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연회가 시작됐다. 한 달 간 들인 공이 무색하지 않게 일찍이 위글로우에서 볼 수 없었던 규모로 성대하게 막을 올렸다.
연회 기간 동안 음식을 조리하는 요리사들만 백에 달하고, 그 음식을 나르고 연회장을 정리하는 등의 업무를 보는 시종과 하인들의 수가 그 세 배를 넘었다. 이마저도 직접 연회장에 얼굴을 비치지 않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는 이들은 합산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하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아니! 실례합니다. 공께서는 혹시…….”
연회가 시작한 이후,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여기저기 팔고 다니는 이들이 이곳저곳에 넘쳐났다. 자신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자들을 찾아 어떻게든 안면을 트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는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가식과 기만, 흥분과 불안, 온갖 감정들이 넓은 연회장이 비좁다는 듯 농밀하게 꿈틀댔다. 군터는 그 한가운데를 벨리사와 함께 걷고 있었다.
“군터 경. 이렇게 차려입으시니 정말 보기 좋습니다. 평소에도 좀 이렇게 입고 다니시지 그러십니까.”
미트라스가 환히 웃으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고급스러운 예복을 입은 그는 무관이라기보다는 그저 체격이 좋은 귀족처럼 보였다. 반면에 비슷한 옷을 입은 군터는 단정한 예복을 입었음에도 특유의 묵직하고 거친 분위기가 흘러나와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무관이 평소 걸칠 것은 갑옷이 아니겠는가.”
“평범한 무관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이전에는 부사령관이셨고, 이제는 코누다이안의 첫 번째 기사가 아니십니까. 경께서 원치 않으셔도, 앞으로는 이런 곳에 자주 얼굴을 비치시게 되지 않겠습니까.”
“자네의 말이 틀리기만을 바랄 뿐이네. 나 같은 자에게 이런 곳은 너무 어려워.”
“이런, 이런. 부인께서 부군을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예. 제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할 수 있는 한 노력하겠습니다.”
미트라스와 짤막하게 인사를 나누고 군터 부부는 천천히 연회장을 거닐었다. 그 중간 중간에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러 오는 자들이 있었다. 대부분 위글로우의 유력자들, 내지는 벨리사와 면식이 있는 귀부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밝은 얼굴로 다가왔다가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나갔다. 군터의 분위기와 그의 시선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딱히 위협을 하거나 쫓아낼 의도는 없었음에도 편치 못한 그의 심기가 은연중에 표출된 결과였다. 덕분에 코누다이안의 첫 번째 기사와 어떻게든 친분을 다지려 다가왔던 이들은 절로 목소리가 작아지고 숨이 가빠지는 신비로운 경험만 한 채 도망치듯 물러서야만 했다.
“왜 그렇게 쌀쌀맞아요?”
“쌀쌀맞다고?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목소리가 달라요. 무뚝뚝하잖아요. 웃기도 하고 그래요. 나랑 보리스, 실비와 있을 때처럼.”
“가족과 남은 다르지.”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지금처럼 있으면 사람들이 당신을 오해할지도 몰라요.”
“내가 무슨 칼을 들고 위협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말 하나 제대로 못 붙이는 녀석들 따위 상대할 필요 있나.”
“참…꼭 필요해야만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우리 가족한테 하는 거의 반. 아니, 그 반에 반만큼이라도 다른 사람들한테 따뜻해져 봐요. 그러면 아무도 당신을 마냥 무섭게만 보지는 않을 걸요.”
“알았어. 그러니까 그쯤 해둬. 당신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싫은 소리 하려던 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무슨 괴물 보듯이 보니까……. 화난 건 아니죠?”
조심스럽게 묻는 벨리사. 불안한 듯 깜빡거리는 눈에 군터는 실소를 흘렸다.
“화는 무슨. 그럴 리가 없잖아. 그보다…당신, 영주 부인을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슬슬 시간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아, 맞아. 그래야죠. 그런데…….”
“가 봐. 난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
“괜찮겠어요?”
