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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27화 (227/1,064)

<-- 2부 -->

한 달이라는 시간은 분명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위글로우는 벌써부터 바쁘게 돌아갔다. 코누다이안과 인접한 영지들만 해도 네 곳에다, 그곳에서 올 이들은 모두 귀빈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니 한 달의 시간도 부족함 없는 준비를 위해서는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 것이다.

“준비는 잘 되어 가는가?”

막시밀리언의 말에 미트라스가 일어나 답했다.“연회 기간 동안 병사 천오백으로 연회장 주변을 철저히 통제할 예정입니다.”

“천오백? 너무 경직돼 보이지는 않겠는가?”

“입구를 지키는 병력을 제외하면 모두 흩어져서 눈에 띄지 않게 경비를 설 것이니 문제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내 집에서 벌이는 연회이네. 물론 형식적인 자리가 될 터이니 연회의 모양새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물론입니다.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미트라스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막시밀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엔 군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귀빈들의 호송을 위한 준비는?”

“차질 없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 무엇보다 영주들의 호위 병력 인선에는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게. 듣자하니 브록스와 볼드는 합류하여 온다는 것 같던데.”

“예. 그쪽은 제가 직접 마중 나갈 계획입니다.”

“음.”

연회장 호위 및 주변 통제는 미트라스, 밖에서 오는 주요 귀빈들을 맞는 것은 군터의 일이다. 두 사람이 각기 일을 나눠 맡는다는 것은 바깥에 코누다이안이 연회를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증명이다. 두 사람 모두 코누다이안의 기사로서, 영주의 측근으로서 코누다이안 안팎으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까 말이다.

“본드의 영주도 그렇지만, 브록스의 영주를 대할 때는 주의하도록 하게. 자네도 알겠지만, 그 자는 보통이 아니거든.”

“예. 유념하겠습니다.”

브록스 영지의 영주, 반드레온 모렌스. 일찍이 막시밀리언과 공조하여 힌자예프를 함락시킨 전적이 있는 사내였다. 군터가 그 자에 대해 아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지만, 막시밀리언은 종종 다소 과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를 신경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군터는 알지 못했으나, 그는 막시밀리언의 판단과 조언을 신뢰했다. 필시 브록스의 영주에게는 주의해야 하는, 무언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으리라.

*

그로부터 보름 하고 이틀 후. 군터는 휘하 백인대 둘을 이끌고 볼드와 브록스의 영주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위글로우를 나섰다.

“저기 깃발이 보이는군요.”

“그렇군.”

수하가 알려주기 전부터 군터는 높이 솟은 깃대 위에 흩날리는 네 개의 깃발을 확인한 차였다. 두 개는 베이고르의 왕국기였으며, 나머지 두 개는 각기 볼드와 브록스의 영주 가문을 상징하는 가문기다.

“저쪽도 우리를 봤으면 좋겠지만…혹시 모르니 천천히 다가간다.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려라.”

“옛.”

두 영주 일행은 군터가 이끄는 병력과 비슷한 수로 보였다. 수는 적었지만 무장의 상태나 제법 예리한 군기 등을 보면 정예로 추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대들은 코누다이안의 군졸들인가!”

어느 정도 다가갔을 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멋들어진 갑주를 걸친, 체구가 큰 사내였다. 척 보기에도 꽤 실력 있어 보이는 군관으로 보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거기까지만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군터는 그의 갑주 왼쪽 가슴 상단에 달린 휘장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소관은 코누다이안의 기사 군터라고 합니다! 브록스의 영주이신 반드레온 모렌스 남작님이십니까!”

“그렇다! 멀리서도 용케 알아보는군 그래!”

“볼드의 영주님께서도 함께 계십니까!”

“그래! 내 뒤에 계시는 분께서 케일리스 볼드 남작이시다!”

가까이 다가간 군터는 말에서 내려 두 남작에게 군례를 취했다. 절도 있게 예를 표하는 그의 모습에 두 남작이 감탄한 기색을 드러냈다.

