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벨리사는 환한 웃음을 머금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카트리나 리에론. 아니, 이제는 카트리나 코누디스가 된 영주 부인을 이따금씩 조심스럽게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주목을 자연스레 누리며 여유롭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듯했고, 영주의 부인다운 위엄마저 흘러나왔다. 대다수의 여인들과, 염치불구하고 고개를 들이민 몇 사내들은 그녀의 그런 기세에 자연스레 눌려 값싼 미소를 지은 채 어떻게든 말 한 마디라도 나누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그러나 왜일까. 사람들의 중심에서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영주 부인이 벨리사의 눈에는 다소 위태로워 보였다. 그것은 오직 카트리나 코누디스와 사적인 대화까지 종종 나누는 그녀만이 알 수 있는 자그마한 균열이었다.
‘역시…신경 쓰이시는 거구나.’
카트리나 코누디스가 은근히 이번 연회를 신경 써 준비해왔다는 것을 벨리사는 알고 있었다. 위글로우 사교계에 은근히 퍼진 소문을 이제는 그녀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없었던 것이리라.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소문은 최근에 이르러 영주 내외가 좀처럼 잠자리도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망측한 수준으로까지 커진 상태였다. 소문의 진위야 밤에 두 사람의 침실을 직접 엿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겠지만, 그런 소문이 나돌 만큼 그녀의 입지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근래에 이르러 영주 부부가 함께 대외에 모습을 비추는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더욱 소문에 힘이 실리는 이유였다.
‘영주님께서는 어쩜 그리 야속하실까.’
물론 벨리사는 영주 부부가 아무런 애정도 없이, 그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초래된 것은 영주 부인 쪽의 책임이라는 것도 말이다.
권력자의 집안에서 안주인으로서 해야 할 가장 큰 역할은 가문의 대를 이을 후계를 낳는 것이다. 막시밀리언이 혼인을 하고나서 특별히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닌데 아직까지 후계를 낳지 못했다는 것은 사내보다는 여인에게 비판의 화살이 날아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정략혼으로 맺어진 부부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인에게 남편이 관심을 거두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영주부인이 대놓고 홀대를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그저 그녀가 리에론의 여식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아서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하지만 그럼에도 야속한 것은 야속한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남편인 군터에게 변함없이 사랑을 받아왔던 벨리사였기에 그녀는 막시밀리언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영주 부부 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사유로 부부관계에 문제를 겪는 이들에 대해 그녀가 갖는 생각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직 권력자들의 생리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 부인.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우시네요.”
“고마워요 부인. 부인께서도 아름다우세요.”
“드레스는 어디서 맞추신…….”
카트리나 코누디스 만큼은 아니지만, 벨리사 역시 많은 사람들이 환심을 사려는 대상 중 하나였다. 위글로우가 코누다이안이 되기 전에는 부사령관의 부인이었으며, 막시밀리언이 베이고르의 영주가 된 후에도 그녀의 남편은 영지의 첫 번째 기사로서 건재한 힘을 가졌다. 다만 그런 것치고는 직접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오는 자들이 적은 편이었는데, 이는 그녀의 남편인 군터의 악명(?)이 널리 퍼진 덕분이었다. 가까이 가서 알랑방귀를 끼어봐야 떨어지는 게 없다는 사실이 다년간 충분히 입증이 된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벨리사로서는 그편이 편했다. 그녀는 바라는 것이 있는 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직도 익숙지가 않았다. 그나마 그녀를 사교계에 입문시킨 뒤 이것저것을 알려준 미트라스 부인이나, 그 뒤로 친하게 지내며 그녀를 살펴주는 영주 부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웃음 뒤에 칼을 숨긴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사교계에서 여러 어려움들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부인. 저녁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세요.”
벨리사는 인파에 둘러싸인 그녀에게 다가가 주변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러자 어떻게든 얼굴도장을 찍으려 몰려 있던 이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밝게 웃으며 벨리사에게 말했다.
“그랬었지. 고마워요 부인. 마침 이야기도 다 끝난 참이었답니다. 자, 가죠.”
벨리사와 카트리나는 나란히 연회장을 나왔다. 그녀들의 뒤로는 수행인원 몇 명만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연회장을 나서서 훈풍을 맞을 즈음에 카트리나는 그들마저 더 뒤로 물러나게 하고 벨리사와 단 둘이서 걸었다.
“벨리사. 왜 그랬어요?”
카트리나가 물었다.
사실 오늘 그녀에게 저녁 약속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순순히 벨리사의 거짓말에 어울려주었다.
“부인께서 힘들어 보이셔서요.”
“힘들어 보였다고요? 내가?”
카트리나가 벨리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벨리사는 그녀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카트리나를 올려보며 또렷하게 답했다.
“예. 왠지 모르게 오늘은 그래 보이셨어요.”
“…….”
카트리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결국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들은 잘 정돈해 둔, 오직 영주 부인만이 출입할 수 있는 영주관저 뒤편의 자그마한 정원을 거닐었다.
“벨리사는…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거울을 보기 전에는 자기 얼굴도 볼 수가 없는 걸요.”
“그러네요. 정말로 그 말이 맞아요.”
