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제국이 바크렌을 상실하면서 바크렌은 여러모로 고립된 모양새가 되었다. 바크렌과 교류하던 타라냐드와 본다인, 리바스트라에서 주 경계에 병력을 주둔시키며 바크렌으로 움직이는 모든 물자를 차단시킨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제 바크렌은 더 이상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으니까. 당장 군대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침공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물자의 교류를 빤히 허용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제국의 조치는 바크렌에 있어 상당한 타격이었다. 원래 사람이란 풍족함은 몰라도 부족함은 아는 법. 함께 갈색초원과 맞닿아 있는 타라냐드는 그렇다 치더라도 리바스트라나 본다인에서 건너오던 남방의 물자는 바크렌 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어느 정도는 이바지 하는 바가 있었다. 특히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이 누리는 사치의 상당부분은 황도 리비암을 비롯한 남방주(南方州)들에서 건너오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슬슬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리 심하지 않은 수준입니다만.”
위벨이 위글로우 상류층의 동향을 말하며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코누다이안의 영주로서 위글로우와 근방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시밀리언이라고 해도 상류 사회의 목소리를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다. 비록 지금은 예전과 같은 3대 가문도 없고, 또한 상승세를 탄 막시밀리언의 기세가 워낙에 좋기에 그가 무엇을 하든 순응하고는 있지만 언제까지고 그리 순순히 따라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막대한 부와 영향력을 가진 유지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 막시밀리언으로서도 골치 아파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전장에서 만난 적군처럼 단순히 힘으로 찍어 누를 수도 없는 자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걱정할 필요 없다. 어차피 신생 베이고르의 건국 초기다. 당분간은 숨을 죽이며 눈치를 살피겠지. 그리고 그들의 인내심이 다할 때 즈음이면 리바스트라와 본다인의 국경 봉쇄도 느슨해질 것이다.”
“제국조정이 지방의 통제력을 상실하리라 보십니까.”
“그래. 나는 그렇게 본다. 자네 역시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예측은 합니다만 확신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자네의 고민을 이해하네. 이와 같은 상황은 일찍이 전례가 없는 일이기에 그런 것이야. 황제폐…아니, 제국의 황제가 갖는 상징성이란 그만큼 거대한 것이었으니까. 영원토록 제국의 번영을 이끌 살아있는 신 그 자체로 여겨지지 않았는가. 그랬던 그가 이렇게 한 순간에 사라질 줄은 그 누구도 몰랐겠지.”
“바로 그렇습니다. 누구도 지금과 같은 날을 예견하지 못했겠지요.”
미트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말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어렸을 적부터 황제…는 이 땅에 현신한 신 그 자체라고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니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황제도 그렇고 군주도 그렇고, 사람이 어떻게 몇 백 년 동안이나 살면서 영웅담에나 나올 법한 업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나 역시 자네와 다르지 않았네. 아무튼, 그의 불가사의함은 아무래도 좋아. 어쨌거나 황제는 죽었고 그로 인해 제국은 전에 없던 혼란함 속에 빠졌다. 황도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황위 쟁탈전은 급속도로 그 불길을 키우고 있고, 무수한 지방 정부의 수장들이 그 다툼에 휘말려가고 있지. 실상 리비암의 중앙 정부의 기능은 이미 마비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지금 제국 중앙 정부에 수장이라 할 자가 있는가? 있더라도 하나가 아니지. 당장 생각나는 자들만 해도 한 손으로 다 셀 수가 없군. 거기에 그들은 이름값은 크다지만 그렇다고 중앙 정부의 행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지도 않아. 그보다는 못해도, 버금가는 정도의 실력자들이 또 수두룩하기 때문이지. 몸뚱이는 하나인데 머리는 그렇게나 많으니, 어찌 의견을 모으고 어찌 행동할 수 있겠는가?”
막시밀리언의 시선이 군터에게 향했다.