“뭐야. 내가 보리스처럼 보이나?”벨리사가 짓궂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요. 때로는 보리스보다 더 걱정 되죠.”
“신났군. 빨리 가. 지금 안 가면 못 가게 해버릴 테니까.”
“무서워라. 그럼 가볼게요. 당신 사고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돼요?”
“…거 참.”
마지막까지 장난기를 거두지 않는 벨리사를 보내고서 군터는 연회장 구석의 적당한 곳에 기대어 숨을 돌렸다.
‘많기도 하군.’
벨리사와 함께 있었을 때는 그녀를 신경 쓰느라 딱히 주변을 둘러볼 생각을 안 했었는데, 이렇게 혼자가 되니 주변의 광경이 슬슬 눈에 들어왔다. 넓은 연회장을 채운 바글바글한 사람들. 저렇게 많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영역에서는 나름대로 큰 소리를 내는 자들이라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
“훌륭한 자리를 마련해주었소 코누디스 남작. 윗사람으로서 내가 먼저 나섰어야 했거늘, 그러지 못해 참 겸연쩍구려.”
“하하하. 누가 나서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 말이 맞군. 우리가 이렇게 돈독하게 모여 앉아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국왕 전하에 대한 가장 큰 충성이 아니겠는가.”
멋스럽게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상석에 앉아 껄껄 웃으며 양옆을 보았다. 막시밀리언을 비롯한 네 명의 영주들은 비슷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 말씀이 옳다 맞장구를 쳤다.
상석에 앉은 중년인은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가장 작위가 높은 크루기스의 영주, 제임스 크루거 자작이었다. 그는 영주들이 모여 앉은 이후로 줄곧 대화를 주도했다.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지라 막시밀리언은 내심 그를 비웃었다.
‘제 처지도 모르는 얼간이 같은 자. 지금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닐진대……. 참으로 어리석구나.’
제임스 크루거는 그와 같이 제국에서 귀의한 자였다. 그러나 파벌은 달랐는데, 막시밀리언은 리에론 가문 막하인 반면 그는 아샤즈 테오모렌의 수하였다. 파비우스 리에론과 마찬가지로 후작 위를 받은 아샤즈 테오모렌을 뒷배로 두고 있으니 제임스 크루거가 저렇게 자신만만할 법도 했다. 게다가 여기 모인 영주들은 모두 남작이었으니까 말이다. 작위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근방의 맹주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
상석에서 늘어놓는 시답지 않은 소리를 대충 한 귀로 듣고 흘리던 도중, 막시밀리언의 시선이 맞은편의 반드레온과 마주쳤다. 한 순간의 시선 교환 속에서 그들은 짧지만 작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들 알다시피 이 동부 지방은 오지요. 달갑지 않은 이야기겠지만 낙후되었다고 해도 무방하겠지. 다섯 영지에서 고위귀족이 그나마 이 사람 하나라는 점만 봐도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오.”
막시밀리언은 실소가 흘러나오려는 것을 삼켰다. 언제부터 오등작 중 밑에서 두 번째에 불과한 자작이 고위귀족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그런 말을 남의 입을 빌린 것도 아니고,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다니. 막시밀리언은 제임스 크루거가 어지간히도 권력에 몸이 달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이번 연회에 개최지인 코누다이안을 제외하고 인근 네 개 영지에만 초대장이 돌아간 이유를, 저 어리석은 자작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사이에 강이 하나 지난다 뿐이지, 거리상으로만 따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백작령이 있음에도 막시밀리언은 그곳에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저 모자란 작자는 절대 알 수 없으리라.
‘그대들의 효용가치는 이미 다했다. 그런데 당사자들만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등 뒤에서 칼이 꽂혀도 그대는 남을 원망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제국에서 귀의한 세력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파비우스 리에론이 이끄는 리에론 가문 일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샤즈 테오모렌으로 대표되는 일파다.