“일찍이 코누디스 남작께 용맹한 수하가 한 명 있다 들은 기억이 있지. 그게 자네를 이름이었군.”

“들개를 잡았다 하면 호랑이를 잡았다 떠들어대는 것이 세인들의 입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나도 몸 쓰는 데는 꽤나 자신이 있는 편인데, 자네를 앞에 두고 있으니 절로 긴장이 되는군. 우리를 지켜주러 온 자임을 아는데도 그렇다네.”

볼드의 영주인 케일리스 볼드 남작은 그저 겉으로 보이는 체구와 돌덩이 같은 기도에 감탄한 듯했다. 그렇기에 그는 군터를 보고 다소 놀랐을지언정 그런 감정을 길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반면에 브록스의 영주, 반드레온 모렌스 남작은 눈을 빛내며 군터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그의 입으로 직접 말한 것처럼, 무인으로서 군터를 보고 감탄한 바가 작지 않은 듯했다.

‘확실히…범상치 않은 자로군.’

그가 군터를 보고 감탄했듯, 군터 역시 반드레온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고 놀란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군터는 완벽하게 절제되었음에도 힘이 느껴지는 그의 기세를 보고 놀란 것이었다. 반드레온은 분명 무인으로서 완숙한 경지를 넘어선 자였다. 비록 직접 칼을 부딪쳐 보지 않는 이상 정확한 재단은 힘들겠지만, 기도로 전해지는 느낌만으로는 난적이었던 대전사 포라칸이나 아그니스 체스퍼를 제외하면 이제껏 그가 본 무인들 중 단연 으뜸이라 할 만한 자였다.

‘일신의 실력이 출중하고, 그런데다 심계도 얕지 않다 이건가.’

이제 막 얼굴을 보았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과연 리에론 가문의 후원을 받을 만한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막시밀리언이 그를 신경 쓰는 이유 역시 알 것 같았다.

“자네 같은 자는 더 크게 소문이 날 법도 한데 말이지. 의아하군.”

“남작께서 저를 너무 크게 보시는 듯합니다.”

“흠. 내 눈이 형편없다는 말을 돌려 하는 것인가?”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농담일세. 농담. 그렇게 정색하면 내가 무안해지지 않는가.”

“…….”

어쩐지 말을 이어갈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라, 군터는 말수를 줄이고 괜히 병사들을 움직여 주변을 돌아보게 했다. 그러자 반드레온도 볼드 영주와 말을 섞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인으로서 군터에게 관심이 생겼다한들, 바로 옆에 있는 이웃 영지의 영주를 바람맞힐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제 슬슬 도착입니다.”

뤼글로우의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군터의 말에 두 남작은 나란히 말을 몰며 앞으로 나왔다. 특히 반드레온은 군터가 있는 선두까지 나와 멀리 보이는 위글로우를 눈에 담았다.

“오오. 저곳이 위글로우인가. 그나저나 코누다이안 영주께서는 도시의 명칭을 그대로 이어가시는군.”

“백성들에게 괜한 혼란을 주고 싶지 않다 하셨습니다.”

“그 뜻은 이해가 가지만…어차피 변혁의 시기가 아닌가. 큰 변화가 일어나면 혼란은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것이거늘, 너무 소극적이신 게 아닌가?”

“…….”

“이런, 이런. 혹여 오해는 말게나. 나는 평소 코누다이안 영주를 흠모하던 사람이야. 일전에는 그분께 도움을 받기도 했고 말이지. 물론 자네도 그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끝에 가서 반드레온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작아졌다.

“예. 뭐…….”

더 가까이 가자 위글로우에서 일단의 병력이 성문을 열고 나왔다. 군터는 느릿하게 다가오는 병력의 선두에서 위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분 영주님들을 뵙습니다. 코누다이안의 기사, 위벨이라 합니다.”

“위벨 경이셨군. 만나서 반갑소.”

위벨이 두 남작과 대면한 순간, 군터는 수하 병력을 이끌고 뒤로 물러났다.

이로서 그의 일은 끝났다. 그가 맡은 일은 어디까지나 호송까지다. 그 뒤의 접객 업무는 위벨의 몫.