“군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런 상황에서 리바스트라나 본다인, 타라냐드 같은 지방 정부가 어찌 움직일 것이라 보는가?”
“…….”
군터는 이 물음이 일종의 시험처럼 느껴졌다. 막시밀리언의 시선에 담긴 일말의 기대감이 그런 추측에 힘을 더했다.
그는 대답하기에 앞서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그 또한 부사령관으로서 회의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들은 바 있었다. 막시밀리언과 위벨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느 정도 대국을 보는 식견도 어설프게나마 익힐 수 있었다. 덕분에 여전히 복잡한 수의 계산 같은 것은 질색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 질문에는 어느 정도 스스로 생각하여 판단을 내릴 줄 알게 되었다.
“살 길을 찾으려 하겠지요.”
막시밀리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구체적으로 말해보겠나?”
“제국의 중앙 정부가 기능을 상실했다는 건 더 이상 그들이 지방에 대해 신경 쓰지 못한다는 뜻이니, 지방 정부도 슬슬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겠지요. 자기들끼리 뭉쳐서 힘을 합친다거나…인근의 실력자에게 줄을 댄다거나 하면서 말입니다.”
“끝인가?”
“예.”
“훌륭하군. 다만 거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갔다면 완벽했을 터인데 말이지.”
“부족함을 채워주십시오.”
“중앙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한다 했어. 그렇다면 지방 정부는 다를 것 같은가?”
“…….”
“아니야. 그렇지 않아. 어차피 중앙 정부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주도의 성주나 총독들의 권한이란 제국이 내려준 것이야. 그들이 힘 있는 호족들을 아래에 둘 수 있는 권리는 제국으로부터 비롯된 거라는 말이지.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흘러가면서 지방에 대한 제국의 통제력이 약해지게 되면 성주와 총독의 힘도 자연히 빠지게 된다. 그리 되면 호족들도 하나둘씩 다른 생각을 갖게 되겠지.”
“허면…그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씀이신지?”
“모르지. 그래도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가기야 하겠는가. 다만 대 바크렌 봉쇄령과 같은 지시는 힘을 잃을 거라는 말이지. 교역이란 어느 한 쪽에게만 득이 되는 게 아니거든. 상인들이 미쳤다고 남 좋은 일을 하러 원행을 다니겠는가?”
“아아.”
막시밀리언은 과도한 예상은 하지 않았다. 단지 가능성만 열어놓았을 뿐.
“아! 그래. 이걸 깜빡했군. 조만간에 연회를 열 생각이네. 위글로우뿐 아니라 주변의 유지들을 모두 초대하고, 인근의 영지들에도 초대장을 보낼 생각이야.”
“연회 말씀이십니까?”
“그래. 성대하게 열어볼 참이야. 얼굴들도 익히고, 내 얼굴도 알려야겠지. 날은 대략 한 달 후 정도로 보고 있네.”
“기대되는군요.”
“연회라니. 정말 오랜만이 아닙니까.”
연회를 싫어하는 이는 드물다. 물론 목적 없는 연회라는 것은 없지만, 그렇다 해도 맛 좋은 술과 음식 거기에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음악과 한껏 치장한 여인들까지 있는 연회장은 사내라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들뜨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
회의 막바지에 대수롭지 않게 흘리듯 한 말이었지만 한 달 뒤의 연회 준비로 인해 위글로우는 제법 떠들썩하게 달아올랐다. 단순히 연회 자체를 준비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겠으나, 연회에 초대를 받을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꽤나 신경 써야 할 문제였다. 특히나 다른 영지에서 오는 이들 같은 경우는 별도로 맞이하는 병력이 움직여야 했다. 물론 외부에서 오는 초대객의 경우는 각자 호위 병력을 대동할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손님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은 초대를 한 쪽이 지는 것이 맞으니까 말이다.
“영주님께서 여는 연회라니. 외부에서도 귀빈들이 많이들 오신다면서요?”