그 두 무리는 각기 손에 쥔 힘의 종류가 다르다. 파비우스 리에론 일파는 각지의 유지로서 가진 영향력도 영향력이지만 무엇보다 수만에 달하는 군사력이 그들이 가진 최대의 힘이다. 그 힘으로써 그들은 이번 전쟁 때 크게 공을 세우며 베이고르의 승리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반면 아샤즈 테오모렌이 이끄는, 한때 구 정부파라고 불리기도 했던 정치 세력은 그런 직접적인 무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기껏해야 각자가 보유한 얼마간의 사병이 전부다. 그들의 진정한 힘은 살마드를 비롯하여 정계 곳곳에 뻗치는 관료세력으로서의 힘이다. 그들은 그 힘을 이용하여 베이고르의 정복군이 제국의 도시들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했다. 이 또한 전장에서 싸워 얻어낸 승리 못지않은 공이었다.
‘그대들이 살 길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헌데 끝내 물러서지 않고 버텼으니 이제 그대들에게 남은 결말은 하나뿐이다.’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아샤즈 테오모렌과 그 일파의 운명은 정해져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베이고르 왕에게는 공신들이 많다. 특히 별 볼 일 없는 반군의 군주였을 때부터 그를 지지했던 구 베이고르의 귀족 세력은 왕을 받치는 가장 큰 힘이다. 온전한 왕위를 얻은 그가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공신들인 것이다.
사람은 많은데 자리는 한정적이다. 전쟁 당시에는 여러 고려사항 때문에 제국 세력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지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이들은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앞서 언급했듯 자리는 한정적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 자리를 다 채우고도 한참이나 남을 만큼 많으니,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왕과 공신들은 타협점을 찾아나갔다. 그리고 조금씩 양보를 해야 한다는 현실을 어렵사리 받아들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해결이 됐다. 아니, 해결이 될 예정이었다.
“혹시 내 말에 잘못된 점이 있거나, 부족하다 여기는 분이 계시다면 기탄없이 말을 해주시오.”
제임스 크루거나 사뭇 자신만만한 기색으로 네 영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쯤 기선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은 가쁘게 움직이는 가슴의 고동을 느끼면서, 한껏 도취되어 있겠지.
‘안타깝군.’
왕과 공신들의 협상은 끝났다. 그 협상의 자리에 아샤즈 테오모렌과 그의 일파는 단 한 명도 끼지 못했다. 본래 협상이라는 것은 서로 격이 맞는 자들끼리 나누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현 시국에 그 격이라는 것은 곧 힘을 의미한다.
‘책상 위에서 굴리는 펜대는 더 이상 힘이 되지 못하는 시대요. 그것을 알지 못했으니 떨어져나간들 억울하지는 않겠지.’
아샤즈 테오모렌은 더 이상 베이고르의 왕에게 그 어떤 조력도 하지 못한다. 그들이 제국에 있을 당시 지녔던 힘은 이제 다른 이들도 낼 수 있는 힘이 되었으니, 왕이 굳이 그들을 붙들고 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을 쳐내면서 혹 생길 수 있는, 제국에서 귀의한 자들을 쳐낸다는 식의 구설수는 파비우스 리에론과 그 일파를 중용하면 자연히 사라질 것이니 필요 없어진 이들을 쳐내는데 망설임이 생길 이유 또한 없다.
“저는 자작님의 말씀에 십분 동의합니다.”
“오오. 그렇소?”
“예. 말이 나온 김에 자작님께서 저희를 이끌어주시지요. 작위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자작님이야말로 우리 동부를 이끌어 가실 적임이시라고…….”
볼드의 영주, 케일리스 볼드 남작이 달콤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자작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잘들 노는구나.’
케일리스 볼드 남작 역시 아샤즈 테오모렌의 일파다. 옆에서는 반드레온이 그를 웃으며 쳐다보고 있다. 같은 마음이라며 맞장구를 치지만, 막시밀리언의 눈에는 그 웃음이 먹이를 바라보는 맹수의 그것처럼 보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후원쿠폰을 쏴주신 오이사이오님, leesujo님, 불뚝꺼비님 감사드립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신 독자분들, 추천, 원고료쿠폰을 남겨주신 분들도 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