이를 모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레온은 막시밀리언의 말 같지도 않은,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에 즉각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사소한 불쾌감은 이쯤에서 접겠다는 뜻이다.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언제로 보고 계십니까?”
“두 달 뒤입니다.”
“음? 굳이 그렇게 길게 잡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서두르다가는 괜한 오해를 사게 됩니다. 신중한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오해를 사면 또 어떻습니까?”
“예?”
막시밀리언의 고개가 옆으로 움직였다. 그에 반해 반드레온은 미동도 않고 또렷한 눈으로 막시밀리언을 응시했다.
“코누디스 남작님.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십시다. 남작님께서는 남들의 눈길을 끄는 것을 꺼려하시는 듯하지만, 어차피 이제 더 이상 그러기는 불가능합니다. 과정을 어떻게 맞추든,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남작님과 이 몸을 비롯하여 몸집을 불린 자들은 모두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칼이 무언가를 베었을 때 사람들은 칼을 보지, 칼을 쥔 자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번 일을 맡게 되었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세찬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들어온 셈이라는 거지요.”
“흐음.”
막시밀리언은 그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즉답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글거리는 반드레온의 눈을 마주하면서 침묵을 지켰다.
“좋습니다. 그렇다고 치고, 명분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합당한 명분 없이 영지전은 벌일 수 없습니다.”
“아아. 그렇지요. 당연히 그럴듯한 명분을 준비할 것입니다.”
영지전.
영지를 가진 영주들끼리 벌이는 자그마한 전쟁으로, 엄밀히 따지면 내전이나 다름없다. 같은 나라에 속한 영주들끼리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터무니없게 느껴지지만, 베이고르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이 바보 같은 전쟁은 놀랍게도 합법이다. 물론 이런 전쟁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왕의 재가가 필요하며, 왕의 재가를 얻기 위해서는 전쟁을 일으킬 만한 명분이 필요하다.
“연회가 끝나고 닷새 뒤, 볼드의 소영주가 죽을 겁니다.”
“과격하군요.”
“흉수는 적당히 꼬리를 늘리면서 브록스로 올 테고, 독자를 잃은 볼드의 영주는 군사를 이끌고 쫓아오겠지요.”
“거기서 내주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내주지 않다 뿐이겠습니까. 그곳에서 바로 영주의 목을 벨 겁니다.”
반드레온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에 막시밀리언의 표정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너무 과합니다.”
“생존자는 없을 겁니다. 세간에 퍼진 이야기에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판단을 그르친 아비의 어리석음만이 담겨있을 겁니다.”
“으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든 정리하는 식으로 비치도록 마무리를 지을 생각입니다. 물론 추후에 왕도에서 약간의 벌이 내려오겠지만, 그 정도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볼드를 손에 넣는데 돈푼 얼마가 대수겠습니까.”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포장을 그럴싸하게 한들 세인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실 겁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게다가 혼자라면 심하게 욕을 먹겠지만, 여럿이라면 그렇지도 않을 겁니다.”
“…….”
“제가 먼저 그렇게 움직이고 나면 남은 자들이 경각심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러면 아무리 남작께서 치밀하게 수를 세우신들 쉽사리 일이 풀리지 않겠지요.”
“이거이거…저를 곤란하게 만드시는군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반드레온의 시원시원한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 작품 후기 ==========
재쓱군님, 까페소다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날이 춥네요. 모두들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