“그렇게 될 것 같아. 외부에서 오는 이들만 백 명이 넘어갈 것 같더군.”
인근 영지의 영주들은 물론, 호족이며 큰돈을 굴리는 상인들까지 일일이 초대장을 돌리니 그 수가 백이 훌쩍 넘어갔다. 거기에 외지의 객들 말고 위글로우의 유력자들도 모일 테니 초대장을 받은 이들의 수만 수백은 될 터였다. 그리고 그들이 각기 한 명씩만 동반인을 데려온다고 치면 실로 어마어마한 수의 인원이 오게 되는 셈이다.
“그 많은 인원이 다 감당이 될까요?”
벨리사가 문득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이미 카트리나 리에론 주최의 파티에도 몇 번씩 가 본 만큼 이제는 영주관저가 된, 옛 사령관저의 연회장을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작지는 않은 크기였지만 말이 나온 만큼의 인원을 수용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영주관저의 연회장만 쓰지는 않는다더군. 내성 안쪽을 전부 연회에 사용할 수 있게끔 개조한다고 들었어.”
군터는 일전에 리에론 가문이 장자의 생일을 기념하여 연회를 열었을 때를 떠올렸다.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와 비슷한 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싶었다.
“무척이나 성대한 연회가 되겠네요.”
“그렇겠지. 영주께서 마음먹고 진행하시는 일이니.”
단순히 친목이나 다지자는 연회가 아니다. 인근 영지 영주들 중에는 제국에서 귀의한 이들도 있고, 순수 베이고르의 귀족인 자들도 있다. 처음부터 베이고르의 귀족이었던 영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국 출신인 영주들 또한 막시밀리언과 직접적으로 친분이 있는 자는 없다. 따라서 막시밀리언은 이번 연회를 통해 앞으로 자주 얼굴을 보게 될 자들과 면식도 트면서, 동시에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살펴보고자 했다. 물론 그런 의도는 초대를 받은 자들 역시 잘 알고 있을 테고, 그들 역시 같은 의도를 가지고 위글로우를 찾게 되리라.
‘얕보여서도 안 되고…동시에 너무 튀어서도 안 된다 했지.’
막시밀리언이 넌지시 흘린 이야기다. 상대에게 얕잡아 보여서도 안 되고, 너무 경계심을 심어줘서도 안 된다는 당부는 군터에게 있어 조금은 어려운 것이었다. 해서 그는 이번 연회 기간 동안에 되도록 조용히 자리만 지킬 예정이었다.
“잘 됐네요 정말.”
“응?”
“사…아니, 영주 부인 말이에요. 어쨌든 그렇게 중요한 연회면 부인께서도 하실 일이 많으실 거 아니겠어요?”
“뭐, 아무래도 그렇겠지.”
연회는 남자들만의 무대가 아니다. 오히려 남자들보다는 여인들이 활약하는 무대다. 밖에서 힘을 쓰는 것은 사내들이지만, 그런 사내들을 움직이는 것은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여인들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은데. 영주 부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군터의 물음에 벨리사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떼었다.
“사실…요즘 영주 부인께서 좀 울적해 보이셨거든요.”
“어째서?”“아이 문제도 있고, 그…여자에 대한 소문도 점점 넓게 돌기 시작해서요.”
“아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영주 부인이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은 그도 접한 바가 있었다. 또한 막시밀리언이 심처에 두고서 애지중지한다는 ‘그 여자’에 대한 소문 역시도.
전자야 그렇다 쳐도, 후자는 그가 모를 수가 없다. 그 여자, 라일라를 막시밀리언에게 바친 이가 바로 그였으니까 말이다.
‘확실히 평범한 계집은 아니었지.’
아직까지도 라일라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만큼 강렬한 첫인상이었다. 무녀라서 그런지 굉장히 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여인이었다. 한 손으로 목을 꺾어버릴 수 있는 상대에게 꺼림칙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던 건 그녀를 보았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