“군터 경. 수고하셨습니다.”

“음. 수고하게.”

그대로 물러나려는 군터를 반드레온이 붙들었다.“군터 경. 고생 많았네. 엿새 뒤에 다시 보겠군.”

“예. 연회장에서 뵙겠습니다.”

군터는 마지막까지 깍듯이 예를 취하고 수하 병사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

막시밀리언이 주최한 연회는 엄밀히 말해 위글로우 시민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행사다.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초대장을 받은 소수뿐이고, 그들은 모두 어디서나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자들뿐이니, 위글로우의 시민들은 그저 흥겨운 음악소리를 멀찍이서 귀로 훔쳐듣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본래 잔치라는 것은 즐거움이 가득한 것. 그 즐거움이라는 것은 웅덩이에 가득 고인 물처럼 주변의 땅을 적시기 마련이다. 비록 높으신 분들만이 즐기는 연회라 해도, 그 들뜬 분위기가 흘러나오니 관계없는 시민들도 어느 정도는 덩달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돈 냄새에 민감한 상인들은 돈 벌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합심하여 영주인 막시밀리언에게 성의를 보이고 판을 벌려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영주관저를 중심으로 하여 높으신 분들의 잔치가 벌어진다면, 그 바깥으로는 서민들의 잔치가 벌어졌다. 위글로우 전체가 떠들썩하게 달아오른 것이다.

“크루기스, 볼드, 센트리올, 브록스…….”

할렌이 초대장이 발부 된 네 영지의 이름과 각 영지의 영주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스치듯 봤던 네 영주의 얼굴을 이름과 함께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신경 써야 할 귀빈이 그들뿐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네 사람이 네 영지의 영주들이라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으으. 살라스님께서는 다 외우셨습니까?”

“물론. 영주들을 호종한 기사들이며, 거상들의 이름과 얼굴도 외워두었네.”

“…역시 대단하십니다.”

“나처럼 할 필요는 없네. 자네는 크루기스 영주의 호위를 맡지 않았나.”

“예. 분명…제임스 크루거 자작이었지요.”

“그래. 그러니 그와 그의 기사들의 이름, 그리고 얼굴 정도만 기억해두면 될 걸세.”

“하아.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왠지 불안해서 말이지요.”

“불안하다?”

“예. 귀족…그것도 저희 영주님보다도 높으신 양반이 아닙니까. 혹 무슨 실수라도 저지를까 싶어.”

베이고르의 귀족 체계는 작위(爵位)에 따라 6등급으로 나뉜다. 가장 위에서부터 ‘공후백자남’으로 이어지는 오등작(五等爵)이 있으며, 그 밑으로는 작위가 없는 평귀족이 있다. 코누다이안의 영주인 막시밀리언은 이 6등급 중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직위에 있으며, 그보다 한 단계 위인 크루기스의 영주 제임스 크루거 자작은 연회에 참석한 이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이었다. 그런 높은 신분의 귀족을 호위하게 되었으니 할렌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어차피 호위라고는 해도 형식적이라는 걸 알지 않나. 일은 그들이 알아서 다 할 걸세. 그저 멀찍이서 지켜만 본다고 생각하게.”

“예. 알고 있습니다만…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크루기스에서 온 영주의 호위 병력이 있다. 실제적인 호위 임무는 그들이 수행할 것이고, 할렌과 그의 수하들은 그저 보조적인 역할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머리로 안다고 해서 가슴이 그대로 따라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드디어 내일이군요.”

“그래.”

이미 올 사람은 다 왔다. 그들은 벌써부터 저마다 인사를 나누면서 면식을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것은 연회의 주최자인 막시밀리언도 마찬가지였다.

“부디 끝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군요.”

“그래야지. 그걸 위해 자네와 나 같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여야하겠고.”

어느덧 해가 저물어갔다.

곧이어 밤이 찾아오고, 그 뒤로 새벽이 지나갔다.

그리고 저물었던 해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여드레 동안 이어질 연회가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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