카트리나는 픽 웃었다. 힘없는 웃음이었다. 벨리사는 영주 부인의 아름다운 얼굴에 자리 잡은 짙은 그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하지만 벨리사는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키며 함께 걸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요즘 들어서 가끔씩 평범한 여인의 삶을 살았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예?”
“압니다. 배부른 소리라는 걸. 벨리사가 얘기해줬던 거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벨리사는 카트리나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다. 그 중에는 벨리사가 군터를 만나기 전 겪었던, 고귀하지 않은 여인의 삶 또한 들어 있었다. 그를 통해 카트리나는 리에론 가문의 여식으로서는 결코 겪을 일 없고 알 수도 없는 삶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내일 먹을 음식을 걱정하고 밤바람을 피해야 하는 이들의 삶을 딱하다고 이야기 했었다.
“난 이제껏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살아왔어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조금 힘이 드네요.”
“부인……”
“정략혼으로 맺어진 관계에 다른 무언가를 바라는 건 사치겠죠. 하지만…근래에 한 번도 겪지 못했던 것들을 겪고 있자니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든답니다.”
리에론의 여식이니, 영주 부인이니 하면서 주변에서 아무리 떠받들어도 결국 카트리나는 서른도 되지 않은 한 사람의 젊은 여인에 불과했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지쳐갔다. 그럼에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의연한 척을 하느라 더 지쳐갔다. 그렇게 지치고 지쳐, 그녀는 서서히 안에서부터 무너져가고 있었다.
“권력자에게 후계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주께서 이제껏 후처나 첩을 들이지 않으신 것은 저를…아니, 리에론 가문을 배려한 처사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것도 어려워질 겁니다.”
“설마…이야기가 나온 것이 있나요?”
카트리나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하지만 곧 그런 이야기들이 나온다한들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영주님과 결혼을 한 지도 꽤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 부인께서는 젊으신데…….”
“내가 젊은 것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어찌 됐든 나는 지금까지 아이를 갖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나는 젊지만, 이제 영주께서는 후사를 걱정하셔야 할 나이가 되셨습니다. 아마 영주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밑에서부터 이야기가 올라올 거예요.”
카트리나는 그러나 그 밑에서 올라오는 이야기라는 것도, 결국에는 막시밀리언 본인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일 거라는 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안 그래도 붉어지고 있는 벨리사가 고함이라도 빽 지를 것 같아서였다.
‘참 신기한 사람이야.’
위글로우의 부사령관이었다가, 지금은 코누다이안의 첫 번째 기사가 된 군터가 애처가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위글로우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사내가 애처가라는 것이 의외라고 생각하지만, 카트리나는 벨리사와 가까이 지내며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리사는 여인으로서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가진 매력 중 일부에 불과하다. 애당초 그녀가 가진 것이 미모뿐이었다면 그녀의 남편은 이미 다른 여자들을 수도 없이 만나고 다녔으리라. 본래 사내들에게 있어 여인이란 권세와 같아서, 가질수록 더 원하는 법이니.
하지만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카트리나는 그것이 벨리사가 가진 매력 때문이라 보았다.
그녀 자신은 모르는 듯하지만, 벨리사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고, 감정에 호응해주는 능력. 때문에 카트리나는 벨리사와 이야기를 하며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들을 많이 했었다. 벨리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만큼은 그녀는 속이 후련해지고,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필시 벨리사의 남편 역시 그런 매력에 푹 빠진 것이 아닐까. 비록 카트리나가 사내의 마음을 다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생각에는 아무리 욕심 많은 사내라도 이런 아내가 있다면 다른 여자를 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카트리나와 벨리사는 자그마한 정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입구로 돌아왔다. 그녀들이 입구까지 다다랐을 때, 거기에는 가볍게 무장한 몇몇 군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카트리나는 열 명이 안 되는 군졸들의 앞에 선 젊은 사내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그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벨리사와 어울리며 자주 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군터의 제일 심복이라 불리는 백부장 살라스였다.
“영주 부인을 뵙습니다.”
“또 보는군요.”
정중히 고개를 숙인 살라스에게 벨리사가 물었다.
“살라스. 여긴 어쩐 일이죠?”
“대장님께서는 먼저 귀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부인을 모셔오라 명하셨기에.”
“…그래요.”
벨리사는 군터가 먼저 돌아갔다는 이야기에 맥 빠진 얼굴을 했다. 혹시 시간이 너무 늦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 밤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하늘임을 확인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녀의 남편은 연회를 더 견디지 못하고 먼저 도망(?)쳐 버린 것이다.
“저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살라스가 재빨리 말했지만 카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내 욕심으로 부인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는 없지요. 부인. 오늘은 이만 하도록 하지요. 오늘만 날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군터 경께서 부인을 기다리고 있으실 게 뻔한데, 어찌 내 욕심만 채우겠습니까.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것으로 하지요.”
카트리나는 작게 미소 짓고 그녀의 수행인원들과 함께 정원을 떠났다. 벨리사 역시 살라스들의 호위를 받으며 귀가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위벨은 위글로우 토박이입니다. 한직에서 빌빌대고 있는 것을 막시밀리언이 눈여겨보고 등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